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는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괘방산(掛榜山)에 자리한 사찰로,
7세기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가 침범하여 변방을 어지럽히는 것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창건 당시 이름은 수다사(水多寺)였고
신라 말기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고려 초기에 중창하여 이름을 등명사(燈明寺)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조선 중기에 다시 폐사(廢寺)되었습니다.
일설에 의햐면 한양에서 정동에 위치한 등명의 불을 끄면 불교가 망한다는 생각으로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서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설에는 임금의 눈에 안질이 생겨서 점술가에게 물어보니
정동에 있는 큰 절에서 쌀 씻은 뜨물이 너무 많이 흘러 용왕의 눈을 거북하게 하여
용왕이 노하여서 안질을 앓게 되었다고 하자
왕명으로 사찰을 폐사시켰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구전은 통상 민초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으로
조선중기 이후 평지에 있던 절들이 거의 폐사되고
깊은산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만들어졌지요.
지금의 등명락가사는
1956년에 조그마한 절을 지은 경덕 스님이
1천일 관음기도 끝에 해수관세음보살(海水觀世音菩薩)을 친견하고 침술을 점지 받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어 영험을 보였다고 합니다.
소문을 듣고 차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스님은 절을 증축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해서 현재의 가람양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사찰을 중창한 경덕스님이 1천일 관음기도 끝에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이곳은 관세음보살이 계신 보타락가산이라 하여 낙가사로 사찰명을 정하고
옛 사찰명인 ‘등명’을 앞에 붙여 등명낙가사라 명명하였습니다.
1977년에 인간문화재 유근형씨가 심혈을 기울여 빚은 청자 오백나한을 모신 영산전을 본당으로
사물인 범종, 법고, 운판, 목어가 있는 범종루,
산신, 칠성, 독성, 용왕 탱화를 모신 삼성각,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오층석탑이 있습니다.
오층석탑은 선덕여왕 때 창건과 함께 세워졌다고 전해지나
양식상으로 고려 초기의 탑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또한 수중사리 탑이 바다에 모셔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절집으로 들어갑니다.
등명낙가사의 일주문은 2006년에낙성한 것으로
다른 사찰의 일주문과는 달리 대리석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천장에 용을 새겨 놓았습니다.
여의주를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느껴집니다.
일주문 한가운데 돌기둥이 서있고 그 돌기둥에는 '대한민국정동'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침반이 정동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유명한 약수터가 있습니다.
약수터 사진을 많이 찍으면 약수의 기운을 받을까 싶어서 몇장 찍어봅니다.
세 번 만지고 가면 큰 복을 주는 포대화상앞을 지나갑니다.
만월보전과 오층석탑
만월보전앞에는 5층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원래 자장 율사는 똑같은 석탑을 세 개 세웠다고 합니다.
그 한 기가 만월보전 앞에 세워졌고,
또 하나는 지금의 약수터 옆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절이 바라보는 동해안에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모 방송국에서 5일 동안 수중탐색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만월보전 앞에 서 있는 오층석탑은
구전에 의하면 창건 당시인 선덕여왕 때 세워진 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양식상으로 보면 고려시대 초기의 탑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양식을 보면, 2단으로 된 지대석 위에 연꽃잎을 조각한 사각형의 복련석을 덮고,
그 위에 아무런 조각이 없는 네모난 돌을 올려놓았으며,
그 위에 다시 사각형의 앙련석을 올려놓았습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석탑 기단부는 신라시대 말과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형식으로,
탑의 기단부가 불상의 대좌와 같은 것임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어 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석탑 앞에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 배례석이 있습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석탑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재라고 합니다
만월보전(滿月寶殿)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1995년에 지어진 전각으로,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정동(正東)은 약사여래의 도량으로, 만월보전은 곧 이 약사여래르 모신 전각입니다.
안에는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 일광·월광 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만월보전에서 나와 석탑을 건너 바다를 봅니다.
요사채옆으로 달마도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곳이 있습니다.
필요한 분에게는 요긴할 듯합니다
구경만 해도 기가 오겠지요.
열심히 눈공양합니다.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경전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극락정토가 있다고 합니다.
극락이라는 이름은 글자 그대로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며,
안양(安養)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미타불은 성불 전에는 본래 한 나라 임금의 자리를 마다하고 출가한 법장(法藏) 비구로서,
부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모든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48대원을 세워 아미타불이 된 분입니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光明無量),
그 수명이 한량없어 백천억겁으로도 셀 수 없다(壽命無量)고 합니다.
따라서 아미타부처를 모신 곳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합니다.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과 관음보살·, 대세지 보살,
그리고 극락회상도와 신중탱이 모셔져 있습니다.
영산전입니다.
등명낙가사의 금당인 영산전(靈山殿)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오백나한을 모신 영산전을 건립하게 된 것은
신라시대 이래 강원도 땅에 전승되어 오던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이 금강산으로부터 부처의 진신사리를 오대산으로 옮겨오게 되었을 때
오백나한들은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함께 배를 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리고 오대산에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다음,
문수 보살은 강릉 한송사(寒松寺)를 창건하여 머물렀고,
보현 보살은 명주 보현사(普賢寺)를,
오백나한은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현재 영산전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불과 제화가라보살 · 미륵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그 주위에 청동 석가여래 입상과 관음보살·지장보살 입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의 불단 좌우로 모습이 서로 다른 청자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단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천수관음탱과 감로탱을,
왼쪽에는 금칠을 한 신중탱과 대장경을 모셔놓았습니다.
영산전에서 나와 바다를 봅니다
범종각
그리고 삼성각입니다.
포대화상앞으로 돌아옵니다.
눈에 덮혀서 눈이 않보이시니 내가 왔다 갔는지 모르시겠네요.
추운날씨에 하루종일 배 내밀고 계시니 감기 조심하세요.
Dmitry Shostakovich
The Gadfly, suite from the film score, Op. 97a
(assembled by Atovmyan) Romance
James Galway, Fl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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