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제주도 광령리의 삶의 흔적, 그리고 선사의 흔적 지석묘와 암각화

하늘타리. 2013. 9. 25. 22:28

9. 15

광령리의 몇곳을 다녀왔습니다.


문화유산답사회 9월 정기답사로

광령리에 위치한 지석묘에 중점을 두어 삶의 흔적은 몇군데 스치듯 지나갔습니다.

 

습관적으로 사진은 찍었습니다만...

예전에 찍은 것 또 찍어 특별히 제시할 만한 것이 없어 어느 폴더 한 구석에 넣어 두었다가...

그러다 잊혀질까 싶어 서랍속에서 꺼내어 안내자가 인솔한 그 날의 동선 그대로 정리 겸 포스팅을 합니다.

 

진대석효자비입니다.

1600년대에 광령리 지경에 두개의 효자문이 있었는데

동네가 황폐해 지면서 효자문이 없어졌습니다.
1924년 3월에 진옹 이응호가 이 부근을 지나다가

그 중 한명 진대석의 행적을 듣고 효자문이 없어진 것이 아쉬어

효자진대석이라고 바위에 刻을 해두고 갔습니다.

 

바위가 있던 곳으로 도로를 확장하게 되자 현재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 이 암석이라고 합니다. 

 

 

 

 관광대학 후문을 나서서 이싱굴 하르방당으로 갑니다.

 

이 당은 한라산 산신계당으로 예전에는 가축 특히 돼지를 잘 기르게 해준다하여 당궐이 꽤 많았습니다만

언젠가 마을포제를 이곳에서 지낸 이후 당신을 찾던 이들의 발걸음이 끊겼습니다.

 

 지금은 제장내에 잡초가 가득하여 제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덮고 있습니다.

 

제주 상사화

 만나지 못한다고
너무 애태우지 말게나

그리움을 묵혀 두면
푸른 잎으로 돋아 오르지 않더냐
외로움도 오래 묵히면
노랗게 물드는 꽃이 되지 않더냐

잎 지고 꽃이 피던,
꽃 지고 잎을 틔우던,
손가락질하지 말게나
...


떨어져 있어도
헤어진 게 아닌데
미움이야 있겠느냐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조바심으로 속끓이지 말게나

해후할 수 없는 이별도
사랑의 한 방법일 뿐이니라


김승기시인의 노랑상사화를 옮겼습니다.

 

 밭 두어개 너머에 있는 이싱굴 할망당으로 갑니다.

직선으로는 가는 길이 없어 빙둘러 나가 감귤밭안으로 낸 길을 따라 갑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부근에 있는 하르방당과 부부신이 아닐까 하던데...
그렇지 않고요


이 당은 광령1리 본향인 자운당에서 모시는 송씨아미와 송씨도령을

이싱굴마을 사람들이 가지갈라와 모시는 당입니다.

 

 

 

이싱굴/이승굴은 광령2리를 지칭하는 이름이고 한자로는 有信洞, 有信村이라고 씁니다.
고려시대에 지금보다 더 위쪽인  비신의굴과 산이굴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이싱이물(지금의 거욱대물)일대로 옮겨살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합니다.


18세기중엽에는 지금의 광령1리인 광영이마을, 사라마을, 남죽이마을을 동광리라 하고

지금의 광령 2리인 이싱이굴마을과 광령3리인 자종이/조중이마을을 서광리라 하였습니다만

1950년대 중반에 광령1리, 2리, 3리로 마을이 분리되었습니다.


마을이 분리될때 광영이마을 당동산에 모셔지던 송씨아미와 도령을

이싱이굴할망당과 조중굴할망당으로 가지갈라왔습니다.

 

묘련사지로 추정되는곳으로 왔습니다.

잘못온것 같은 생경함이 밀려듭니다.


대각사라고 이름하던 법당은 폐가가 되어 있고

몇년전 당시 스님이 직접 지으셨다는 목재건물인 산신각도 흔적도 없고

그 많던 뽕나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닥에 내쳐진 종을 발견하고서야 아 여기가 맞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무엇이 맞은 걸까요?

 묘련사지가 맞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도 아닐수도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불우조에 재서이십오리라고 되어 있지만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재서남이십리라고 하여 저마다 다른 곳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단지 마을사람들의 구전에 이곳에 고려시대 중기경에 창건되었다가

인근에 삼별초가 들어와 항쟁하던 시기에 불에 타 없어진 절이 있다고 하였고

인근에 꽤 오래된 듯한 기와가 널려 있었기 때문에

여기가 묘련사가 있던 곳이구나라고 추정 하는 것이지요.

 

묘련사가 어디에 있었느냐가 중요해진것은

2006년에 전남대 문화재학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당시 서귀포시청 공무원이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

1938년에 조선고적연구회가 조사.편집한 '순천송광사장고려판천순판불전(順天松廣寺藏高麗板天順板佛典)'에 수록된 사진을

보게 된 이후입니다.
천태종 대표 불경 중 하나인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를 목판에 새긴 것을 찍은 이 사진에서

금광명경문구 3권 가운데 하(下)권 중 마지막 장 간기(刊記)에 '금광명경문구소 권하 원정이년병신세

고려국제주묘련사봉선중조 간선폭포사주지선사 안립

(金光明經文句疏 卷下 元貞二年丙申歲高麗國濟州妙蓮社奉宣重彫 幹善瀑布寺住持禪師 安立)'이라는 내용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당시 이 공무원의 소속관청인 제주도서귀포시에서는

이 목판본 금광명경문구가 1296년(고려 충렬왕 22년) 고려국 제주 묘련사에서 판각(重彫)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지요.
그 때 관련 학계에 잠깐 파랑이 일었으나 후속보도는 없습니다.
후속연구나 보도가 없을수 밖애 없는 것이

1296년이라면 당시 제주는 원(元)의 지배하에 있을때 였고

설령 불력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판각을 했다면 그런 기술력에 대한 어떤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시 개경에 있던 제국대장공주의  원찰이기도 한 묘련사가

1280년대 후반부터 백년결사의 중심체로 떠올라 각종 경전의 판각작업을 도맡아 했다는 역사적사실과 관계되어 해석이 달리 되어

지금은 제주 묘련사에서의 판각이야기는 이곳 제주에서나 간간히 들을수 있습니다.

고려말 인근 서천암지에서 생활했다고 하는...

일설에는 산방굴사를 창건했다고 하는 혜일스님의 시 중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불우조에 소개된 묘련사에 관한 시를 옮겨 봅니다.


"南荒天氣喜頻陰 남쪽 하늘은 황량하여 자주 흐려지던데
此夕新晴洗客心 이 저녁엔 맑게 개어 나그네 마음을 씻어주네.
一夢人生榮與悴 꿈같은 인생은 피었다가도 곧 시들고 말지만
中秋月色古猶今 한가위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逈臨渺渺烟汀闊 멀리 아득하기만 한 이곳에 다다르니 안개 낀 물가 참으로 넓고
斜影竹屋深 비스듬히 기운 그림자에 잠긴 대 집은 어둡기만 하구나.
賞到夜闊淸入思 밤이 깊도록 노니니 생각은 더욱 맑아져
不禁頭側動微吟 머리 기울일 때마다 가만가만 시가 흐르는 걸 막을 수가 없도다.'

 

'이곳에 다다르니 안개 낀 물가 참으로 넓고...' 라는 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묘련사 옛자리가 지금 이자리는 아닌가 보네요.

 

불가로 들어간 아들
10년간 그 아들을 찾아나선 어머니가 그를 다시 세상으로 데리고 나와 결혼을 시킵니다.
그 아들은 후손을 낳더니 다시 산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그 아들을 찾아나선 어머니
그 어머니도 결국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 스님이 차린 절집에 아들스님이 찾아와 주재하던 절집 대각사.
그 대각사도 없어진 빈터...


다시한번 풀밭에 덩그러니 놓여진 종을 봅니다. 

 

한때는 인근의 농업용수를 대던 곳...

  

지금은 물이 바짝 마른 구릉커리 못을 지나 갑니다.

 

 

광령2리 주민회관 앞으로 왔습니다.

 

회관 뒤쪽 거욱대물을 보러왔지요 

 

마을을 지켜주는 거욱대가 주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의 이름도 거욱대물이었습니다.
유식이 탈이 되어 거욱을 한자로 써야겠는데... 가장 근사치를 같다 붙입니다.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하여 없엔다, 제거한다 할때의 去자를 쓰고 악할 惡자를씁니다.
거악대가되었습니다.

대자를 터垈자를 썼으니 터만 남겨둡니다.
그래서 거욱대없는 거악대의 물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매몰하지 않는한 맑건 흐리건 물은 흐릅니다.
그렇지만 주변 밭에 하도 약을 뿌리니 그 약이 이물로 다시 떠오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음용불가

 

 

 

 

인근에 효자 고찬원의 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진대석과 스토리는 같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하지요.
진대석은 인조 12년, 고찬원은 숙종 32년에 정려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곳 광령2리에서는 매고할망의 전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남편의 원수를 갚기위해 현남편을 죽게 하고

현남편과의 사이에서 나은 아들을 모두 내친 후 스스로 무덤속으로 들어간 한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광령1리에서는 분투굴에 있었다는 소현세자의 세아들 중 둘째 아들 석린의 무덤이야기를 들을수 있었지요.


광령3리에서는 의로운 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옛 이야기가 풀풀 흘러나오던 마을이었는데 지금의 주민들은 아예 이 고장의 스토리를 모릅니다.

 

광령3리 조중굴당입니다.

 

이곳도 광령1리 자운당에서 가지갈라온 송씨아미와 송씨도령 두오누이를 모시는 당입니다.


애조로 공사를 하면서 애조로 주변 실개천 정비 및 확장공사를 했습니다.
그 때 산 기슭을 아주 많이 긁어내어 제장 앞부분이 깍여 누군가 돌계단을 놓았습니다.

 

 


신목이 남아있고 신목에 낡은 지전과 물색이 있습니다만

그 앞에서 비념을 할 공간이 없어졌습니다.

 

 

 광령 3리에 당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산새미오름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마씨 미륵당입니다.

그당은 원래 목축을 위한 비념을 하던 당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득남을 비는 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당에 매인 심방 마종기는 회천의 화천사의 전신으로 절집을 새웠다가

다시 심방으로 돌아와서 목축인을 위하다가

그 당에서 죽어 그 당의 당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라산 정상 부근 어딘가를 오르시다보면 마종기기도터를 만나실수 있습니다.

 

큰자종이물입니다.

 

 이곳 광령 3리를 자종동이라고도 합니다.
고려 공민왕 10년경 송자종이란 사람이 육지로부터 입주하여 설촌했다고 전하며

그에 따라 리명도 '자종'으로 굳어진 듯합니다.

 

이 마을에는 큰자종이물·샛자종이물·말젯자종이물 등 3개의 샘이 있어

식수가 풍족하고 농토가 광활하여 농경생활에 적합했던 지역입니다.


조선 태종시대에 송씨 몰락으로 폐동되었다가

그 후 조선말엽(고종)에 강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부활된 마을입니다만

4.3때 또 한번 폐동되었다가

1949년 광령1·2리, 고성, 하귀1리 광동 주민들이 자종동에 모여 집단재건하므로써 큰 부락이 형성되어

초등학교 및 경찰관 파견소를 설치 운영하게 됩니다.


그 후 1951년 광령 1·2리, 고성리 주민이 복귀하고

이마을에는 자종동, 장전동, 하귀 광동 출신 주민이 영주하면서

1956년 광령 3리로 분리되었습니다.

 

이 큰 자종이물은 수질이 양호하고 용출량이 많아 자종동주민이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합니다,

 

 

  

 

샛 자종이물입니다

 

용천수 역시 생활용수로 적합하여 예전에는 하귀 1리 광동(廣洞) 주민이 사용했다 합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아 중간에 개수한 이의 비석이 뻘쭘하니 서 있습니다.

  말젯자종이물은 마을 서북방에 위치해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매몰되었습니다.

 

광령저수지까지 내려왔습니다.

 애월에서 조천까지 연결하겠다고 뚫어놓은 애조로변에 위치해 있는데

배한이 저수지라고도 부릅니다.

일제 강점기간에 일본인이 착공하여 소규모 저수지를 만들어 주변 들의 작물들을 경작했는데

1950년 이후 수리조합에서 관리 2·3차 보수하고

어승생수원을 주입 저수하여 배한이 들을 확장하여 벼를 경작했었다 합니다.


그 당시에는 도내 중산간 마을에서는 유래없이 연간 2천석이상의 쌀을 생산해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낚시외 어느용도로 사용되는지는 모르지만

기록에 의하면 면적은 2만3000㎡이며 저수량이 최대 5만1000t으로 제주도에서 세번째 크기라 합니다.

 

저수지 북쪽에는 약 130m가량의 둑이 있습니다.

저수지 동남쪽으로 가면 남죽이 마을이지요
토기를 만들던 흔적과 그 흙을 파던 흔적이 모두 사라졌습니다만

30년전까지는 배한이의 굴흙을 파다가 토기를 만들고 그것을 주업으로 삼았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광령1리 주민회관 주변으로 왔습니다. 

 

광령리 다운타운에 위치한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그 식당앞 조형물을 한장 꾹!

 

광령이라는 마을이름은 1653년(효종) 목사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 과원조에서

光靈이라고 표기되어 처음 나옵니다.
그뒤  1725년(영조)에 받은 고씨가문 교지에 의하면 光映으로 표기되었고...
그뒤 光令으로 이름으로 나오는데.. 

즉 광령 또는 광영이라고 들리는 음가의 제주어 이거나

빛광의 훈에 해당되는 어떤 제주어가 마을 이름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光靈, 光映, 光令마을으로 하다가
光令里가 되었을 것입니다만

동네 문장 말씀하시길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아 산주수청하니 光(광)이요,

민속이 밝고 선량하니 令(령)이라 했다고 합니다.

 

보건지소옆을 지나 순두물동산으로 갑니다. 

 

동산이 원만하여 순하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소공원이 조성되어 각종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하단에는 못(순두물)이 있습니다.

 

이 못은 과거에는 중요한 식수원으로 이용됐으나 샘이 말라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몇년전 재정비를 통해 현재의 규모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자라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군요. 

 

 

 

 

마을 남동쪽으로 보이는 한라산을 봅니다. 

 

바라보이는 저곳이 아마 다 광령리지경일겁니다.


한라산 백록담 북벽에서 서쪽으로 병풍바위를 따라가고  1100도로를 건너

삼형제 샛오름에 이르러 다시 붉은 오름과 노로오름 사이를 지나

고성리 양잠단지를 거쳐 광령저수지 아래까지 내려오는 그 안쪽과...

북벽에서 북으로 어리목골짜기를 지나 외도까지 흐른 무수천 그 서쪽이 모두 광령리입니다.


여기서 위로가면 칠성동산과 하잣성이 있고

그너머 양돈단지 위에는 애월읍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고

 그리고 그 위로 가면 고래소와 진달래소 그리고 마씨미륵당.

산록도로를 지나면 산새미오름.

산새미오름 기슭에 김수못과 방형묘가 있고

그 김수를 죽인 삼별초가 패주하며 흘린 피로 흙을 붉게 물들인 붉은 오름이 있습니다.


이 붉은 오름으로는 훗날 목호의 패주병들도 간과 뇌를 땅에 뿌리며 절며절며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슬렁, 어슬렁을 넘어 한라산 북벽까지가 모두 광령리 지경입니다. 

 

이원조의 탐라지에 기록되어 있는 광령과원이 있던 곳을 찾아갑니다.

 

올레를 지나니 보호수

 

 

 

그리고 전형적인 재건주택

 

재건주택을 지나 

 

1973년에 제주도 기념물 제 26호로 지정된 수령 250년 이상의 동정귤이 있는 곳입니다.

 

기념물에 대한 공식 설명을 옮깁니다.


"이 나무는 제주 재래귤의 일종이며,

과거 기록에 나와 있는 본도산 재래귤 중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희귀한 식물로

학술적인 연구와 보존 가치가 높아 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귤나무는 높이가 6m이고, 뿌리 근처에서 세 가지로 나누어졌으며, 둘

레는 각각 0.9m, 1.5m, 1.3m이고, 최대 수관폭은 8m이다.

이 나무는 현지 마을주민들에 의해 '돈진귤' 또는 '진귤'이라 불리고 있는데,

과실의 특징이나 나무의 식물학적 조사 결과에 의해 고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동정귤(洞庭橘)'로 밝혀졌으며,

제주도에서 현재까지는 유일하게 확인된 것이다.
나무의 수령은 250여년으로 추측되며, 본래의 수형은 개장성(開張性)이었으나

1949년 4.3사건 당시 북쪽의 가지가 불에 타서 고사하여 버렸고, 지금은 남쪽으로만 가지가 뻗어 있다.

결실량이 많아서 고목이 된 지금도 매년 100kg 이상을 수확하고 있으며,

과실의 향기와 맛이 독특하여 지난날 귤류의 공물 중에서도 상위에 속했음을 짐작케 한다.
과실 하나의 크기는 50∼80g 정도로 현재 재배되고 있는 온주 밀감보다 약간 작으며,

과피는 다소 거칠고 산미와 향기가 다소 강하다.

현재 나무의 크기는 키 6m, 수관은 남쪽으로 편중되어

6m정도 뻗어 있다."

  

  

 

 

 

  

 

다시 자라들의 놀이터를 지나 향림사로 갑니다.

 

 

향림사는 87년도에 창건된 절입니다

 

 

 

 

이절 입구에 절물(寺水)이란 샘이 솓아나고 있습니다. 

 

 

 이 샘을 절물로 부르는 것은 향림사 창건이전에

이 샘 주변에 영천사란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근에 큰 석불이 묻혀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고

절물 입구에서 큰 주춧돌이 발견되어 그 돌의 크기로 당시 영천사의 규모를 짐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주춧돌은 어디로 갔나요?

 

 이 샘물을 보수하는데 도움을 준 이들의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2기의 사수수선비가 보입니다.

 

 

 소화 11년 즉 1936년경에 세운 비석입니다.

 

 일본에서는 대판에 사시는 분들이 돈을 보탰고

이곳에서는 都鄕民 즉 마을사람전체가 4원을 걷었는데

건너건너 마을인 장전동민들이 4원, 도용남동민들이 2원을 보탰습니다.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라마을에 가면 그곳에도 물을 먹을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는 비석이 있는데

그곳에 기록된 후원자도 그 마을 사람이 아니고 모두 용담사람입니다.
순두물동산 마을전기가설송덕비에서 1974년에야 전기가 들어오고

당동산 송덕비에서 1979년에야 정미소가 생긴 것을 알 수 있듯이

아주 어려웠던 마을이었던 것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태고종사찰인 향림사 법당안으로 들어갑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에 약사여래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로 모셨고

좌우벽에는 지장보살상,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을 모십니다. 

   

측면에 불법을 수호하는 동진보살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으로 단을 모십니다.

 

 

연못을 한바퀴돌고 절집을 나섭니다.

 

 

  

  

 

 

 

당동산으로 갑니다.

 

당동산은 당이 있었던 동산이라고 하여 당동산입니다만

이곳에 가면 마을이 정말 어려웠던 기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송씨아미와 도령 이 두 오누이가 인간세상에 내려와 좌정처를 찾습니다.
원당봉과 신엄자운당 그리고 수산당동산을 거쳐 이곳에 와서 좌정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작박거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이곳 당동산으로 돌아 왔습니다만 ....


1979년도에 기독교와 관련된 기관 I.C.A(국제문화문제연구원)에서

도내에서 낙후된 마을에 속했던 이곳 광령리에 새마을 도정공장을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하필  그 공장을 만들라고 마을사람중 독지가가 희사한 땅이 바로 당동산앞입니다. 

  

 

 기독교에서 이렇게 마을을 도와서 어떤 시설을 만들어 주는데 기독교에서 기피하는 시설이 바로 앞에 있으면 않되지요.
일단 당을 쫒아냅니다.
그리고 감사비석 두기를 세웁니다.
한 기는 땅을 희사하신 마을독지가 두분에게

한기는 도정공장을 지어준 I.C.A에 꼬부랑글씨까지 써서 비석을 만들었습니다.
I.C.A에서 마을에 목욕탕, 양계장을 세워주고 농기계와 재봉틀을 보급하여 줍니다.

그리고 어린이 탁아소를 건립하는 등 마을 문화시설 확충에도 노력하였습니다.
고마움의 표현이자 계속 쭈욱 베풀어 달라는 바램을 실어 마을 입구동쪽 일왓의 땅 약 1,000평을 I.C.A에 기증합니다.

여기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오래가지 않고 끝이 납니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용두사미로 받아들여진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마을에는 I.C.A관련 사항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은 다시 당동산에서 쫒겨납니다.
이미 56년에 광령 2리 이승굴, 광령 3리 조중굴당으로 각각 가지갈라 갔고

광령1리 본향으로 다시 돌아왔었으나

이제 다시 광령 1리 일왓(지금의 영도빌라옆)으로 당이 옮겨져서 이곳은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아니 동산의 이름도 바뀌었었지요. 찬우물동산이라고...
그러다가 2008년 6월에 다시 당동산이라는 이름을 찾았습니다....만 허망한 일이지요.
 
당없는 당동산을 한바퀴돌고....
지금의 영도 빌라옆 일왓당을 갑니다. 

 

이당도 거의 폐당수준까지 갔다가 3~4년전 마을 재정비때 기사회생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미단 뒤 신목은 넘어졌어도 살아있습니다만 도령단 뒤 신목은 부려져 밑둥 썩은 자리만 남아있습니다. 

 

 

신이라해도 부모없이 남매만 살아가려니 힘들어도 너무 힘듭니다.

 

광령리 세곳의 당 중 어느한 곳 제대로 모심을 받지 못합니다.

 

 

 

 안내자는 이제 지석묘안내를 하려고 합니다.

 

지석묘 모여있는 곳으로 가면서 잠시 응지원에 들렀습니다.

꽤 오래전에 광령청년회에서 매머를 뒷쪽으로 작은 공원을 조성하고

응지원이라고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그 자리에 2004년 어느날 갑자기 마을 노인회에서 이자리가 혜일스님이 주석하던 고려말 서천암지라고 하여

혜일이 부근의 풍광을 읊은 시를 모아 혜일시비를 세웠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현지점에서 직선거리 500미터 계곡 건너쪽에 주거물의 흔적이 있던 어느 자리가 혜일의 서천암지라고 통용되었습니다만

지금 그 자리에는 애조로가 생기면서 기슭이 깍이고 무수천제2교의 교각이 들어서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혜일 스님과 무수천 8경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혜일 스님은 단지 서천암 주변 눈에 뜨이던 세곳, 응지석, 용안굴, 영구연에 대한 노래를 한 것이고

구한말 이지방의 유학자 光泉 김영호선생이 팔영가라 하는 시를 지어 

光泉午日, 鷹旨夕月, 日田龍眼, 靈邱飛瀑, 瓦屋石鼓, 仙門孤松, 長沼石槽, 照岩虎口라고 구분한 것입니다. 

 

이 무수천 8경 시비는 1989년에 마을 사람들이 비석에 새겨 광령교 서남쪽 숲속에 세워 두었습니다. 


 

 

팔로워들 사이에서 잠시 무수천 8경중 하나라는 매머를에 가보자는 의견이 나오고 ...그래서... 내려가 봅니다. 

 

 

 

 

 

   

 

 

 

 

 나오는 길 보광천이라고 쓰여진 마애를 들러볼까하다가

공연히 시간까먹는다 할까봐 입을 다물었습니다.

 

제주도 기념물 2-16호 광령 지석묘 1호입니다. 

 

화대사전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면

"광령리 6호 지석묘 아래밭 한가운데 있으며 상석은 길이 361㎝, 폭 302㎝, 두께 40㎝로 이 일대 지석묘중 큰 편에 속한다.

대체로 불규칙한 삼각형을 하고 있으며 장축은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지석은 남. 남서. 동쪽에 고였는데 남서쪽 것은 높이 56㎝, 폭 67㎝, 두께 18㎝의 잘 다듬은 장방형 판석으로 곧추 세워져 있다.

다른 두 곳은 납작둥그스럼한 괴석과 할석으로 고였으며, 지석과 상석의 틈사이에는 작은 돌이 끼워져 있다.

따라서 상석은 남서쪽이 높게 들려 있어 매장부가 서쪽으로 개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상석하부에 퇴적된 表土를 제거하니 바로 암반이 노출될 뿐, 매장시설로 이용했음직한 석곽 혹은 토광의 흔적은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지석묘의 경우 시신이 놓인 매장부는 지상일 가능성이 크며

일단 지석묘를 축조한 후에 상석이 들리워진 서쪽으로 시신을 들이민 다음, 지금은 없어졌지만,

막음돌로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합니다.

 

 옛 사람들의 ‘영혼의 집’인 고인돌(支石墓)은

1971년부터 제주도기념물 제2의 몇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정된 것은 용담동. 오라, 도련, 삼양, 외도, 광령, 하귀, 창천 등과

가파도 같은 섬의 것까지 포함하여 100여기에 이르고 있으며,

최근에도 계속 발견되는 것들이 있어 그 수를 더하고 있습니다.

 

통상 제주도의 고인돌은 탐라 전기인 AD 0~500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지금의  기록은 예전에 고인돌에 대해 공부한다고 이것 저것 볼때 어디서 캡쳐한 것입니다만 출처를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공부하는 자세로 그 전문을 옮겨 칩니다.


"....따라서 그 시대에 지금보다 훨씬 영혼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고인돌의 축조는 일정한 인구의 규모, 이에 따른 취락 형성과

본격적인 농경으로 인한 협업체 구성,

불평등 사회 구조를 배경으로 하고 출발한다.

제주도 고인돌의 형식은 크게 매장부의 위치와 지석의 고임 방식을 분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즉 시신을 지하에 매장하는가, 아니면 지상에 매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지상형은 키가 높은 지석을 사용하고,

지하형은 키가 낮은 지석을,

그리고 중간형인 반 지상형의 경우는 상석 양 모서리에 작은 지석을 고여 아치 모양을 만들거나

어떤 것은 한쪽을 들리게 하고 다른 쪽에 낮은 지석을 고였다.

 

또 하나의 분류 기준은 매장 상부에 지석이 있냐 없냐 하는 것이다.

만일 고였다면 판석형 지석이냐 아니면 괴석형 지석이냐도 중요한 분류 방법이 된다.

즉 두툼한 괴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보다는 키가 높은 판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이 보다 복잡한 구조다.

 

이런 지석의 고임 상태와 매장시설의 위치를 가지고 제주도 고인돌을 분류하면 대략 여섯 가지 형태로 나눌 수가 있다.
1)지석 없이 상석이 지표에 바로 닿는 개석식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

2)남방식 유형에 속하나 지석을 제대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경우. 이때 지석의 숫자는 3~10매로 그 예가 다양하다.
3)상석 한쪽이 들리어 아래쪽 매장부가 땅 위에 드러나 있고 그 좌우와 들리지 않은 뒤쪽에 지석을 고인 형식.

4)지석을 이중으로 고이고, 비탈면을 이용하여 한쪽은 작은 깎은 돌들을 고인 경우.
5)비탈면을 이용하여 높은 곳은 깎은 돌과 괴석을, 낮은 곳은 판석을 고인 형식.

6)상석 아래는 완전하게 판석형 지석으로 에워싸 고여있는 형식으로 지상에 장방형 혹은 원형의 석실을 만든 형식.

이상의 1, 2형식은 매장부가 지하에 있으며,

3, 4형식은 반지상형일 가능성이 높고,

5, 6형식은 지상형으로 정리된다.


고인돌의 축조 시기를 가름하는 것은 부장 유물을 통해서이다. 한

반도 고인돌에서는 갈아서 만든 돌칼과 비파형 동으로 만든 칼등이 있는데

이런 유물의 연대는 대체로 청동기시대(BC 1000년~300년)부터 초기철기시대(BC 300년~0년)까지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 시기적으로 앞선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아 그보다 다소 늦을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면 이런 고인돌 속에 묻힌 것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학자들은 돌을 움직일 다수의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은 일정한 권위에 의해서 강제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 자발적인 협업 체제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광령리 10호 고인돌의 경우 무게가 약 15톤 가량 될 것으로 보여

이 고인돌의 운반 과정에 성인 남자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100Kg으로 잡을 때 이 한 기의 고인돌을 옮겨오고,

쌓는데 필요한 인력을 150명 정도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4~5인 가구에 한 사람의 성인 남자가 있다고 가정할 때

 이 고인돌의 축조 당시 650~800명의 인구가 고인돌 인근에 흩어져 살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인돌의 분포와 같은 시기의 토기가 나오는 정도에 따라

탐라 전기에 한라산 북쪽의 용담동을 비롯하여

오라동 일대와 광령리, 고내리, 귀일리, 곽지리, 옹포리 일대에 각기 규모를 달리하는 거주 집단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한라산 남서쪽에는 일과리, 동일리, 화순리, 창천리 일대와

남동쪽에 신례리, 신천리, 신풍리, 신산리 일대에 크고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어

그 시대의 지도를 대충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고인돌의 움푹 파인 구멍인 성혈에 관해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앙이나 농경을 위한 별자리 흔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에서 가설이 먼저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도 동의를 하는 것 같더군요.
일부에서는 별자리를 고대인들의 기원이 담긴 신앙의 표시로도 봅니다.


정말 별자리를 새긴 것일까? 왜 새겼을까?

별자리라고 성혈이라고 쓰면 별星자를 써야지 왜 성품性자를 쓸까?
확실하게 대답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다 가설만을 이야기할 뿐이지요.
가설이 그럴듯 하면 학위 받고

또 그 가설을 부수는 사람도 학위 받고

새가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학위 받고

전문가는 늘어나지만 정확한것을 아는이는 없습니다.

 

결국 성혈이 꼭 별자리라고 일반화하기엔 무리라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고인돌 그 자체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고인돌이 아니라고 치워버렸던 돌들이 이제 다시 검토해보니 고인돌인듯 하다고

2-삼십몇호로 지정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광령리에는 10개의 지석묘가 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2-16호에서 21호까지

그리고 2-33호에서 36호로 순번이 매겨져 있습니다.

37호 38호는 없고, 39호 40호가 동일리지석묘일겁니다.


그 날 본 지석묘입니다.

각각의 설명은 제주도문화체육과 공식설명을 옮깁니다.

 

2-17호 

 

광령리 1호 지석묘(제주도 기념물 제16호)가 놓인 밭의 끄트머리 아래밭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2m높이의 급격한 경사면 중간에 있다.

용담동 6호 지석묘(제주도기념물 제2-6호)처럼 상석 가장자리를 돌아가면서 잘 다듬은 판석형 지석을 병풍처럼 두른 형식이다.

원래 이 지석묘가 놓여 있는 위치는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었을 것이나

경작지 조성시 윗밭과 아래밭을 각각 평평하게 고르느라 2m 정도 높이가 차이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는 상석과 남쪽 지석이 윗밭 경작토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고

북쪽 측면만이 노출되어 있는데

원래는 상석은 물론이고 지석과 매장부도 지상에 완전히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상석과 판석형 지석으로 이루어진 석실내부의 바닥면과,

외부의 표토층 아래에 드러난 토층이 동일한 높이를 이루며 같은 황갈색점토층이라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상석은 길이 250㎝, 폭 205㎝, 두께 55㎝로 비교적 고르게 다듬은 장방형으로 장축은 정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이 장방형의 상석 가장자리를 따라 판석형 지석이 고여 있으므로 지석으로 이루어진 석실 또한 장방형이다.

지석은 전부 높이 70∼80㎝, 폭 55∼60㎝, 두께 8∼13㎝로 잘 다듬은 장방형 판석으로

동·서·남에 똑같이 각 3매가 서로 맞물리면서 고여있고,

북쪽은 현재 지석없이 개방되어 있다.

이것은 일단 지석묘를 축조한 후 북편으로 시신을 들이밀고 난 후에 지석을 끼워맞추었기 때문에 쉽게 이탈된 것 같다.  

 

 지석묘 내부에서 다수의 경질무문토기편과 김해식 토기편을 수습하였으며,

그 출토 위치가 대체로 지석 근처임은 다른 지석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혈은 상석 북쪽에서 1개가 희미하게 확인된다.

 

 개똥참외

 우리엄마 살아생전 내게주던 젖맛일세

명태줄라 명태싫다.

가지줄라 가지싫다.

우리엄마 젖을다오 우리엄마 젖을 다오.

 

느닷없이 뭔소리...?

타박네의 한구절이었습니다.

 

2-20호

 

길과 밭 사이 돌담에 위치한 지석묘로 상석의 상면은 가운데가 다소 우묵하나 평평하고,

반파되었지만 전체모양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상석의 장축방향은 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지표면은 남쪽이 높은 경사면을 이루고,

상석은 남쪽이 두꺼워 지석없이 지면에 놓여 있고,

동쪽과 서쪽에 각기 3매 및 1매의 판석상 지석이 고여 있다.
북쪽은 지석없이 열려 있으나 처음 이 지석묘를 발견할 당시에 53×43×47㎝ 의 괴석으로 막아있었다.  

 

서편의 지석은 길이 90㎝, 높이 47㎝, 두께 21㎝의 두꺼운 장방형판석이며

이 지석과 물리는 상석하면의 가장자리는 움푹하게 패여 있다.

동편은 길이 53㎝, 높이 49㎝, 두게 9㎝와 길이 48㎝, 높이 43㎝, 두께 10㎝의 두 개의 사다리꼴 판석과

길이 100㎝, 높이 61㎝, 두께 20㎝의 둥글납작한 한 개의 고석 등 모두 3개의 지석이 있다.


상석 하부에는 잡석이 흑갈색 매립토에 혼입되어 있었는데

그 일부는 밭 고르다 치운 돌일지도 모르나, 원래부터 매장부를 덮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적석혼토층을 제거하니 현재 지표와 비슷한 높이에서 비교적 단단한 황갈색점토층이 노출되고,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깔았을지도 모를 20∼ 40㎝ 크기의 판석이 5매 발견되었으며

이는 상석장축과 같은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이 흑갈색 혼토중에서 토기저부 완형 1점, 비교적 잘 다듬은 장방형 숫돌 1점, 토제방추차 1점이 일괄로 발견되었고,

그 밖에도 지석 안쪽 가까이에서 다수의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상석 윗면의 성혈은 북서쪽에 치우쳐 35개가 확인되었는데 마멸이 심하다.

 

2-19호 

 

밭 한가운데 평평한 곳에 위치하여

상석의 크기가 길이 369㎝, 폭 276㎝, 두께 77㎝로 광령리일대 지석묘 중 가장 크며 그 평면은 대체로 6각형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다른 지석묘와 마찬가지로 상석하부 세 귀퉁이에 지석을 고였다.

 

특이한 것은 다소 지면이 높은 동쪽에 작은 돌이 겹겹이 고여 있고

다른 두곳 북서쪽과 남서쪽에는 각각

높이 114㎝, 폭 65㎝, 두께 25㎝, 높이 118㎝, 폭 91㎝, 두께 27㎝의 잘 다듬고 큼직한 판석이 고여 있다.

그리고 이 판석형의 지석과 맞물리는 상석 하면은 손질을 가하였다.

한편 지석은 높은 지면에 닿는 동쪽으로 두껍고,

판석형의 지석이 고이는 서쪽으로는 얇아져 이쪽으로 매장부가 완전히 노출되고 있다.

 

그리고 상석하부에 퇴적된 부토(腐土)를 걷어내니

남쪽에 치우쳐 시신의 머리를 놓기에 적당하게 평평하고 납작한 판석이 노출되었다.

 

이 판석이 놓인 면은 황갈색점토층으로 비교적 단단한 편이며 유물이 포함되지 않았다.

높이는 현재 지표보다 다소 낮은 편이나 지석묘 축조 당시의 구지표면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신은 지상에 놓이거나 적어도 반지하인 형식으로 추정된다.

한편 앞서 언급한 베갯돌이 분명하다면 그 위치로 보아 두향 혹은 침향은 남쪽이며 대체로 상석의 장축방향과 일치됨을 알 수 있다.

성혈은 상석 동쪽편에 3개가 발견된다.

 

2-18호와 2-36호

 

2-18호 


돌담에 위치하며 상석은 반으로 쪼개져 경사면에 쓰러져 있다.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지석묘는 경작지 조성시 밭 한가운데에 있던 것을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상석은 원래 장방형의 모를 죽인 바둑판 모양으로

길이 261㎝, 폭 165㎝, 두께 45㎝이고 평평한 윗면에 마멸이 심한 62개의 성혈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2-36호

 

 

남방식(2형식)으로, 지하매장주체 형식을 띄고 있으며, 장축 214㎝, 단축 123㎝, 두께 62㎝이다.

 

암각화입니다.

 
2004년도에 제주도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이자리 이형태로 발견하였습니다.

청동기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암각화라고 합니다.


가로 148㎝, 세로 93㎝, 두께 45㎝의 타원형 현무암에 방사상으로 음각된 형상으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대 암각화의 어떤 구체적 형상을 본뜬 모습과는 다른

추상적인 그림이라서 설왕설래가 많습니다만 ....

암각화가 발견된 광령리 일대가 주변 외도동과 함께 고인돌이 밀집한 제주도내 대표적 청동기 유적지라는 점을 들어

"제의적 성격을 띤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신앙적 구조물일 것이다"라는 추론만을 하고 있습니다.

 

보너스: 외도동 지석묘

 

 

다시 광령리 지석묘 2-33호

 

 

 

2-34호

 

 

 

2-21호를 끝으로 답사를 마칩니다.

 

 

오늘 다른 볼일이 있는데도 답사에 참여한 이유가

나자신이 지석묘에 대해 아는바가 없어 지석묘에 잘 안가게되고,

가더라도 한두개만 보고 딴 짓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단체가 움직일 때 따라가려고 한 것이지요.


덕분에 몇곳의 지석묘를 찬찬히 둘러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무수천 8경중 3경 일왓 용안굴에 들러 용과 눈을 맞춰보았습니다. 

  

 

 

  

  

오늘의 발걸음을 여기서 멈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