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현 객사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성읍국민학교가 들어서면서 교실과 운동장으로 쓰이던 자리에
1993년 12월부터 약 3개월 동안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분청사기 백자 기와류 등 발굴된 유물로 볼 때 이 지점에는 15세기 중엽부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1997년부터 11억원의 예산을 투입, 정의현 객사를 복원하였습니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 각 고을의 관청에서 여행하는 관리를 위한 숙소로 쓰인 건물로
조선시대에는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초하루·보름에 궁궐을 향하여 배례하였습니다.
전패는 '전殿'이란 글자가 쓰여진 나무패에 불과하지만,
이는 곧 '대전大殿 곧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였습니다.
중국황제를 상징하여 서울에 봉안되어 있었던 궐패闕牌를 모방하여 만들어
지방에 내려보내 왕권의 지배를 표방하던 표식의물입니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엄격하였습니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5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에 병합되며 수령은 파면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지방행정에도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어
1663년(현종 4)부터는 고을 혁파법이 폐지되고, 1671년(현종 12)에는 가족연좌법도 폐지되었으며
수령을 파면하는 규칙도 1796년(정조 20) 이후 완화되었습니다.
뒤로 들어왔으니 앞으로 나갑니다.
객사 안내문
갈옷 만드는 집
이 갈옷 만드는 집에서 나부끼는 나염된 천이 내마음도 나부끼게 하는데 오늘은 나부끼는 천이 없네요.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 161호 입니다.
고맙게도 벌채를 피하고 단 한그루의 느티나무로 남아있습니다.
그 나이가 1,000살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 앞에서 바라본 일관헌과 그 주변 팽나무
부근 7그루의 팽나무가 느티나무와 같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한그루가 2011년 무이파태풍때 이곳을 떠나갔습니다.
그 나무는 어쩌면 살아있는 것이 피곤하기도 했을겁니다.
4.3당시 토벌대와 무장대의 총격전 한 가운데서 온몸으로 총알을 받아내었던 나무지요.
그 오랜시간동안 그 아픔을 삭이며 서있다가
무이파 강한 바람이 몸을 흔들자 그래 이제는 가야지하며 몸을 눕힌것 같습니다.
그 때 쓰러지면서 일관헌을 때렸지요.
그 덕분에 일관헌이 제모습에 가깝게 복원될수 있습니다.
일관헌입니다.
아직 복원중이라 문이 잠겨있습니다.
안내문은 아직 바뀌지 않아
1975년 애매모호하게 복원한 일관헌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건물의 방향을 바꿔 새로 복원중인 건물에는 근민헌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방향을 바꾼 것은 탐라순력도에 동향으로 그려져 있으니 그에 충실했다는 것이고
편액을 바꾼것은 문헌자료 및 중앙문화재위원 등 관계전문가의 자문결과
건물의 명칭이 ‘근민헌(近民軒)’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편액을 당겨봅니다.
혼자 해보는 생각
근민헌이었다가 일관헌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조선중기까지 동헌 건물이름이 근민헌인 곳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기이후에 거의 이름이 바뀝니다.
김제동헌, 청주동헌 등이 한때는 동헌의 당호가 근민헌이었습니다.
근민헌이라는 당호는 '민가근불가하(民可近不可下)'에서 나온 것으로
백성을 친근히 하되 낮추어는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수령들에게 거슬리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동헌의 당호들이 바뀌는 것이지요,
김제동헌은 사칠헌으로, 청주동헌은 새로지으면서 청녕각으로 당호가 바뀝니다.
그래서 이곳 정의현의 동헌도 근민헌이었다가 일관헌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예전에 복원한 사람들이 아무 근거없이 일관헌이다하며
"일관日觀이라 한 것은 척자尺子에
『태산상유삼봉 동일일관 계명시견일출泰山上有三峰 東日日觀 鷄鳴時見日出』이라하여
『태산위에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그중 동쪽의 것을 일관이라 하며,
닭이 울 때 일출을 본다』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엣 시설을 복원을 한다면 어느 시점으로의 복원인가가 중요할텐데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때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변천과정을 통해 기능을 수행하다가
고유 기능이 사라지기 직전의 상태로의 복원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동안의 자연스러운 변화는 포용하고
동헌이 동헌으로서의 기능을 잃기직전시점으로 복원을 해야지요.
않그런가요?
멋진 모델인데...
포즈를 바꿔달라는 말을 못알아듣네요.
내가 자리를 바꾸어야지요.
북쪽 성벽 밖으로 나와 바라보는 풀밭과 가옥들
가옥들이 있는 곳이 지금은 평지이지만 예전에는 오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이 서낭당오름입니다.
성황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황신에 대한 제사는 조선시대의 각 주 현에서 일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행사로
수령이 직접 제를 행하기도 하고 예감을 정해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이원진 『탐라지』 정의현조 사묘조에는 성황단이 ‘정의현 북쪽 3리에 있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의현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묘를 제외한 공적제사는 1908년에 폐지됩니다.
정의현 북성 북쪽오름에 있던 성황단도 폐철이 됩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육지에서는 없어진 포제를 지금도 지내고 있는 제주의 유림에서
관에서 주관하던 성황제가 없어졌다고 그냥 보낼 성질이 아닙니다.
성읍1리 포제단 아래 제장을 만들어 이설합니다.
그러나 성황신은 각종 귀신중의 으뜸으로 향사받지 못하는 모든 신들을 관장하니
제사를 지낸다면 포신보다 상위의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장은 있으나 단을 설치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는 않습니다.
북성안으로 돌아옵니다.
옛 동헌옆 비석 두기
채수강청덕비蔡洙康淸德碑와 강우진불망비康祐鎭不忘碑입니다
채수강蔡洙康은 한말에 정의군수를 역임하였는데,
재직 5년 동안에 호적고戶籍庫를 마련하고 향사鄕社를 중신重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 1908년에 이 비가 세워졌습니다.
전면에 군수채공수강청덕비郡守蔡公洙康淸德碑,
오른쪽에 오년은만 적고기창五年恩滿 籍庫旣創, 왼쪽에 만호양춘 향사중신萬戶陽春 鄕社重新,
戊申三月 日 城邑이라 쓰여 있습니다.
강우진불망비 康祐鎭不忘碑
비석 전면에 정의군수강공우진불망비旌義郡守康公祐鎭不忘碑라 쓰여 있고
오른쪽에 비대변첩 존본지기備帶變牒 存本支器 , 왼
쪽에 적지불후 막포대비籍紙不朽 幕布大庇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래 해설판을 보니 변란을 대비하여 군수물자를 구입할 자금을 마련하였고
호적을 정리할 종이를 비축하였으며
천막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사용하게 하였다라고 하여 불망비를 세웠답니다.
변란에 대비하는 것과 호적을 정리하는 것이야 지방관의 기본아닙니까?
하다못해 마을 본향당신도 생산, 호적, 장적, 물고 등을 관장하는데
행정관서장이 기본을 했다고 불망비를 세웁니까?
웃고말지요...
게다가 이 강우진의 비석은 1893년(고종 30)에 성읍리에서 세웠던 것을
다시 남제주군에서 세운 것이랍니다.
그 당시 남제주군수가 康씨 였다니 한번 더 웃고말지요.
관청할망당
통상 안할망당이라고 합니다.
1971년도 이전에는 일관헌 옆 오래된 팽나무를 신목삼아 그 앞에 제단을 꾸몄고
주위에는 돌담 울타리를 둘렀으나
1971년 리사무소로 쓰는 일관헌을 증축함에 따라
바로 서쪽 돌담 너머로 슬레이트집을 짓고 이설하였다가
1991년도에 기와집으로 개축하였습니다.
당집 안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제단 중앙에 나무로 만든 신단神壇이 있고
그 좌우에는 암기와와 수키와가 있고 기와속에 쌀을 부어 놓았습니다.
신단을 열면 가운데에는 현해수호신지위縣海守護神之位라 쓰인 위패가 있다고 합니다.
왼쪽에는 구슬 목걸이가 걸려 있고 위패 밑에는 붉은 방석 위에 비녀가 한 개 놓여 있다고 합니다.
표선면 향토사에는 당안에 안할망신위라고 새긴 비석과 같은 위패도 있다하고
'李朝世宗五年 本晉舍村 旌義邑地設定 初代縣監 縣村護神 仰尊官民一致奉安
:이조 세종 5년 여기 진사촌에 旌義邑地를 설정하니 초대 현감이 현의 수호신으로 모시어 관민 일체 봉안하다.'
라고 쓰인 팻말이 놓여 있다."고 쓰여있으나
신단은 열어볼 염두가 않나서 모르겠고
안할망신위라고 쓴 위패와 세종5년 팻말은 당내부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당바깥 대리석에 잘 알아보기 힘들지만 잘보면 보이게 이 내용이쓰여있고
1991년 기와집으로 개축내용도 대리석에 이어 쓰여 있습니다.
현성을 이설할 때부터 당을 봉안했다면
이지역의 민간신앙이 엄청 강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관아에서 민간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되지요.
당올레를 걸어 당을 나가며 뒤돌아 봅니다.
성읍 이영숙가옥
안내판과 제주의 마을, 마을홈피 내용을 참고하세요.
"이영숙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0호)
문화재청 자료 발췌
예전 정의(성읍) 고을에서 여인숙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19세기초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정의향교와 이웃해 있다.
안채(안거리)와 헛간채를 둔 단촐한 구성의 집으로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여관집으로 불린다.
문을 들어서면 왼쪽 곁으로 헛간채, 그 앞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가 있다.
안채 뒤편에는 넓은 텃밭과 수목들이 우거져 집 주변과 안의 경치를 조화롭게 꾸미고 있다.
안채는 한라산 산남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3칸 집이다.
앞에서 볼 때 왼쪽부터 부엌, 대청, 안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엌 뒤쪽에 작은방, 안방 뒤쪽에 곡물을 쌓아 두던 고팡을 마련하였다.
대청마루와 안방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두었고 대청마루에 두 개의 쌍여닫이널문을 설치하였다.
그 중 오른쪽 문에 바깥사람과 잠깐 말을 나눌 때 사용하는 호령창을 만들었다.
부엌 앞에는 물동이를 넣는 바구니(물구덕)을 얹어두는 넓적한 ‘물팡’이 있다.
헛간채는 1칸으로 멍석이나 살림도구를 두던 곳이다.
안채 옆에 오래된 뒷간이 있고 집 입구에는 현대식 뒷간이 있어 좋은 대조가 된다.
여관으로서 특이한 가옥 형태는 찾아볼 수 없지만
평범하고 단촐한 옛 농가의 형태를 살피고 대문 없는 민가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가옥은 지정된 가옥이 아니지만 문위에 아취가 그럴듯 해서 한장찍었습니다.
정의향교
정의향교는 태종8년(1408) 홍로현에 건립되었던 것을
1416년 정의현청 소재지였던 성산읍 고성리에 옮겨 세웠으며
그 후 세종5년(1423) 정의현청 이설과 함께 정의현성 서문 밖으로 이전하고
영조14년(1738) 현감 나억령이 명륜당과 재실齋室을 세웠습니다.
순조9년(1809) 현감 여철영이 성 북편 으로 이축하였고
헌종15년(1849) 목사 장인식이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1911년에 성균관이 폐지되고
1913년에 1 군 1 향교제를 시행되면서 향교 문을 닫았다가
1932년 다시 문을 열었고, 1951년 중수되었습니다.
안내문을 참고하세요.
정의향교 대성전에는 전패가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경술국치로 순종이 퇴위한 후 전국의 객사에 있던 전패가 일제에 의해 거두어져 모두 매안되었으나
이곳 성읍에서는 유림들이 전패를 감추었습니다.
이 일에 가담했던 오방열, 김희윤, 김신나 등은 당시 경찰 주재소였던 일관헌으로 끌려갔습니다.
사건의 주모자로 전패를 감춘 곳을 아는 유일한 인물인 오방열(吳邦列)은
전패를 어디로 숨겼는 가를 이야기하지 않아
이때의 매질과 고문의 장독으로 이듬해 사망하였습니다.
이 때 도리어 오방열 유생은 주변인사들로 부터 나라가 없고 임금도 없는데
무슨 전패를 지킨다고 그 고생을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맞는 말이었지요.
우리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할때
한양도성에서 보관하던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를 역시 매안하였습니다.
이후 오흥태 의사의 묘가 헐리게 되자
이곳에서 전패와 이곳에 전패가 있게된 전말을 적은 나무판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당시 성읍에 객사가 아직 복원되지 않은 상태라 전패는 향교 대성전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깁니다.
위패를 어디에 둘것인가 때문이지요.
당연히 향교 대성전 주벽으로 공자가 모셔지는 것이고 그 좌우로 네 성인의 위패가 모셔집니다.
그럼 임금도 없는 나라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어디에 둘것이냐
이것으로 설왕설래가 있었다는데
그 답은 모르고 그냥 대성전에 전패가 있다는 것만 압니다.
그래서 정의현 전패는 해방이후 전국각지의 객사들을 복원하면서 만든 전패가 아니고
유일한 오리지날 전패입니다.
아 오리지날은 아니구나
1847년 3월 도적이 훔쳐간것을 다시 찾았으나 더렵혀졌다하여 그해 6월 다시 만든 것이니까
오리지날은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전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륜당 현판입니다.
현판 글씨가 잘쓴글씨인지 아닌지를 이야기할 공력이 나에게 없지만
명륜당편액을 항상 유심히 보는 이유는
현판 왼쪽에 숭정 8년(1635)에 동자童子 정상명鄭尙明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자라는 아호를 쓰는 정상명이 아니고 관례를 아직 행하지 않은 소년 정상명이 명륜당의 현판을 썼다는 건데
향교의 현판 글씨는 일대에서 가장 잘쓰는 사람에게 의뢰하는 것이 향촌의 불문율임에도 불구하고..
관례도 치르지 않은 어린이에게 쓰게한 그 연유는 알길이 없습니다.
창녕 영산면의 홍예교 옆에는 1780년에 세운 교비와 만년교萬年橋라 새긴 비석이 있는데,
이 글씨는 13세의 어린 소년이 썼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여기에는 뒤따르는 설화가 있습니다만
정의향교 명륜당글씨는 어떤 연유로 동자에 의해 쓰여졌는지에 대한 스토리가 없습니다.
향교를 돌아나오며 생각합니다.
국내 각 지역에 있는 향교는 230곳, 서원도 170곳이 넘는다고 합니다.
전부 국가 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정부 또는 지자체로 부터 국민의 세금을 통한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제향중심의 전통 때문에 항상 문을 닫아 걸고 자기들만의 천국이 되어 있습니다.
기껏 먼길 찾아가 봐야 건물만 보게 되는데
오리지널이 아닌 똑같이 복원된 건물이라 이동네 저동네 다 비슷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대중과 멀어지고
대중과 멀어진 공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 필요하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곳 정의 향교도 대성전앞 삼문은 항상 잠겨있으니
대성전안에 공자를 모시건 왕을 모시건 내알바 아니고
특히나 전패가 있고 없고의 이야기도 쓰다보니 허망합니다.
서문으로 갑니다.
이 성의 문루는 1980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동문과 서문은 초가지붕이었다고 하는데 기와로 재현했다고 말들이 있습니다만
조선말 읍성의 문들에서 초가는 없었습니다.
그럼 언제 초가에서 기와로 바뀌었는가를 규명해야 하는데 그 기록이 없습니다.
서문을 나섭니다.
왼쪽으로 돌하르방 두기가 서있습니다.
홀쭉한 하르방은 성격이 까탈스러운지 눈초리가 매섭습니다.
서문을 뒤돌아 봅니다.
내가 서있는 위치가 잘못되었는지 옹성이 항아리답지 않게 너무 사각형입니다.
그리고 대문이 너무 노출되어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 복원한 듯 합니다.
읍성 전체적으로 보아 복원된 성곽에는 여장도 없고 사대도 없고 치성만 형식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내부 민속 마을 문화재 지정가옥들도 육지업체인지 도내업체인지를 떠나
제주초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업체에 복원사업을 맡겨
도리어 제주초가의 원형과의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오른쪽에 있던 두명의 돌하르방이 무심하게 나를 봅니다.
서문앞에 있는 돌하르방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서문을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아무리 보아도 서문 옹성은 잘못 복원되었습니다.
서문앞 거리입니다.
명색이 관광지인데 인적이 너무 없습니다.
언제 그쳤는지 모르지만 내리던 비날씨 때문일까요?
남문쪽으로 돌아갑니다
남문루를 보니
남문앞 옹성과 하르방을 보고
남문과 서문을 그냥 똑같이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남산봉을 바라봅니다.
풍수적으로 천미천을 도강한 강룡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모지오름에서 영모루로 가는 맥에서 분기한 장자오름을 거쳐
그 기맥이 이어져 온다는 것입니다.
성읍 농협 뒤 둠부리물통으로 왔습니다.
둔덕을 이룬 지대라는 데서 둠부리라는 이름이 연유했습니다.
용천수는 아니지만 주변에서 물이 스며들어 물이 고입니다.
흙과 돌에서 자체여과가 되어서
상수도가 가설되기 전에 식수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깨끗했다고 합니다.
물통 3곳 모두 돌담이 정성스러이 쌓아져 있습니다.
세곳 모두 물통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돌계단의 방향을 보면 폐동되었다는 마을이 농협이 있는 반대방향에 있었습니다.
상수도가 가설된 후 방치한 사이 물이 상당히 더러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농협을 비롯한 각종 건물이 들어서서
돌과 흙에 의한 자연정수도 불가능하여 지금은 단지 볼거리로 수련을 심는다고 합니다.
깨끗한 물을 찾아 갈마못으로 왔습니다.
남산봉 북쪽에 있는 연못으로 풍수적으로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것과 같고
또 마소의 급수용으로 이용한다해서 갈마못이라고 합니다.
자연적으로 조성된 이 못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중앙의 작은 못에는 돌담이 원형으로 둘러져 있고 예전에 식수로 이용되었던 흔적인 물팡돌이 놓여 있습니다.
그 너머로는 농경지가 경작되고 있습니다.
문유당입니다.
제주시로 돌아가려고 바스매쪽으로 나가는데 문유당 숲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숲으로 다가가 보면 빙둘러서 돌담이 쌓여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관청할망의 막내동생이 좌정해 있으면서 치병을 담당합니다.
지전과 물색은 보기 어렵지만 당 바닥에 귀신방쉬로 깨뜨리고 간 종기의 파편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당에 가서 빌고 난 후 돌아갈 때는 가지고 왔던 그릇을 깨고 가는 귀신방쉬를
아이들이 그릇 깨는 버릇을 없에기 위해서 한다고 누군가 말을 만들었고
그것이 그럴듯한지 그렇게 퍼져가는데 ...
그게 아니고...
귀신방쉬는 집에서 가져온 그릇을 깨어 먹을 것에 붙어온 삿된 것들을 이곳 귀신에게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집의 어린이가 피부병이 있을때는 꼭 그릇를 깨고 가는 귀신방쉬를 합니다.
문유당에서 바스매로 올라오니 표선으로 가는 우회도로를 만나게 됩니다.
표선쪽으로 방향을 돌렸지요.
넙은못을 가서 넙은못 징검다리를 걷고 넙은궤를 가려고 했는데
우회도로가 생긴 후 진입로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부근을 헤메다...
모지오름과 장자오름 사이에 있는 큰 물통이 예전에 꽤 운치있었다 생각하고 그 물통을 찾아갑니다.
가시리방향 큰길 해양경찰 휴양소앞을 지나고 다음...다음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야 하는데
아 지나쳤습니다.
그냥 100미터쯤 더가서 좌측으로 핸들을 돌립니다.
시멘트포장 농로를 내려갑니다.
이 농로가 성읍리와 가시리의 경계입니다.
갑선이 오름, 매미 애벌래 머리가 보이는 농로 서쪽 가시리지경 남산물입니다.
왜 물통이름이 남산물인지 알수는 없습니다만...
주변 풍광이 아주 아름다웠던 곳인데...
예전만 못하지만 이정도면 차를 달려온 보람이 있습니다.
지는해의 반영을 보며 멍하니 있다가....
돌아갑니다...
Ferdinando Caru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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