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읍을 왔습니다.
영모루를 오르려고 왔는데 오는 도중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립니다.
굳이 오름에 올라 비맞을 일 없으니 성읍리를 한바퀴 돌기로 합니다.
성불오름과 비치미 오름사이에서 천미천과 갈라져 흘러온 진평천을 넘어
성읍 2리로 들어갑니다.
성읍2리는 구룡동九龍洞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마을과 아홉마리 용과의 어떤 관계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추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홉마리 용과는 상관없이 구렁팟이라는 마을이름을 다만 한자로 구룡동이라 적을 뿐이랍니다.
구렁팟은 땅이 움푹하게 팬 곳에 있는 밭이라는 말입니다.
이 마을은 원래 할미가름, 안팟, 짐댕이골 일대에서 설촌한 마을로
이조 철종때부터 할미가름에서 구렁팟으로 이동하여
구렁팟, 안팟, 짐댕이골 이라는 3개 자연부락이 형성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때 성읍2구로 개칭되었고,
1948년 4·3으로 인해 1955년까지 마을이 폐쇄되었다가 이후 주민이 구렁팟일대로 재입주, 정착하였으며
1961년에 성읍2리가 되었습니다.
목축을 위주로 하는 전형적인 제주도 중산촌 마을입니다.
마을회관앞입니다.
무언가 어설프다 싶었는데 현지에서는 그 이유를 알수가 없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입구 좌우의 돌하르방이 키는 이지역 돌하르방크기인데 얼굴과 몸매는 제주읍성것을 닮다보니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마을의 중심가 노인회관 앞으로 왔습니다.
전 리장 양찬서 기념비와 빈비각
1961년에서 63년까지 이장을 하신분인데 특별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옆에 빈 비각에는 누구의 비가 있었을까요.
세월이 지나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 누군가가 들어내어 버린 것일까요?
이 나이 많은 폭낭은 그 내역을 알텐데 물어본다고 대답할 일이 없지요.
나뭇가지 아래로 보이는 개오름을 봅니다.
덮을 蓋를 써서 개오름이라고 합니다.
제사올릴때 밥주발 뚜껑을 개라고 하지요.
그런데 蓋를 dog으로 듣는 이들이
오름의 이름유래라고 이런 저런 말들을 만들어서 이제는 dog오름이 되었습니다.
가마귀동산입니다.
둥그렇게 쌓아올려 그 위에 까마귀를 닮은 돌 하나를 올려놓은 탑이 있는
마을 동쪽 지역입니다..
탑의 동쪽 편으로 ‘물골’이 있어 이 방위가 허虛하여 액厄이 마을에 끼치는 것을 막으려고 조성한 탑이라고 합니다.
탑위에 올려져 있다는 까마귀 닮은 돌은 있다고 하니 있나보다 하는 정도로 사철나무에 가려 보이질 않습니다.
북쪽 개오름을 봅니다.
마을 중심부에서 바라본다면 개오름은 까마귀동산 좌측에 있으니
이 탑은 영주산과 바스매에서 오는 기운을 막으려 한듯 느껴집니다.
포제단으로 갑니다.
마을 북쪽 목장 입구 동쪽 관정管井옆으로 들어가면 제장이 있습니다.
제장과 제단은 시멘트로 만들었고 제단옆에 제를 준비하는 건물이 있습니다.
4·3사건 이전에는 성읍1리와 포제를 함께 지냈으나
4·3사건이후 마을로의 복귀가 늦어지고 구성원이 많이 바뀌어 성읍 1리와 분리된 포제를 지냅니다.
제례는 1리와 같이 상·하단을 구분하여 제를 올리는데
상단제에서 먼저 ‘포신’을 모신 포제를 지내고
이어서 제단 아래쪽 하단에 제수를 진설하고 제수임신지위諸首任神之位 (사람의 수명을 관장)
염질신지위染疾神之位 (마을민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 목동신지위牧童神之位 (목축을 관장)를 모시는
하단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여산송씨 정가공파 입도조 묘역을 알리는 표지석입니다.
정가공파正嘉公派 파조인 서瑞의 17세 신량愼良이 제주濟州로 유배되어
그 후손들이 제주도 남부지역에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여산송씨 지신공파 제주입도조 宋楠의 묘는 제주시 영평동에 있고 자손은 제주도 북부지역에 많이 있습니다.
왼쪽, 오른쪽 착각하여 멀지도 않은 길을 잘못들어 교회옆 수목재배장으로 왔습니다.
굳이 묘역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교회앞으로 나왔습니다.
가나안 교회 입니다.
가나안교회는 성결교 계통의 교회입니다.
1980년대 초반 마을 북쪽 목장 직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된 교회로
1985년 경에 교회를 짓기 시작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목장이름은 바뀌었어도 교회이름은 그대로 입니다.
구렁팟 당 아래 멋진집
어느 학교 선생이 산다는데 공연히 물어보았다 이상한 사람이 될 듯하고
하여간.. 이제 당에 가려면 이집 뒷마당을 걸쳐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집 앞쪽 담은 거창한데 뒷쪽 동산쪽으로는 담이 없어서
동산앞을 지나가는 기분이 꼭 남의 집을 무단침입하는 것 같아 아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구렁팟당입니다.
문이 잠겨 있으니 문앞에서 멍하니 있습니다.
이 당에는 양남택이라는 사람에 대한 설화가 있습니다.
제주의 마을 마을홈피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양남택은 지금의 '구렁팟'을 설촌한 사람이며, 또 그마을의 본향당本鄕堂을 설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구렁팟'은 아주 오랜 옛날에 이미 동네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중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폐촌되었다가 다시 그에 의해서 재건된 마을이다.
양남택은 원래 정의고을에서 이방吏房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정의고을 현감이 3년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되었다.
현감을 배웅해 드리기 위하여 제주시 화북포구로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연일 태풍이 불어 배를 띄울 수 없어서 며칠 동안 화북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태풍은 보름 동안이나 계속되어 이만저만한 걱정이 아니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하얀 소복으로 단장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나는 한양 남대문 밖 도정승都政丞 아들이노라! 제주도에 왔다가 고향엘 가지 못할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 화북에서 있고 싶어도 해감냄새가 지독하여 도저히 머물러 있지 못하겠으니,
나를 어느 깊은 산골로 가서 잘 모셔달라.
그러면 너에게 부富를 내리겠노라."
깨고 보니 꿈이었다. '개꿈이려니' 생각하고 지나쳐 버리려고 했었는데,
이튿날 밤 꿈에도 그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큰 고민거리였다.
'아, 귀신이 꿈에 나타나서 나에게 잘 모셔달라고 부탁을 한다고 하면, 무슨 증거물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날 밤 꿈에도 서울 남대문 밖 도정승 아들이라는 할아버지는 나타났다.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는 양남택의 걱정을 이미 들었다는 듯이,
"날모셔 가려거든 원님이 타고 가려는 배의 나무조각을 하나 뜯어다가 거기에다 화상을 그리되,
코 위로는 떠나는 원님의 얼굴만 그리고, 그 밑으로는 새로 부임해 오는 사또의 모습을 그리면
나의 혼이 그리로 들어가서 너를 따라가겠노라."
양남택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배로가서 널판대기 하나를 떼어다가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의 지시대로 화상畵像을 그렸다.
귀신의 조화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날이 화창해졌다.
원님을 배웅하고 나서 화상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 양남택은,
'구렁팟'으로 화상을 모시고 집이라기보다 낟가리 비슷하게 초옥을 만들어 그 안에 모셔 내버렸다.
몇 해 후였다.
어느 날 밤 꿈에 다시 그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아, 나를 구렁팟으로 모셔줘서 고맙긴 하다마는 어느 누구 밥 한그릇 대접하는 이도 없고 해서 내가 살아갈수 없으니,
네가 내 곁으로 와 살면서 나를 잘 대접해 주면, 당장 너를 부자가 되게 해 주마."
'들은게 병'이란 격으로 귀신이 꿈에 나타나서 그렇게 말했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양남택은 인가라곤 한 채도 없는 '구렁팟'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다
. 아닌게 아니라 귀신의 조화인 듯이 농사를 짓기만 하면, 팥씨 다섯 방울만 뿌려도 다섯말이 날 정도로 해마다 풍년이었다.
양남택은 이내 곧 부자가 되었다.
이는 귀신의 도움이라고만 여겼다.
이 소식은 퍼지고 퍼졌다.
차츰차츰 인근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구렁팟으로 모여들어 살기 시작해 큰 동네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양남택은 그 마을(성읍 2리)의 설촌자가 되었고,
서울 남대문 밖 도정승 아들이노라며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는,
'구렁팟'으로 모여든 마을 사람들의 제반사諸般事를 수호해 주는 본향당신本鄕堂神이 되었다."
위 설화의 '배의 나무조각을 하나 뜯어다가 코 위로는 떠나는 원님의 얼굴을 그리고,
그 밑으로는 새로 부임해 오는 사또의 모습을 그리니
서울 남대문 밖 도정승 아들이노라며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의 혼이 그리로 들어갔다"라는 말에서 기인한 듯
이 당집에는 나무로 조각한 신상神像을 신체神體로 모시었다 합니다.
어느날 당집이 화재를 당하였을 때 한 신앙민이 불길 속에서 신체를 모시고 나왔으나
거의 다 타 버렸기 때문에 다시 돌로 새겨 만들었습니다.
그 석상을 보러 온건데 문이 잠겨 있으니 그냥 멍하니 서있을 뿐입니다.
신상은 남자신상인데 녹의 홍상을 입혔습니다.
머리에는 검은 유건을 썯지만 녹색처고리를 입고 붉은 치마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그냥 머리속으로 되집어 봅니다.
당집 뒤 구렁입니다.
이 구렁아래 밭들이 주욱 펼쳐져 있어 구렁팟이지요.
진평천이 흘러 내려와 모인 구룡밭식당앞 소입니다.
자욱한 안개속에서 비가 오니 용이 올라올것 같습니다만
아홉마리의 용이 이 소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가요?
비가 계속옵니다.
어쩔까 하면서도 성읍1리 포제단으로 왔습니다.
앞으로 보이는 것은 성황단이고
뒤로 포제단이 있습니다.
포제단은 두곳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곳은 포신을 모시는 상단입니다.
포신단옆에 하단이라고 하는 또 한곳의 제장이 있습니다.
포제가 끝난 후 제수임신지위諸首任神之位와 염질신지위染疾神之位,
목동신지위牧童神之位를 모시는 제를 지냅니다.
그 아래 있는 제장이 서낭당(성황당)입니다.
성황신이 정말 객지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성황신이 제신중에 웃신으로 가장 위에 있어야 하나
읍성 북쪽에 있던 성황당이 철폐되어 이쪽으로 옮겨올때
이미 주민들의 포신에 대한 경외가 자리잡아있어 상당과 하단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아래쪽 벽에 이어서 제장을 설치하였습니다.
포제단아래 포제를 준비하는 포제청이자 공동묘지의 안치소로도 쓰이는 건물입니다.
멀지 않은 곳으로 남산봉이 보입니다.
각종 기념비가 줄지어 서있는 성읍 1리사무소앞으로 왔습니다.
성읍 1리는 정의 고을이라고 하지요.
제주의 마을 마을 홈피에 의하면
약 650년전 맨 처음으로 거천리에서 설촌한데 이어
소진리, 영전리, 화원리, 진사리까지 5개 부락으로 형성되었다가
부락의 중심지인 진사리로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제주도는 조선조 태종 16년(1416), 안무사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 약 5세기 동안 삼분하여 통치되었습니다.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산북山北은 제주목濟州牧으로 하고,
산남은 대략 중앙부분을 둘로 나눠 서西는 대정현, 동東은 정의현으로 나누었습니다.
정의현의 현청은 성산읍 고성에 있었으나 그 위치가 정의현의 구석으로 치우쳐졌다하여
현청개설 7년만인 세종 5년(1423)에 현청이 이곳으로 이설됩니다.
그때에 성읍리로 개칭 되었으며 정의향교도 후속하여 서문 밖으로 이설되어 옵니다
정의현의 현청이 개설된지 498년만인 1914년 면사무소가 표선리로 옮겨가게 되면서
지역의 중심역할을 상실하고 평범한 산촌으로 바뀌어 옛고을의 자취만이 몇몇 남겨있었으나
1984. 6. 7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 민속마을로 지정된 이후 관광지로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리사무소 앞에 위치한 비석들을 둘러봅니다
참봉이기선휼궁비 參奉李奇善恤窮碑
이 비碑는 정의현성 남문 부근 조일훈 가옥 서쪽 울타리 돌담 속에 있었는데
1999년에 마을회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기선李奇善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쌀을 마련하여 온 마을 사람들에게 기근을 모면하게 하는 등 백성 구휼에 힘썼다고 하며
그 공을 기리기 위해 1908년에 세워졌습니다.
전면에 참봉이기선휼궁비參奉李奇善恤窮碑,
전면 우측에 년흉하교 기자함포年凶夏交 飢者咸飽, 좌측에 미두명분 일향몽은米斗名分 一鄕蒙恩,
隆熙二年正月 이라 쓰여져 있습니다.
부인이학기념비 夫人李鶴記念碑
夫人李鶴記念碑라고 중앙에 큰 글씨로 쓰여있고
보아서 우측 중상단부에 朴仁生 萱堂 그리고 중하단부 좌우로 敎倣孟母 媚思周姜 捐金百圓 資我一鄕
좌측 중간부에 昭和十年五月三十日 城邑里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부인 이학을 기념하는 비석인데 이학부인은 박인생의 어머니이고 교육열이 대단한 미모의 부인이셨나 봅니다.
그 분이 100원을 희시하여 마을의 자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100원은 1934년 마을회관을 확보하는데 쓰였다고 합니다.
이 부인의 남편 박종신은 지방유림에서 알아주는 분이었음에도
누구누구의 부인 누구라고 표기하지 않고 박인생의 어머니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는
아마 이 부인이 모든 출연과 기탁을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 성진회사건으로 1929년 봄 체포되어 강제 귀향되었다가 사망한
아들 박인생을 기려 박인생의 이름으로 하였기 때문이겠다라고 생각해 봅니다.
재일교포 향토건설기념비
1965년에 세운비입니다.
재일교포 윤정환선생 송덕비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성읍에서는 매년 3월 3짇날
면장과 마을 유지, 정의향교 임원 등과 마을 사람이 참가하는 정소암 화전놀이가 재현되었는데
이에 드는 일체의 경비를 제공하신 분입니다.
향교훈장 현갑생 부인 강을순 공덕비
고 이동신여사 송덕비
인술을 연마하여 박애정신으로 동네 사람들의 인명구제에 힘썼다고 하십니다.
가시리에서 성읍으로 들어오는 입구쪽으로 갑니다.
열녀송씨지묘라고 쓰인 묘비가 있습니다.
뒷면에는 大正六年丁巳二月十五日六代孫康元栢誌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1917년에 조성한 묘인데 비석 밑이 묘인지 단인지 애매합니다.
누구는 열녀송씨의 무덤이 서쪽 밭안에 있고 이 비석은 그 위치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던데
예전에 부근을 해메었어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석에 열녀송씨지묘라고 쓰여있으니 이 아래부분이 묘지일듯 합니다.
표선에서 들어오는 쪽 입구에 있는 효열각에 송씨열녀비와 같이 있는 아들 강운의 효자비를 보면
강운이 모친상을 당하여 통곡하는 모습이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장제례의 예법에 따라 극진히 하였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 무덤은 그 당시에는 귀한 건축자재인 시멘트를 이용해서
특별히 조성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렵니다.
묘비 위 가첨석은 훗날 후손이 어디서 발견하여
묘비에 덮으면 좋을 것 같다고 묘비의 상단부분이 들어가게 홈을 파서 씌운것 같습니다.
묘비의 상단부분이 보통묘비의 윗부분처럼 완만히 둥근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2007년에 열녀송씨묘 옆에 강인성, 강지명 공덕비가 섰습니다.
인성은 1971년 표선쪽에서 들어오는 입구에 효열각을 지을때 돈을 내고
지명은 책임자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공덕비를 그곳에다 세우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
이유가 있겠지요.
성읍1리 애기당입니다.
올레를 따라 들어갑니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당으로 들어갑니다.
당궐이 많습니다.
자손들 잘 그늘뤄주고 가내평안하게 해달라고 생기 맞는날 맞춰서 다니고 계십니다.
법성사 절집입니다.
입구의 공덕비들...
한때 일붕선교종에 속해있던 절집앞을 지나가면 참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서경보스님 생전 선교종이 잘 나갈때는 무척 많은 절집이 일붕선교종임을 자랑스래 밝혔습니다만
지금은 일붕선교종이라는 표시도 없어 남아있는 일붕스님의 글씨비석을 보고
아 한때 일붕선교종에 속해 있던 절집이구나하고 알게되지요.
중흥을 기원하며 부처님을 뵙습니다.
자조 자립 새마을정신
1972년에 만들어 세워진 콘크리트 비석입니다.
이때 부터 시작된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와 성읍리를 잇는 도로포장과 전화사업이
1975년 1월에 준공되었습니다.
작년말 박근혜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은 우리 현대사를 바꿔놓은 정신혁명이었고,
그 국민운동은 우리 국민의식을 변화시키며 나라를 새롭게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한적 있습니다.
맞는말입니다.
새마을운동이 초기의 농촌개발사업에서 출발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엄청난 물량적·정신적 성과를 얻어가면서
점차 비농촌지역으로 확산된 조국근대화정신의 소산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새마을 사업이 새마을 운동이 되고 그것이 새마을 정신으로 이어져
19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뒤에서 받들어 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으로 점차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는 상황을 농민과 서민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유신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돌파구로 추진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마을운동이 가진 문제점을 기억하여
제2의 새마을 운동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운동이라도 정부 주도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될 수가 없으며
그 진행과정에서의 역기능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마을에서 효열각이라 부르는 곳입니다.
관광객들이 다니는 곳에서 좀 떨어져 있다보니 최근에는 정비가 않되고 있는 듯합니다.
안내문을 봅니다
숙부인여산송열녀정려비
숙부인임도 알려야 겠고 관향도 밝혀야 겠고
열녀임도 알려야 겠고 조정으로부터 정려되었다는 것도 알려야 겠고...
참 제목이 복잡합니다.
전력부위 강효자 정려비
숙부인 여산 송열녀와 강효자는 모자간입니다.
전력부위란 조선시대 종구품 무관에게 주던 품계로 문관의 장사랑과 같은 품계입니다.
종9품 품계의 관원들 부인의 작호가 유인孺人입니다.
그래서 관직이 없던 이들의 부인인 여성들이 돌아가시면 위로의 의미로 유인孺人의 작호를 줍니다.
안내문에 기재된 숙부인여산송열녀정려비의 내용을 옮겨봅니다.
"열녀 송씨의 본관은 여산, 이름은 천향千香이요,
통정대부 송시중宋時仲의 딸이며 통정대부 信川康氏 시한時漢의 아내이다.
남편의 병이 위독한 때 백방으로 약을 구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치료에 힘썼으나 효과가 없으므로
하늘에 병이 낫기를 빌고 자신이 대신 죽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즉시 머리를 깎고 얼굴을 궂게 고쳐 세속과의 접촉을 멀리 하자는 결심을 보였고
땅을 치며 하늘을 보며 울면서 따라 죽을 것을 결심하여 음식을 끊고 염습과 장례를 마친 다음 죽으려고 할 즈음에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자 차마 죽을 수 없어 어린 아이를 길러 집을 이루어가게 하면서 죽기를 맹세하고
정절을 지켜 남편의 말과 행동을 생각하고 50년 동안 수절생활을 하였으므로
마을이 다 그의 정절에 감동하여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풍헌의 보고와 서기1763년(영조39) 12월 정의현감 조세선趙世選의 첩보와
어사 이수봉李壽鳳의 장계와 대종백大宗伯의 포상제사褒賞題詞에 의하여 정표가 있고
三綱錄 향토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효자 강운康運은 그의 아들이다.
7대손 인성寅成의 도움으로 서기1971년 7월 낡은 정려를 고쳐 새로 정려각을 건립하였다.
오늘날로 그 효행을 밝히고 있으니 후세인들의 귀감이 아닐수 없다."
안내문에 기재된 강효자에 대한 설명을 옮겨 봅니다.
"강효자의 이름은 運이요, 본관은 신천이다. 입도조 강영의 11대손이며 아버지는 시한, 어머니는 여산 송씨 천향千香이다.
나이 7-8세 때 성품이 온순·영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기특히 여겼으며 효성과 형제우애가 특별하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잘 봉양하지 몫한 것을 후회하고 상례를 다하지 멋한 것을 한탄하다가
53세 때 좋은 묘자리를 구하고 아버지의 묘를 열어 체백을 바로잡고
관과 염습 등 장례제절을 초상과 다름없이 가례의대로 하여 안장한 뒤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을 추복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예법대로 모셨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드렸고
모친상을 당하자 통곡하는 모습이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장제례를 예법에 따라 극진히 하였다.
이런 효행이 면과 현의 첩보에 나타났고 서기1779년(정조3) 本州의 계청에 따라 다음해 정려의 특명이 있어
삼강록 향토지 강씨문헌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정의현감 송중현宋重鉉은 그의 늙은 몸으로 행한 아버지 3년 추복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높이 칭송하였다.
7대손 인성寅成의 도움으로 서기1971년 7월 낡은 정려를 고쳐 새로 정려각을 건립하였다.
오늘날도 그 효행을 밝히고 있으니 후세인들의 귀감이 아닐수없다."
1991. 12. 남제주군수.
효열각 안으로 들어갑니다.
모자의 비석입니다.
애향탑과 충혼비,순직비
아래에서 올라가는 길은 없습니다.
빙둘러 식당앞을 통해 가거나 절개지 경사면을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경사면으로 치고 올라갑니다.
애향탑은 1975년 1월 표선~성읍간 9km도로포장과 전기가설을 기념하는 비로
추진위원명단과 출연한 재일동포,그리고 당시 표선면장과 성읍리장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옆 두기의 비석
한기는 애국용사충혼비라고 하여 한국전쟁중 사망한 성읍리출신 젊은 넋을 위로하는 것이고
한기는 애향용사순직비라 하여
4·3때 무장대의 공격으로 사망한 마을인사들 46명의 원혼을 달래는 1961년에 세운 비석입니다만...
이제는 그 누구도 관심두는 이 없습니다
4·3진압과정에서 토벌군들의 비정상적인 잔학함은 당연히 지탄받아야 마땅 하지만
그 비정상적인 잔학함이 어쩌면 월평동비석, 꿩동산 비석, 조천 공동묘지비석등에서 나타난
4·3초기 소위 무장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당해 사망한 동료들에 대한 원한맺힘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지금은 슬그머니 없어져 가고 있는 무장대에 의한 경찰과 민간인사망자 들의 비석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충혼비 뒷면에서 잠시 눈을 감습니다.
지금 이나라의 모습이 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키려 했던 그나라일까를 샐각해 보았습니다.
결혼식의 신부가 들고 있는 부케를 연상 시키는 꽃, 수국입니다.
수국은 흙의 산성에 따라 꽃의 색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알칼리성이 높으면 핑크색이 되고 산성이 높으면 파란색이 된다고 하지만
한그루에서 여러색이 핍니다.
꽃색에 따라 꽃말도 다른데
흰색 수국 꽃말은 변덕, 변심
파란수국 꽃말은 냉정, 냉담, 거만
핑크수국 꽃말은 소녀의 꿈이라고 합니다.
산수국은 꽃이 피면서 질때까지 색이 변합니다.
연한 녹색에서 연한 보라색, 그리고 진한 보라색으로 되었다가 흰색으로 변하지요.
정의현성 남문입니다.
정의현청은 고성에서 이곳 진사리로 1422년 12월에 옮겨왔지만
성의 수축은 다음해 3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완공된 성의 주위가 2981척이요 높이가 13척이었다고 하는데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복원된 성의 크기는 높이 4m, 둘레 756m입니다.
남문밖 4기의 돌하르방입니다.
성읍리 돌하르방은 거의 원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고평오가옥을 만납니다.
건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여 제주의 마을, 마을홈피 내용을 옮깁니다.
"성읍 고평오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69호)
문화재청 자료 발췌
예전 정의(성읍) 고을 면사무소 관원들이 숙식하였던 곳이다.
조선 후기에 지었다고 하며
넓은 터에 안채(안거리), 바깥채(밖거리),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있는 모커리가 배치되어 있다.
현재 있는 모커리 맞은편에 모커리가 하나 더 있었는데 1970년대 중반에 헐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1979년에 수리한(안채, 바깥채)것으로 모커리 역시 일부 수리한 것이다.
건물들은 모두 바람에 지붕이 날리지 않도록 새끼줄로 그물처럼 덮어 놓았다.
문을 들어서 오른쪽 위편에 자리 잡은 안채는 3칸 규모로 가운데칸에 대청마루(상방)가 있다.
대청마루 왼쪽 앞뒤로는 각각 안방과 곡물을 두던 고팡이 있고 오른쪽에는 부엌(정지)을 놓았다.
부엌에는 불을 때는 화로(부섭)가 있었는데 1979년 수리할 때 없앴다고 한다.
안채 맞은편으로 있는 바깥채는 면사무소 관원들이 사용했던 곳으로,
대청마루를 가운데가 아닌 동쪽에 놓고 연이은 2칸방을 만들어 제주도의 일반적인 평면 구조와 다르게 꾸몄다.
모커리는 수레간과 통나무로 만든 제주 고유의 절구 ‘남방애’따위를 보관하는 헛간이나 외양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짜임새 있는 건물배치와 특수한 평면구성을 가진 바깥채,
제주 남부 일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대청의 쌍여닫이창(호령창) 등 때문에 좋은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원님물입니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해 성 밖에 있는 물을 쓰지 못할 때를 대비해 성을 쌓을때 만든 못입니다.
비상시에만 사용하느라 평소에는 사용을 통제하자 현감만 마시는 물이라는 투덜거림이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성의 기능이 없어지며 원님물도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거의 매몰되었던 것을 1996년 복원하였습니다.
돌로 주변을 편평하게 쌓고 물이 나는 곳에 사각형 우물을 만들어 물을 퍼 쓸수 있게 했지만
지금은 수질도 나빠져 볼거리로만 남아있습니다.
현성내 또다른 물통
물통이름이 없다고도 하고 구시물, 구유물이라고도 합니다.
허드레로 쓰던 물이라는데 지금이야 허드레용으로도 않쓰겠지만
예전에는 성내에 있는 물통이고 원님물은 못쓰는데 이 물을 허드렛물용도로만 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조일훈가옥입니다
제주의 마을 마을홈피 내용을 옮깁니다.
"성읍 조일훈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68호),
문화재청 자료 발췌
예전 정의(성읍) 고을 객사와 가깝게 있던 객주집이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넓은 터에 안채(안거리), 바깥채(밖거리), 창고, 대문간(이문간),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있는 모커리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들은 모두 바람에 지붕이 날리지 않도록 새끼줄로 그물처럼 덮어 놓았다.
집의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안채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3칸형식이다.
구성은 가운데 칸에 대청, 대청 왼쪽에 부엌(정지)과 작은방(작은구들)을 두었고,
오른쪽에 안방(큰구들)과 곡물을 보관해 두던 고팡을 꾸몄다.
안방과 대청 앞으로는 반칸 툇마루를 두었다.
문을 들어서 오른쪽 곁에 있는 바깥채는 작은방과 툇마루를 놓지 않았을 뿐 안채와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농기구와 마소에 물을 먹이던 돌구유, 객주집일 때 쓰던 돈궤를 보관하고 있어 농가와 객주로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창고가 있는 자리에는 가축을 이용해 곡식을 찧던 말방애가 있었는데 지금은 헐어버려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개인의 집 안에 이와 같은 기구를 설치했던 예는 제주도에서는 보기드문 일로 농가의 특징을 한층 높이고 있다.
성읍 마을 중심가에 있는 전형적 전통민가로 객주집, 농가 시설 일부를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마을 올레를 걷습니다.
성읍교회
성읍교회는 제주도에 이기풍 선교사가 세운 일곱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1908년 도내 첫 교회인 제주시 성내교회가 세워진 다음 해인 1909년에 성읍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교회시설은 1970년에 개축되었고
종탑옆 화단에 있던 초가교회의 주춧돌들은 지금의 교회 문앞에 모아두었습니다.
종탑은 교회 설립 때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제주 현무암을 거친다듬하여 정사각형 평면에 사각뿔대 모양으로 아랫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정사각기둥 모양으로 약 3M높이의 단을 쌓았습니다.
그 위에 철골을 세워 십자가를 세우고 종을 달았습니다
교회는 제주도에서 두번째 세워진 교회입니다만
이곳 성읍이 민간신앙의 뿌리가 넓고도 깊어 사역하기가 참 힘드는 것 같습니다.
신자수도 2~3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동문쪽으로 갑니다.
성읍 한봉일 가옥
안내판을 찍은 것으로 설명을 대체하려 했는데 안내판이 조금 간단한 듯 합니다.
제주의 마을 마을홈피 내용을 옮깁니다.
"성읍 한봉일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71호)
문화재청 자료 발췌
정의(성읍) 고을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들어서 있는 집이다.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문을 달지 않은 대문간, 안채(안거리), 바깥채(밖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 공간 양쪽으로 커다란 팽나무 두그루가 있으며 주변 울타리를 따라 수목들이 집의 경치를 한층 높이고 있다,
조금 낮은 터에 자리잡은 대문간은 3칸으로 입구 좌우에 헛간과 외양간(쉐막)이 있다.
문을 들어선 왼쪽에 안채가 있는데 한라산 산남 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정지)과 작은 방(작은 구들),
오른쪽에 안방(큰 구들)과 곡물을 쌓아두던 고팡이 각각 앞뒤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맞은편에 자리잡은 바깥채는 3칸 규모로 대청마루를 앞뒤가 긴 1칸으로 꾸미지 않고
뒤쪽에 작은방을 두어 특이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여유있는 공간구성과 주변으로 조화롭게 어울린 자연이 격을 더하고 있고,
전통 제주도 산남 민가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전통 가옥의 구조와 기능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동문터
동문터에는 옹성은 복원되었으나, 성문은 아직까지 복원하지 않았습니다.
동문앞 팽나무와 돌하르방
돌하르방에 대한 설명
돌하르방을 둘씩 둘씩 찍어봅니다.
끝부분에 튀어나와 있는 치성
조명윤처 효부김씨 정려비입니다.
전면에 贈嘉善大夫戶曹參判趙命允妻貞夫人金氏旌閭 光緖十七年辛卯八月十二日判下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남제주군의 문화유적 160쪽의 내용을 옮깁니다.
"효부 김씨는 조명윤趙命允의 처이다. 김씨는 본래 천성이 어질고 온화했으며 행실도 고결하였다.
혼인한 후 시부모님을 극진히 섬기고 남편을 존경하여 가정을 화목하게 하였다.
불행히 남편이 일찍 죽자 그녀 또한 따라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나이가 연로하여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으므로 마음을 고쳐 어려운 살림인데도 시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시아버지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대변을 맛보며 치료하고 병이 낫기를 하늘에 빌었으므로 온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이런 사실이 이웃에 알려져 조정에서는 고종 28년(1891)에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旌閭와 함께 효부비孝婦碑를 세웠다."
동담사이에 끼여있는게 불편해 보여도 어디 일렬로 줄세워 놓는곳보다는 나을듯합니다.
다시 성안으로 돌아갑니다.
옛날 같으면 성 동쪽으로 내가 흘러 식수를 구하기 쉬워 다른 곳에 비해 더 많은 민가가 있었을것 같은데
지금은 길에서 멀어서 그런지 빈집이 늘어갑니다.
민요체험을 한다는 집인데 안내판도 반이 잘려 있는 것을 보니 체험객이 없는 듯합니다.
객사로 왔습니다.
Brahms Quintet for Strings no 2 in G major, Op. 111
1. Allegro Non Troppo, Ma Con Brio
2. Adagio
3. Un Poco Allegretto
4. Vivace Ma Non Troppo Presto
Gérard Caussé, Viola Hagen String Quar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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