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군산 월명공원

하늘타리. 2012. 10. 26. 20:37

월명공원
서울의 남산공원처럼 한때는 군산시의 상징이었지요.

월명산을 비롯하여 장계산·설림산·점방산·석치산 등으로 이어져 있고 군산시가지를 포함 주변 사방을 모두 조망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80년대 이전까지는 전주, 이리, 김제 지역 등에서 이 곳으로 수학여행을 오기도 하였답니다.


올라가는 길...

누구는 108계단이라 하고 누구는 114계단이라고 합니다.

나는....? 세지않습니다.

조선왕조말엽 인천 등 개항지 각국조계지역 인근에 공원을 조성하며 각국공원이라 이름합니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각국 조계지역 법이 폐지되자

각국이란 이름을 떼어내고 그 지역의 이름으로 부르게 됩니다.
이곳도 군산공원으로 부르게 되었고

군산시가 일본과 무역으로 호황을 누리던 1933년에 지금의 수시탑 주변의 토지를 매입 공원 규모를 확대하였습니다.
그후 광복이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산림 훼손이 심하게되자

1967년에 부근 산들을 산림보호지역으로 정하고

1972년 해망동 수시탑에서 미룡동 군산대 뒷산까지 이르는 지역을 공원지역으로 지정,

월명공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옛 전망대 방향으로 갑니다.

 

충혼불멸비

 

한국전쟁때 학도의용군 순국자를 기리는 비입니다.

 

 

의용불멸비

 

 

 

옛 전망대

 

춘고 이인식선생 동상

군산시 임피면에서 만석 부호였던 이태하 씨의 막내로 태어난 춘고 이인식 (1901-1963)선생은

1916년 서울 보성고에 입학, 수학중 3.1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그해 3월5일 3·1 독립운동 학생 중심세력으로 체포되어 구속,

4개월간의 예심 끝에 10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1923년 동경대학 철학과에 입학,

재일본 한국인 학생 항일결사의 일원으로 금우회(錦友會)를 조직하고 월보 등을 발간하면서 항일운동 거사를 도모하다

일경에 발각되어 조직이 와해되자 중국으로 탈출하여

1925년부터 망명생활을 하였습니다.

1945년 8월15일 조국 광복을 맞아 귀국한 후, 향리인 임피로 내려와 임피중학교 교장으로 부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는 일념으로 소년·소녀들을 배움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1962년 3월1일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고,

1963년 3월25일 생을 마감한 춘고 이인식 선생은

서울 동작구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 동상은 2005년 10월1일 제막식을 했다합니다.

 

전망대에 오릅니다만

 

이제는 전망대 구실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래 보이는 등나무쉼터가 아마도 얼마전까지 동양최대의 등나무가 있던 것일게고

그 옆이 1934년 군산의 일본인들이 세운 개항 35주년 기념탑이 있던 곳일겁니다.

 

생각없이 밑으로 내려가다 다시 온길을 되짚어 비둘기집앞으로 돌아옵니다.

 

 

 

 

비둘기들이 다 어디론가 놀러 나갔나 봅니다.

아니면 쫓아 내었을까요?

 

그옆으로 해망동골목과 물고기길이라는 표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쓰여져 있는 글.
"우리근대화시기 군산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곳이다.
....(중략)...

지금은 낡고 쇠락한 공간으로 인식되는 이곳이지만

이골목을 따라 산으로 오르거나 선창쪽으로 내려가는 이길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기억과 함께 시간의 길을 따라 걷는 사유의 산책길이라 할 것이다."


그 골목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30여년전의 허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휴게소 건물뒤 공터에서 해망동을 봅니다.

 

 

 

해망동보다는 군산시와 서천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인공섬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10년넘게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 가고 있지요.

지금의 입장을 한번 정리해 보면

서천군은 '금강하구둑 해수유통 주장' 등 금강하구 환경 복원에 초점을 맞춰 금강하구 문제에 접근하고 있지만

군산시는 개발논리를 앞세워 금강하구 인공섬을 체육·관광단지로 조성하겠다고 합니다.

이곳 해망동에서 보니 과연 어느방안이 주민의 삶의 질에 도움이 될것인가를 판단하기가 더 어렵군요.

 

그 골목으로 들어서려다가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타인의 어려운 삶의 현장을  낭만적인 눈으로만 보아서는 않될 것 같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공원 산책로를 걷습니다.

 

해병대 군산 장항 이리지구 전적비

 

 

 

 

 

 

 

 

 

 

 

수시탑

 

 

수시탑은 1966년에 시에서 군산의 상징물로 탑을 세우기로 하여 만들어진 탑입니다.

군산의 상징물이라기 보다는 경기침체로 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바램의 표현이지요.

그래서 경제가 살아나려면 배가 많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돛을펼친 돛단배 모습과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공사간 탑의 이름을 봄을 기다린다하여 춘망탑이라 부르다가

1968년 탑 완공시에는 군산의 발전을 기원하는 성시탑으로 이름이 지어졌고

그 후 군산시를 수호하는 수시탑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바다조각공원 조성사업은

 월명공원을 친근감 있게 가꾸어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명소로 만들어 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개항100주년 기념사업 중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입니다.
하지만 조각작품설치비만 해도 상당액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고심 중

군산바다조각공원 조성을 위한 모형전시회를 군산시 주최로 개최하고

그 입선작에 대해서는 군산시에서 작품제작에 따른 재료비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1997년 11월 12일부터 11월 20일까지 군산시청에서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이 전시회에 전국의 중견작가 74명으로부터 모두 76점의 작품이 출품되었고

이 중 22점을 자체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선정후

선정된 작품에 대해 재료비를 지급하여 제작토록 한후

완성된 작품둘을 이곳에 전시하여 1998년 10월에 개장하였습니다.

 

한점 한점을 둘러보면서 출품해준 조각가들에게 감사드리며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작품속에서 마냥 시간을 보냅니다.

 

 

 

 

 

 

 

 

 

 

 

 

 

 

 

 

 

 

 

 

 

 

 

 

 

 

 

 

 

 

 

 

 

 

 

 

 

 

 

채만식 문학비

 

우째 뒷면으로 먼저 왔습니다.

비문에 적혀 있는 채만식일대기입니다.
"1902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소설가 채만식 선생은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중퇴했다.

1925년 단편 '새 길로'가 조선 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대표작은 장편소설 '탁류'로서, 부조리에 얽힌 1930년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이자

 군산을 무대로 식민지 시대의 억눌린 서민들의 삶을 기록한 수작이다.

군산까지 흘러 와서 서해 바다와 합쳐지는 금강을 두고 채만식은 '탁류'에서 눈물의 강이라고 불렀다.

군데군데 일본식 가옥들이 남아있는 월명동 주택가나 군산 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한 거리 혹은

뱃고동소리가 처량한 군산항 등지를 돌다보면 채만식 선생의 체취가 아스라히 느껴진다.

채만식은 한국전쟁 직전 고향근처에서 가난과 폐결핵이라는 병고로 마흔 여덟의 짧은 나이에 이승과 인연을 끊었다"

 

 

앞면

"에두르고 휘몰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내내 가난하게 살다가 폐결핵으로 48년 생을 마감한  채만식.

죽으면 조화 대신 생화를 꽂아달라고 했다는데

이 문학비 주변에는 봄이면 진달래와 벚꽃이 만발합니다.

그런데 장미동 구조선은행 건물 옆에 있던 채만식 소설비는 지금도 있을까?

 

"탁류"에서 미두에 미쳐 자식을 판 정주사의 고향 충청도 땅이 가깝게 보입니다.

 

어선 무선중계국

 

 

 

 

캔커피 하나 주세요.

 

 

 

 

 

 

삼일탑을 들르지 않고 바로 장계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장계산

 

 

 

 

 

 

 

 

 

 

 

 

 

 

 

 

 

 

 

 

 

 

 

 

 

점방산 전망대가 보입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군산 제 1저수지

 

1912년 군산에서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저수지입니다.  

 

 

 

 

 

 

 

봉수대 사적비

 

 

 

 

 

전망대에 올라

돌고 돌고 또 돌고 돌고..

 

 

 

 

 

 

 

 

 

 

 

 

 

 

 

 

 

 

 

 

 

 

 

 

 

 

 

 

 

 

 

 

 

 

 

 

 

 

 

 

내려갑니다.

 

설림산을 넘어 은적사를 갔다가 나운배수지로 갈까 하다가...

 메고 있는 배낭의 무게만큼 갈길이 멀게 느껴져 왔던 길 되집어 갑니다.

 

 

 

 

 

 

 

 

갈때는 숲길을 가로 질러 가서 지나치지 않은 곳

삼일탑

 

 

 

 

 

 

 

 

 

왔던길 되짚어 가며 몇장 꾹

 

 

 

 

다시 해망동 골목입구에 섰습니다.

 

 

 

 

 

 

골목길로 해서 큰길로 내려가다가

분명 사람이 살고 있음에도 아무 기척도 없는 길에 마음이 짠해 져서

다시 올라옵니다.

 

생각하는 시민상 옆을 지납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시나요?


또 고은의 만인보 중 한구절이 생각납니다.
 “개발이 악이 아니라 선이기를.. 개발이 정치가 아니기를..."

 

테니스라켓을 손에서 내려놓은지도 꽤 오래 되었구나.

지금 라켓을 손에 다시 쥔다해도 다시 어울릴 실력이 될까?

 

해망로로 접어들어 군장대교 건설현장을 봅니다.

군장대교가 완공되면 교차로 진입로가 이 일대를 관통해 건설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이곳의 모습이 깔끔한 황량함으로 바뀌겠네요.

 

해망로를 따라 바다를 연해 걷습니다.

Beethoven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1 in D Major Op.12
1. Allegro con brio
2. Tema con variazioni (Andante con moto) 
3. Rondo (Allegro)

Maria-Joao Pires, piano  
Augustin Dumay, vio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