최인호소설 '길없는 길'의 주인공 경허 성우스님의 선시하나...
山與人無語 산과 사람은 서로 말이없고
雲隨鳥共飛 새는 구름따라 함께 난다
水流花發處 물 흐르고 꽃 핀 곳에서
淡淡欲忘歸 담담히 돌아갈 생각을 잃었네
경허집에 있는 은선동隱仙洞이라는 시인데...
이 시를 예전에 내장산 남창지구 은선동을 걸어가며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풍광이 좋은 곳은 사람이 많이 찾아와
도리어 은거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라산 탐라계곡 은선동은
신선이 은거하기 딱 좋은 위치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방선문>으로 신선을 방문하러 갑니다.
들러진 바위 <등령구>앞에서 아무리 신선을 기다려도 오지 않습니다.
<환선대>에서 목청높여 신선을 불러 봅니다.
<우선대>에 가면 만날수 있다하여 우선대에 가봅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야속한 신선이여
신선이 은거한 곳까지 직접 가야만 만나뵐수 있으려나..
게곡을 따라 올라갑니다.
산록도로에 걸쳐있는 <탐라교>를 지나고
또 기약없이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조그만 <당>을 봅니다.
바위돌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잘 돌봐줍서하고 부탁을 드리고 올라가다가
타고 오르기 조금 힘들겠다하는 폭포를 만납니다.
통상 여기서 오른쪽 산기슭으로 치올라가서 <능화오름>을 가고 <검은기지>를 갑니다.
하지만 능력껏, 재주껏 이 폭포위로 올라서면 제법 큰돌무더기 몇개를 만나게 됩니다.
이 돌무더기 주변에 신선이 은거해 계십니다.
최초로 이계곡을 찾을때는 이렇게 왔습니다
하지만 오눌은 왼쪽 산기슭을 타고 주욱 올라가다 폭포위로 바로 내려왔습니다.
게곡을 따라 조금만 더 갑니다.
신선이 은거한 동네 코앞에서 부터의 사진입니다.
누군가가 문패를 달았습니다.
隱仙洞
잘안보이지요
다시한번...
잘 보일때까지...
글씨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할 공력이 않되니 뜻만 볼 뿐이지요.
그 아래로 장한규등 일곱명의 이름이 써있고
조금 떨어진 우측으로는 거사 최치경居士 崔致敬이라고 외로운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단애쪽으로 다가가면 왼쪽 구석 바위면에
조선조 제주목사 조우석趙禹錫 일행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목사, 판관, 막빈은 이름위에 직함을 쓰고
직함없이 몇사람의 이름이 이어지다가 笙누구, 琴누구하면서 악기의 이름이 나옵니다.
전속악단을 데리고 왔습니다.
막빈은 부룰때는 비장이라고 부르지요.
모든 마애가 한벽에만 있습니다
4년전인가 이계곡을 통해 관음사등산로 나무다리까지 간다고 가던 길에 이 마애를 발견하고
가던길 멈추고 일행과 헤어져 주변을 찬찬히 살펴 보았는데 다른 마애는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치기어린 마음으로 십오회라고 거꾸로 쓴게 있었고
朴世丁이라고 새긴 습작은 있습니다만
제대로 된 마애는 발견할 수 없었지요.
장한규라는 이름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1939년 동아일보 한시공모전에 '금강산기'라는 작품으로 장원으로 뽑히신 분이고
이를 통해 장한철의 후손을 알게되어
그 후손으로 부터 표해록을 받아 장시영에게 넘겨
장시영이 1959년 정병욱 서울대 교수에게 의뢰하여 학계에 발표하게 함으로써
장한철의 표해록이 세상에 빛을 보게 한 분이지요.
장한규과 같이 이름이 쓰여있는 박치순은
1940년대 말 50년대 초 제주사회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던
칠성로의 박치순하르방이라 부르던 제주원로이셨지요.
장한규의 몰년이 1942년이고 당시 63세이니
각수를 대동하고 올라와 탐승을 하려면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었어야 하고 체력도 있어야 할테니
40대에서 50대사이에 왔다고 보면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장한규 일행은 이 자리를 다녀갔을 겁니다.
전용 악단을 데리고 온 조우석목사는 언제 이곳을 다녀갔을까요.
맨 말미에 丁酉九月 日이라고 쓰여 있고
그의 재임기간이 1836년 3월에서 1837년 11월이니 그중 정유년은 1837년입니다.
조우석 목사가 다녀간 후 100여년 후에 장한규일행이 다녀간 것입니다.
아 물론 그 사이에, 아니면 그 후에 거사 최치경과 자연인 박세정
그리고 십오회 누군가가 이곳을 다녀 갔습니다.
그리고 꽤 오래전에 나도 여럿과 함께 이곳을 지나다 마애를 봤지요.
궁금한 것이... 우리나라 사람은 몰림과 쏠림이 심하여
누군가가 좋다고 하면 꼭 가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스스로 높은 직위에 있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주변의 권유가 있어 마지못한 듯 일필을 남겨 마애를 하게합니다.
그래서 제주도만 해도
용연, 방선문, 백록담, 산방굴사 등에 빼곡한 마애들이 남아있는데...
여기는 조우석목사 이전에 아무도 않왔는지 아무런 흔적도 없고
그 이후에도 오는 이가 없었는지 아무런 마애가 없다가... 갑자기
100년뒤 장한규일행의 마애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또 끝입니다.
그래서 다른 마애가주변에 있는데 못찾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 주변 암벽을 몇번을 뒤져도 소득이 없어
이 마애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알거라고 생각해서
나보다 더 숙달된 산꾼들에게 물어보았으나
한라산 정상부 그리고 백록담 내부의 마애는 다 알지만
이 은선동 마애명이야기 조차를 처음 듣는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전 능화오름을 올라가면서
마애앞 마른 폭포직전에서 산기슭을 타고 올랐다가 내려와 한참 지나간 후
그때야 아 여기 들렀다 오름을 오를걸...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바로 폭포위로 내려와 마애 앞으로 왔습니다만
본거 또 본다는 것 외에는 별 감흥이 없습니다.
왔으니 바로 돌아가기는 그래서... 땀을 흘리러 계곡 깊숙히 더 들어갑니다
이제 기슭을 타고 올라가 옛 화전속 집터를 찾아보려 합니다.
몇곳의 돌담을 지나면서도
예전에 발견했던 제대로 남아있는 집터를 찾지 뫃하였습니다.
조암선생이라는 분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몰라도
어느 분의 비문에 조암학인 누구누구라고 쓰여있습니다
공연히 궁금해하면서 카메라를 집어 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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