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군산 둔율동, 월명동

하늘타리. 2012. 10. 23. 17:20

8월 14일

 

어제 고창에서 군산으로 와서 금강레져타운이라는 곳에서 밤을 보내고...

 이제 아침...

한겨레 신문에서 발췌한 문화지도 한장 손에 들고

새로운 마음으로 길을 나섭니다.

 

오늘의 주제는 군산 근대문화유산 답사.
군산은 근대 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일제는 곳 군산항을 통해

전북 곡창지대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날랐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럼으로 발전된 도시이기도 하지요.


군산항은 1899년 5월 1일 개항을 하였습니다.
부산이 1876년, 원산이 1880년, 목포가 1897년, 진남포가 1897년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개항항이 된 것이지요.
개항 이후 군산항은 호남평야에서 나는 쌀을 일본으로 운송하는 주요 반출항 역할을 하여

1909년 조사에 의하면 조선 전체의 쌀 반출량의 32.4%가 군산항을 통해 나갔다고 합니다.
배가 많이 드나들면서 항구가 커지고 도시가 들어서

1925년 경에는 일대에 일본인 인구수가 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그 당시 항구에 접근하기 가까웠던

지금의 신흥동, 장미동, 영화동 일대에 일본인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도시가 발전하다가

해방 후 일본인들은 떠나고 그 흔적만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표현이 조금 순화되지 않았습니다만

이 지역이 국토의 동쪽에 비해 발전이 늦다 보니

 아직 그 흔적이 산재해 있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엄혹했던 시절의 도시의 모습을 상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길을 걷습니다.
터벅 터벅 ...

복성루라는 중국집이 있습니다.


들은 기억으로는 거창하게도 전국 5대짬뽕집의 한 곳이라더군요.


식사를 할 수 있을까 기웃거려 보았지만

아직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 어쩌면 다행이다.

이름난 집에 가서 맛있게 먹어본 기억이 잘 없습니다.
희안하게도 대다수의 소규모 식당에서 손님수와 친절도는 반비례하고

명성과 맛도 반비례합니다.


그냥 소박하게 맛난 음식릉 차려내던 식당이 어느 날 명성을 얻습니다.
손님이 미어들겠지요.
돈을 벌려는 마음이야 한계가 없지만 사람의 손놀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실해 집니다.

단골손님은 떨어져 나가지만 그래도 맛있다고 소문난 곳이니

새로운 손님은 계속 찾아옵니다.


그렇게 실망한 곳이 많으면서도

이름난 곳이라면 들어가 보고 싶어집니다.
이집도 인터넷상에서 비판의 소리가 제법 많은 곳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맛있는 집이라니 잘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지금도 유지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월명로라고 이름 붙여진 길을 계속 걷습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까지 연못과 허허벌판이었다고 하고

미원사거리 부근에 있는 남초등학교는 아주 깊고 넓은 연못자리였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땅은 사람 한길 깊이만 파면 진흙이 나오기 시작한다네요.


아리랑로로 조금 빨리 갈려고 미원사거리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읍니다.
서민 주택 또는 초가집 대문으로 썼을 듯 한 평대문입니다만

이골목에 한옥식 대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열려진 틈안으로 언듯 보니 건물은 그냥 일반 가옥인데 대문만 한옥식입니다.

도로명주소가 붙어 있네요
둔배미길 몇 번지
채만식의 소설 탁류속의 정주사가 이길을 지나갔을 겁니다.
재산 다 팔아먹고 창성동 고개위(둔배미) 초가집으로 옮겨 온 정주사가

이 골목을 지나 콩나물 고개를 오르내렸을 겁니다.


영광여고 건물이 보이네요.


영광여고는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멜보딘여학교가 이어진 것입니다.
지금 구암교회가 있는 곳 일대에 교회를 비롯해

영명학교, 멜보딘여학교 그리고 예수병원과 선교사 사택 등이 복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구암교회는 1919년 한강이남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던 교회라고 합니다.

1919년 3월 5일에 일어난 군산 3.1 독립만세 운동의 주축인사들은 구암교회 교인들이었다 하고

멜보딘여학교는 3 · 5 운동 때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뭘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영광여고에 대한 몇가지 지식을 보충하러 학교 홈피에 들어가 보니

1965년 4월 21일 학교법인 영광학원 설립,

1965년 4월 21일 문교부로부터 멜볼딘 여자 중ㆍ고등학교 인가 받음,

1966년 1월 26일 제 1회 졸업식,

1980년 3월 1일 군산영광여자고등학교로 교명 변경이라고 연혁이 되어 있고

1965년 이전의 연관된 역사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여간 답사 그 당시는

아리랑로와 둔배미길 가운데 위치한 이학교의 건물을 보고

군산 3 · 5 운동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둔율동 성당입니다. 

조선 숙종조에 이 곳에 둔소(군대 주둔지)가 있었고

주변 야산에 밤나무 많아 둔소의 "둔(屯)"과 밤나무 "율(栗)"자를 합해

한자음으로 "둔율"이라 불렀고 한글말로는 둔밤이라 했는데

이 것이 둔배미로 변했다는 동네의 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1925년에 영동에서 나바위본당 군산공소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영동을 거쳐 1930년에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옥구 군청 관사를 매입 이전하였습니다.

1931년에 군산본당이 되었고

1944년 현재의 자리에 성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952년에 월명동본당이 설립되자 둔율동본당으로 개칭되었지요. 

 

 

 

본당안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내 교적이 있는 곳에서는 냉담교우입니다.
우습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곳에 성당이 있으면 꼭 들어가 봅니다.
내안에 모시는 분이 그런 나를 그리 미뻐하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내마음을 위로하는 하나의 절차입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 이름을 따온 아리랑로와 만나는 지점의 모습입니다.

 

일정당시 이 지역 일대

그러니까 창성동, 둔율동일대 그리고 서쪽 개복동일대는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이 산비탈에 '토막'이라는 이름의 움막형태의 흙집을 짓고

남자는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고

 여자는 일본인집에서 식모살이와 미선공을 하여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가 더 떠오르는 곳입니다.
현재도 고생하는 분들이 많이 사십니다.


군산시는 이곳을 고지대 불량주거지 공원화사업지구 중 창성지구(창성동, 둔율동)로 지정해

도심 내 녹지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진척이 되질 않고 있다고 합니다. 
아리랑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콩나물고개가 나올겁니다.
그런데 몇일 계속된 답사에 지친 몸이

아직 아침도 않먹었으니 오르막길은 가지말자 합니다.
고개를 넘어 옛 옥구군청이 있던 곳을 지나 일정시 희소관이란 극장이 있던곳,

문 닫은 국도극장 앞을 지나 개복동으로 가려고 했습니다만

마음을 바꿉니다.


월명로를 따라 걷습니다.


도로옆 축대로 올라가는 계단. 

 

 이 계단을 올라가서 축대를 따라 조금만 가면 큰길과 연결되어 선양고가다리에 이릅니다.

일정 때 삼학동~명산동을 잇기 위해 산줄기를 끊어 길을 내었고

그 끊어진 부분에 고가다리를 놓았습니다.

다리 위에 '탁류'의 무대임을 알리는 빗돌이 있습니다....만
당연히 않올라갑니다.


축대옆 게시판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정신을 빼앗겨

고가도로 아래를 그냥 지나왔습니다.

 

 

명산시장

 탁류의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일제때 유곽이 많아서 유곽시장(遊廓市場, 유가쿠시장)이라고도 했던 곳입니다.
호남에서 가장 큰 유곽이었던 신흥동유곽이 있던 곳으로

손님이 많이 찾아오고...

그러니 유곽에서 많은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유곽입구에 쌀가게가 들어서고...

채소장수가 모여들고...

싱싱한 채소를 찾아 주민들이 찾아오고 ...

그렇게 장이 형성되었다가

해방후 유곽이 없어지고

자연스러이 상설장으로 형성된 곳입니다.


주변 어딘가에

탁류속의 정주사가  빚을 갚지 못해 눈치를 살피며 지나던

한참봉의 쌀가게가 있을 겁니다,


시장안에 옛 유곽건물이 남아 있다는데

굳이 찾아가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시장입구 바로 옆에 화교소학교가 있는데

이곳도 일정시에는 후쿠노야 유곽이었다고 합니다.

 

화교소학교가 나라 전역에 13군데인가 14군데 있을 텐데

학생수 감소로 인해 청주화교소학교와 제천화교소학교가 현재 운영되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유치부모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듯합니다.
타국, 타지에서 그래도 열심히 사는 그들과 그 자녀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들어가 보려 했는데 문이 잠겨서....

 철문사이로 카메라를 집어넣고

본관 사진 한장 꾹하고 돌아섭니다.


월명동, 인근의 일본식가옥.

어젯밤 내린 많은 비가 집안으로 들어 왔던 것 같습니다.

물에 젖어 못쓰게 된 것들을 꺼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타나는 생경한 모습.
이건 아닌것 같은데.....

 

 

 

새롭게 형성된 일본식 가옥들의 밀집된 모습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 시절의 흔적에 덧씌어진 오늘의 모습을 보러 온건데....


생각이 복잡해 집니다.

 

 

 

 

머리를 식히려 공사판 맞은편 월명동성당으로 쫒기듯 들어갑니다.

 

성베드로를 주보로 모시는 

작년에 50주년을 맞은 성당입니다.

 

 

 

 

 

 

 

십사처를 돕니다.

 

 

 

 

 

 

 

 

 

 

 

 

 

 

 

 

 

 

 

성당 문을 나오니 다시 공사현장이 나옵니다. 

 

 

일대에 있던 일제시대 가옥을 다시 복원하여

근대역사체험공간을 조성하겠답니다.
140여억원을 들여

당시 분위기를 살린 민박집과 찻집, 청주주조(판매장, 시음장), 중정형공원,

공중화장실, 무형문화 전수관, 휴게공간 등 각종 근린 생활시설을 설치해

관광객 유치에 나서겠다는 데....
다시 말하면 테마파크를 새로이 지어

일본인이나 일본 문화에 경도된 이들에게 관광상품을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교훈여행이 이렇게 까지 왜곡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합니다.
장미동에 있는 '조선은행'과 '일본제18 은행', '미즈상사',

 '대한통운창고' 등 5개의 근대 건축물도 원형 복원을 하고 있답니다.
이것도 지어진 시절의 모습만 닮은

 새로운 모조품을 만들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입니다.


세월의 이끼가 벗겨진 유적은 유적이 아닙니다.
현 남아있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훼손을 예방하는 것이

문화재의 보존정책이 되어야지

그간의 세월을 다 부정하고 새로 짓는 것은

문화재가 아니고 모조품일 따름입니다.


과거의 흔적중 가슴아픈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다크투어리즘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유적을 둘러보는 것 중 다크투어리즘에 해당되는 곳이 많습니다.
3.1운동 유적지, 임진왜란 전적지와 이순신장군의 충렬사 등이

모두 역사적인 비극의 현장을 방문하는 여행입니다.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이름붙여진 곳들도

사실 어떤 의미로서의 비극적인 시대상을 둘러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화유산을 보수 내지는 정비할 때

관람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값싼 감상에 빠지지 않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리고 과거 역사의 인식과 해석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구도심권의 경기 침체를 극복할 수 있을는 방안으로

일본식 건물을 다시 짓고

일본식거리를 만들어

도심 재생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고,
이 관광타운으로 관광객을 유치하여 돈을 벌겠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겠다는 것을 나무랠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잘 못 왔구나....
가볼 곳도 많고 시간은 없는데
아까운 시간과 돈 들여 일부러 허망함을 찾아 왔구나

걷습니다

 

부근 일대의 일제식 가옥을 찾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