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옛 세관

하늘타리. 2012. 11. 1. 15:39

바다로 들어가는 금강줄기와 연해 있는 해망로를 거슬러 걷습니다.
그 옛날 수탈한 물자를 싣고 일본으로 오가는 배들로 가득 했을 곳에

지금은 다리공사가 한창입니다.

 군산 - 경주간 국도 4호선중 미개통구간인 군산과 장항을 이어서

지역의 교통소통과 동일생활권 형성을 위해 세워지는 군장대교입니다.

 


도로는 단순히 교통시설만은 아니지요.
문화와 경제의 교류와 소통으로 상호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저런 이유로 공사가 지연되어 2014년에도 개통하기 힘들것 같다는데

벌써 장항·군산 통합촉구 시민모임이 생겼다 합니다.

 

 

한적한 내항길을 걸어갑니다.

 

 

몇층인가...8층이구나.

누군가에게 1983년 오픈한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횟집이고

간장게장은 맛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군산 원도심인 금동 옛 도선장 일원에 이어져 있는 몇곳의 횟집

 횟집들 정면 바닷가로 대문이 하나 만들어져 있습니다.

 

해망대문

작년 3월 해망동·금동·신흥동이 통합된 해신동 주민대표들이

이 곳이 예전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다시 발전하길 바라는 주민들의 간절함을 담아

상징조형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곳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해 드나들던 배의 형상을 이미지화 했으며,

역동성과 솟구치는 기상을 기둥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운항하는 지 모르지만 고군산, 선유도등의 유람선 매표소와 도선장이 있습니다.

 

 

상업적인 기능은 모두 상실하고 지금은 그냥 한가롭기만 한 항구의 내항길을 걷습니다.

 

 

 

 

 

 

 

오른쪽으로 군산시 근대역사박물관의 건물 뒷면이 보입니다.

 

 

빙돌아 전면으로 갑니다. 

 

 

선종암에 있던 고려시대 3층석탑이 입구에 있습니다.

1912년 수원지가 건설되면서 선종암이 폐찰되자 군산공원으로 옮겼다가

1976년 은적사로 옮겼고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만들어지면서 이리 옮겨왔답니다.
석탑유전이지요...

 

 

박물관입장 

 

 

 

 

군산 그리고 근대의 사람들 사진잔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삶의 모습입니다.

 

 

 

 

 

 

 

 

천연염색 규방공예 손바느질 전시

 

 

 

근대시기 행정지도

 

 

군산역사연표

 

 

 

 

해양물류역사관


박물관의 설명 : 물류유통 중심지였던 군산의 과거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군산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는 공간입니다.
해양물류역사관은 ‘국제무역항 군산’, ‘삶과 문화’, ‘해상유통의 중심’, ‘해상유통의 전성기’,

‘근현대의 무역’, ‘바다와 문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출공간에 관련 유물과 영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전시물옆에 안내판이 마련되어 있지만..

사진상에 다 나온것이 아닐테니

박물관 공식자료를 인용 설명을 대신합니다 .

 

 

"구석기시대는 석기(石器) 즉 돌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최초의 시대를 말한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250만년 전에서 약 1만년 전까지 시기를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약 70만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지역의 구석기유적은대부분 금강, 섬진강 등 강가에 형성되었다.

군산의 구석기유적은 2002년 군산 내흥동 군산-장항 철도연결사업구간 제6공구 지역 지표면 3m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금강하구에 자리한 내흥동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대체로 유문암과 석영으로 만든

몸돌, 밀개, 격지 등으로 우리나라 구석기 편년 중 후기구석기에 해당한다."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의 뗀석기에 비하여 돌을 정교하게 갈아 만든 간석기가 사용된 시기로

우리나라는 약 1만년 전부터 기원전 2,000년 경까지 사이에 해당된다.
군산의 신석기 문화는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해안가와 섬에형성된 조개무지가 특징적이다.

특히 군장국가산업단지에서 20여개소의 조개무지가 발굴조사되어 군산의 신석기 문화상이 밝혀졌다.

군산 비응도 조개무지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 토기류와 함께

두개골이 없는 상태로 인골 6기가 수습되었다.

군산 가도와 노래섬 조개무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부터 회청색 경질토기까지 다양한 토기류가 출토됨으로써

군산지역 토기류의 발전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었다. "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천 년경에 시작되었는데

이전 시기(구석기, 신석기)의 도구인 석기와 달리

금속인 청동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향상되고 강력한 무력을 지닌 집단이 출현한다.

청동기시대 군산지역의 문화적 특징은 지석묘와 석관묘, 옹관묘 등 다양한 무덤이 새롭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개정면 아동리와 임피면 축산리에서는

풍화암반층을 장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판석형 할석을 잇대어 놓은 다수의 석관묘와 옹관묘가 조사되었다.

또한 오성산 등 여러 곳에서 1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고창군 등 서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지석묘의 밀집도가 매우 낮다.

아마도 그것은 이 지역의 거주민이

지석묘보다 석관묘 혹은 옹관묘를 주된 묘제로 사용하던 세력집단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

"삼한시대(원삼국시대)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전환하는 서력기원 전후부터 기원후 300년경까지의 과도기적 시기이다.
이시기 군산지역은 삼한(三韓)중 한곳인 마한(馬韓)의 54개 소국 중에서 두세 곳의 소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산의 오성산 기슭에 자리한 성산면 남전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의 구덩식 집자리 9기와 조개무지가 조사되었는데,
특히 조개무지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6세기까지 7개 문화층에서

기종이 다양한 토기류와 철기류, 골각기, 패각류 등이 출토되었다." 

 

 

 

 

 

 

 

 

 

 

 

 

 

 

 

 

 

 

 

  

조운선

"조운선은 고려·조선시대에 조운에 사용되던 선박으로서

국가에 수납하는 조세미를 지방의 창고에서 경창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던 선박을 말한다.

세곡 1,000석(현재의 단위로 160톤)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과

200석을 실을수 있었던 ‘강배’가 있었다."

 

 

 

"예전에는 군산도라고 불리웠으나 현재는 고(古)군산이라고 불리는 ‘고군산군도’에는 유무인도서 63개가 모여있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의하면,
고군산군도는 숭산행궁이라는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관청건물과 대형 조선소를 갖춘 외교와 무역의 해상요충지였다. "

 

 

 

 

 

 

 

 

 

 

 

 

 

 

 

 

 

  

 

 

  

 

 

 

 

복도와 계단에서..

 

 

 

 

 

 

 

근대생활관

 박물관의 설명 : 일제의 강압적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입니다.
근대생활관은 ‘도시의 역사’, ‘수탈의 현장’, ‘서민들의 삶’, ‘저항과 삶’, ‘근대건축물’, ‘탁본체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출공간에는 1930년대 군산의 모습을 재현하였습니다.

 

 

 

 

1930년 9월의 군산거리. 

 

 

 

 

 

 

 


"영동상가는 일제강점기 군산최고의 번화가였다.
일본인들은 이거리를 행정구역상 영정이라는 표현의 일본식 발음으로 사까에마찌라 불렀지만,
조선인들은 송방거리 혹은 송방골목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당시 이곳에서 상가를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 개성상인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풍행은 화교 왕흥신씨가 영동상가에서 운영하던 식료품 및 잡화 취급 상점이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1,200여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규모 무역상은 영화동일대에서 포목상을 운영하였으며
영동상가에는 복흥의 등의 중국인 포목상 도매상과 인성상회 등의 철물점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력거방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들은 자체적인 노동조합이 있었으며
단결력이 좋아 군산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단체였는데,
이들이 손님을 대기하는 정차방 즉, 차방(車房)은 군산에 두 곳이 있었다.
그 중에 한곳이 (구)경찰서 오거리의 영동상가 입구 (구)권사진관 자리에 있었던 하나야 인력거차방이었다.
인력거꾼들은 보통 때면 이곳에 차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손님들이 전화하거나 인편을 통하여 인력거를 부르면 달려가곤 했으며
열차 도착시간이 되면 군산역으로 몰려가 손님을 태웠다.
인력거꾼들은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옷은 검정색 일본옷에 앞면에는 자신이 소속된 차방의 이름을 썼고 뒷면에는 힘력(力)자를 쓰고 있었다.
인력거 차부는 거의 조선인이었으며 한 번 타면 시내 요금이 50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요섭의 「인력거꾼」이라는 소설을 보면 당시 인력거꾼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잘 들어나 있어
이들의 애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발가게

"경성고무는 만월표(灣月標) 고무신발이라는 고무신을 생산하였는데
그 고무신의 인기는 전국최고였다.
만월표 고무신발은 공장의 출고장에서 전국으로 운송되어 각 지역의 특판장을 통해서 판매되었는데,
군산에서는 영통의 서정길씨가 특판점으로 도매를 하였으며,
소매점중에서 최고의 영업을 하였던 곳은
 영동에서 문을 열었던 형제고무신방(방한도,방순주,방현주 형제운영) 이였다."

 

 

주류도매상

 

 "군산의 양조산업은
일본에서 양조업을 하던 일본인들이
술의 원료인 쌀의 가격이 저렴한 군산에 일찍이 눈독을 들이고 공장을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설립된 상야주조장과 암본주조장 등 주류공장의 술을 도매로 거래하는 상점들이 생겼는데,
영동상가에는 야마구찌 소주 도매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항과 부잔교

 "일제는 군산 지역에 내항철로 개설, 대형 창고와 부잔교 건립 등의 축항공사를 통해
호남지방의 쌀을 일본으로 용이하게 수탈하고자 했다.
축항공사 후, 군산내항에는 수백만석의 쌀이 산덩이처럼 쌓여 있었고
그 쌀들은 일본의 오사카와 시모노세끼 등으로 실려 나갔다.
그렇게 많은 쌀이 있었지만,
조선인들은 만주 등에서 들여온 조와 같은 잡곡류와 술찌기미 등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군산항 창고 

 

 

 

 

 

 

 

미곡취인소

 

 

 

 

 

 

군산좌


"군산극장의 전신인 군산좌는 죽성동 수협 앞 골목에 있었는데
1920년대 군산사람들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었으며,
민족운동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공연들과 모임들이 이루어지는
문화운동의 중심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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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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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던 의병운동은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는데,
당시 활약하던 군산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임병찬 의병장을 들 수 있다.
의병항쟁 이후 일제의 수탈에 대응하기 위해 개항장 군산의 조선상인들은 옥구군산항민단을 결성했고
이 단체를 매개로 하여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군산지부를 설립하여 교육 및 산업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계몽운동의 결실이 3.1만세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군산의 3.1운동은 영명학교에서 시작되었고 그해 5월까지 총 21차례 계속되었는데,
참가한 인원이 2만 5천명을 넘었다.
군산에는 개항 초부터 부두에서 하역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회사와 조합의 성격을 혼합시킨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1920년대 들어서 30여개에 달하는 다양한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활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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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이 조총은 16C-19C에 걸쳐 광범위하게 만들어진 병기로
한말 의병들의 개인화기로 이용되었다.
총열에 현(玄)자가 각인되어 있어 총이 조선후기 5군영 중 후위군에서 이용한 총임을 알 수 있다."

 

 

삼인검

"조선시대 말에 지방의 관리들이 착용하던 검."

 

 

영명학교 

 

 

 

 

 

 

 

 

 

 

 

 

 

 

 

 

 

 

 

 

 

 

 

 

 

 

 

 

 

 

 

 

 

 

 

 기증자전시실은

개인 및 단체가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기증하신 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전시실 한편에는 농민들에 의한 조직적인 대표적 항일독립운동이자

3.1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옥구농민항쟁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먼저 옥구농민항쟁 전시장부터 둘러 봅니다. 

 

"1927년 11월 옥구 서수면의 이엽사(二葉社) 농장에서 일어난 옥구농민항쟁은

가혹한 일본인 지주의 수탈에 맞서 저항한 대표적인 소작농들의 저항운동이다.

옥구농민항쟁은 이엽사 농장이 무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여

소작농들이 서수농민조합의 간부를 중심으로 이엽사 측에 소작료 인상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인 관리인이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거절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수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장 장태성을 검거했고,

지도자의 검거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명은 임피(200여명)와 서수주재소(300여명)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했다.

하지만 농민조합의 간부들은 군산경찰서의 일본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되었고,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옥구농민항쟁은 조선인 소작농이 소수의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본인 경찰에게 직접 맞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는 항일독립운동이다."

 

 

 

 

 

 

 

 

 

 

 

 

 

 

 

 

 

 

 

 

 

 

특별전 '우리땅, 그들만의 축제'


" 엽서, 지도, 간행물 등 일제강점기 시대 군산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생활유물자료 50여 점과

1900년대 군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진자료 20여 점이 전시되며,

일제시대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슬픈 역사의 참상을 담은 영상물도 상영된다.

 

 

영상자료를 한 컷씩 담았습니다.

 

 

 

 

 

 

 

 

 

 

 

 

 

 

 

 

 

 

 

 

 

 

 

 

 

 

 

 

 

 

 

 

 

 

 

 

 

 

 

 

 

 

 

 

 

 

 

 

생활유물자료

 

 

 

 

 

 

 

아까 내항길을 따라 오느라 지나친 옛 군산세관으로 가려고

근대역사박물관 앞 야외 전시물을 지나갑니다.

 

 

 

옛 군산세관입니다.

 

일제 강점 직전인 1908년 화강암 기초 위에 붉은벽돌로 지어진

국내에 남아 있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멋진 건축입니다.

조선시대 개항항구에서 국세를 거두어 들일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국권을 빼앗긴후 수탈의 또다른 상징이 되고만 건물입니다.

 

 

구 군산세관 본관 안내판 

 전라북도 기념물 제 87호.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
이건물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에 세금을 걷던 세관이 있던 곳이다.....라고 쓰여진 글을 읽다보니
문득 1925년에 발간된  '군산 개항사'에 실려있는 글이 생각납니다.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도로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도처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열하였으니....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
장미동

이름이 참 예쁘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던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나는 동네가 아니고 쌀을 쌓아놓았다 하여 장미동입니다.

 

 

 

 

 

1990년대까지 세관 건물로 게속 사용되어 보전이 잘 되어있습니다.


창고로 쓰던 건물의 외관도 보고 세관내부를 관람하려 했더니

문이 잠겨져 있고 어딘가로 전화를 하랍니다.

그런데 나 한사람 보겠다고 전화해 봤자 욕만 먹을 것 같습니다.
전시관이라고 하면서 평일 대낮에 문잠궈놓고 있는 심보에 대해 욕을 합니다.
항상 진짜는 못보게 하고 모형이나 사진등을 거창하게 전시합니다.

 

 

불편한 심사달래려

1999년에 군산세관 개청 100주년을 기념해서 심었다는

하얀 백일홍을 바라봅니다. 

 

 

 

다시 근대역사박물관 앞을 지나갑니다.

 

 

 

 

 

 

 

 

 

선종암 3층석탑에게 이제는 이곳에서 오래동안 편안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건낸후

박물관을 나섭니다.


보케리니 - 첼로와 콘티누오를 위한 소나타 6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