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
충재 권벌의 후예들이 모여사는 마을을 갑니다.
석천계곡앞에 차가 섭니다.
택리지의 이중환은
충재 권벌이 관직에서 물러나 앉아 정착한 달실마을을 우리나라 4대길지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그 달실마을로 들어가는 옛길이 이 석천계곡을 지나는 길입니다.
내성천을 거슬러 석천계곡을 따라 올라갑니다.
현판없는 정자를 지나니
한켠으로 봉화건국운동기념비가 서있습니다.
볼때마다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래쪽 설명문에 의하면
좌익에 대항하여 건국운동을 한 애국인사들을 기리는 내용으로
1987년 광복절에 봉화문화원에서 세운것인데
왜 이 계곡안에 서있는지...
구체적으로 누구를 기리는 것인지...
그리고 1987년에 이 비석을 세우게된 동기는 무엇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계곡옆 길을 걷습니다
선경이라 길지인지, 길지라 선경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기분이 참 편안해지는 길입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청하동천이라고 암벽에 각을 한 글씨가 보입니다.
나라 곳곳에 동천이 많기도 많습니다.
언듯 생각나는 것만 해도
강화에 함허동천, 하동에 화개동천, 자하문터널 남쪽에 백운동천, 부안에 봉래동천....
삶이 너무 힘들다 보니 이상향에 대한 희구가 너무나 강렬하였던 것이지요.
이 계곡에서 유일한 경사를 오르면 석천정사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권벌의 맏아들인 권동보가 지었다고 합니다.
기묘사화 때 파직당해 그 모친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내려와 거주하시던 아버지 권벌이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삭주로 귀양가 1년 만에 사망하자,
권동보는 관직을 버리고 20년간을 이곳에서 두문불출하였습니다.
선조 때 아버지가 복권되고 본인도 복관되어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흔적이 있는 이 계곡 위에 석천정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석천정사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수 읊었습니다.
肩輿溪上路 書舍水雲間
작은 가마 지나가는 시냇가의 길에서 책읽는곳이 물과 구름 사이로 보이네
風雨三秋夜 煙霜十月寒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을밤이여, 무서리 몹시 내린 차가운 시월 일세
葉稠巖竇密 苔厚石稜斑
잎은 떨어져 바윗틈에 빽빽하고 이끼 두텁게 끼어 바위에 덮혀있네
百歲徜洋地 親朋幾往還
백세토록 거니시던 이곳에 친한 벗들 얼마나 오갔던고...
당연히 내 번역은 아닌데 번역자를 모릅니다.
이런저런 번역 중 가장 나은 번역이라 느껴서
한자변환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시 한수를 실었습니다.
그렇죠.
같은 한시를 번역하는데
어떤이는 그럴듯하게, 어떤이는 한심스럽게 옮겨놓습니다.
석천정사는 계곡의 암반 위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한옥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유숙하면서 공부를 하고 강론을 하던 곳이라 정사라 하였고
그에 걸맞게 정자 이외에도 부속 건물이 많습니다.
건물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흘러가고
건물들의 뒤로는 소나무 우거진 능선이 자리잡고 있어,
건물과 숲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석천정사문은 당연히 잠겨 있습니다.
사전에 마을에 한과체험신청을 하면 한과체험전에 이곳을 안내해줍니다.
그때와서 들어가보게 되면 건물뒤에 석천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바위에 석천정이라고 새겨져 있고
춘향목으로 지은 누정 안쪽으로 석천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오늘은 아쉬움 남기고 그냥 지나 가시지요.
관리사앞에서 다시 한번 뒤돌아보고...
커브길을 돕니다.
석천정사를 지나 마을로 가는 길에 세개의 시비가 있는데 두개만 찍었습니다.
마지막 시비가 퇴계의 작품입니다.
커브를 돌며 오던 길 뒤돌아보고
다시 앞을 보니 닥실마을이 펼쳐집니다.
뒤의 산이 마을을 보듬고 있고 그 앞에 평지가 펼쳐지고 그 앞또는 옆으로 물이 흐르고...
전형적인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부분의 잘사는 마을의 형태는 이렇습니다.
그 마을에서 누가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금계가 포란했느냐 아니면 잡계가 포란했느냐가 구분되는 것이지요.
사실 풍수는 뒷날을 위한 오늘의 방비인데
돌파리들이 득세하여 결과를 놓고 이러고 저러고를 이야기합니다.
금계포란은 저에게 큰 의미가 없으니 바로 청암정으로 갑니다.
청암정은 권벌이 이 마을에 들어와 거주할 집을 지으면서 책읽을 서재에 이어 지은 정자입니다.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주변에 못을 파고 냇물을 끌어 들여 못물을 채워 놓았으며,
장대석을 걸쳐 놓아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넘어 갈 수 있도록 조성하였습니다.
바위 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았다고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건 지금의 눈이고
그 당시에는 바위면을 평평하게 할 기술도 없고
네귀퉁이 기둥을 조절하는 것이 더 편한 공법이었지요.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온돌 구들이 아니고 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청암정을 이 바위 위에 지을 때,
이 방은 온돌방으로 꾸며졌으며,
바위 둘레에는 연못도 없었다고 합니다.
집을 짓고 난 후 온돌방에 불을 지폈는데,
바위에서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고 하지요.
이러한 현상을 괴이하게 느껴오던 차에
지나가던 스님 왈,
정자의 방에다가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아궁이를 막은 다음 주변의 흙을 파내고 물을 담아
청암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가 살기 좋은 지세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자 내에는 ‘청암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고 미수 허목이 전서체로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빙둘러서 제영시와 차운시편들이 걸려있지요.
충재박물관을 잠시 둘러봅니다.
문을열고 들어서니 충재선생이 영남루를 노래한 시가 눈앞에 바로 들어오네요.
....다함이 없는 긴 강은 평평하기가 비단같고 너른 들녁의 운무는 연기와 같다....
문득 떠오른 딴 생각
밀양영남루 현판은 당시 밀양부사의 둘째아들인 7세아이가 쓴거라는데
그 아이는 자라서 뭐가 되었더라...
기억이 않나요.
박물관을 주마간산으로나마 둘러봅니다.
한참 이 앞에 서있었습니다.
선생이 과거 시험보았을때 써낸 답안지중 한장입니다.
이래서 이런저런 폐단속에서도 조선왕조가 500년을 굴러간 겁니다.
아무나 관직을 주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통해서인데
그 답안을 공개함으로써 과연 적합한 인물을선출했느냐는 것을 역사에 묻습니다.
박물관벽에서 본 청암정 사진에는 거북이머리가 있는데
내사진에는 없어요
아니 있는데 물이 없으니 구분이 않되요.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어라 네목을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빙 둘러가며 청암정을 찍고 또 찍습니다.
180도를 돌고 종가집을 찍어봅니다.
그랄듯한 골목앞에서 안쪽까지 걸어가 볼까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막판에 일행을 놓치면 버스를 놓치니...패쓰!!
명승 60호로 지정된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을 떠납니다.
바흐 /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c단조 글렌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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