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쓰 가옥입니다.
공식명칭은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입니다.
이 집은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포목상이었던 일본인 히로쓰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으로
건물의 형태가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다고 합니다.
목조 2층 주택으로,
지붕과 외벽 마감, 내부, 일본식 정원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고 합니다.
안내판을 꼼꼼히 읽고 1층, 2층, 정원 그리고 건물뒤를 빙돌면서 찬찬이 둘러 봅니다.
히로쓰 가옥을 나와 동국사 방향으로 갑니다.
골목안쪽으로 원불교 월명교당이 보입니다.
이골목으로 들어가면
월명공원 3.1탑을 지나 점방산 전망대로 바로 가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길 옆으로 보이는 일정시대 군산부윤관사
1906년까지 이지역 행정기관은 옥구군 옥구감리서였습니다.
1906년에 옥구감리서를 폐지하고 군산이사청이 설치되었지요.
그후 1910년에 군산이사청이 군산부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1930년 부윤의 관사로 지어진 것인데
해방후 적산가옥으로 불하된 후 1996년 개보수를 거쳐 현재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원에는 석등 등이 있어 일식정원의 형태를 볼 수 있고
내부에는 목조 계단을 통하여 2층의 방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방에는 오시이레(붙박이 벽장)와 도코노마(방의 바닥을 한단계 높게 하여 족자나 꽃을 장식할 수 있게 한 곳)가 설치되어 있다고합니다만 ..
길건너에서 사진 한장만 찍고 지나갑니다.
동국사 가는 길
거리가 재단장 된지 얼마되지 않은 듯 합니다.
도로바닥, 건물벽 등이 깔끔합니다.
상점 간판이 조형성있는 글자로 만들어져 걸려있고
벽화도 그려져 있습니다.
빨래터, 아기 업은 소녀 등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모티브로 그린 듯한 벽화..
강원도 출신의 박수근과 군산과의 인연이라면...
그렇구나! ,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가족들과의 생이별끝에 군산까지 내려와 부두노동을 하며 지내다 1952년에 서울로 올라갔지요.
여인숙을 개조한
커뮤니티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동국사 조금 못미친 골목 안쪽으로 일본식 집이 있는데
입구에 사찰의 대문이었던 것 같은 돌기둥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동국사의 부속건물인듯 합니다.
다시 동국사 가는 길
나무로 만든 담장에는 동국사에서 출가한 고은의 시 10여편이 걸려있습니다.
동국사입구
공식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입니다.
1909년 6월 일본 조동종(曹洞宗)소속 스님이 일본인 거주지 1조통에 세운 금강선사(금강사)라는 포교소를
1913년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것입니다.
총독부로 부터의 정식사찰허가는 1916년에 받았습니다.
해방과 함께 미 군정에 몰수되었다가
1947년 불하받아 사찰 기능을 재개하면서 이름을 '동국사'로 개칭하였습니다.
이 동국사라는 이름은 '조동종의 일본 사찰로 창건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우리나라(海東國) 절이다'라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1955년에는 '불교 전북종무원'에서 인수,
김남곡 스님(1913~1983)이 공식으로 '동국사(東國寺)' 등기를 내었고,
1970년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에 등록하였습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대웅전은
일본 에도시대 건축양식이라고 하는데
창건 당시 일본에서 구워온 기와를 올렸다는 지붕은
쇼군 영화에 나오는 일본무사의 투구를 연상시킵니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을 많이 달았고,
우리나라의 처마와 달리 처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특징을 하고 있습니다.
흑백의 조화가 어떤면에서는 깔끔하게 느껴집니다.
직사각형 팔각지붕의 일본식 범종각입니다.
범종은 1919년 일본 경도에서 고교재치랑(高橋才治郞)이라는 장인에 의해 주조되어 가져왔다고 합니다.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유두가 설치된 범종의 몸통 명문(銘文)에는
범종 제작을 도운 시주자 명단과 사찰의 창건 내력,
그리고 천황의 은덕이 전 세계에 영원히 함께하길 기원하는 시(詩)도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종각에 걸린 범종이 지면과 거의 맞닿아 있는 한국의 범종과 달리 종각 지붕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고
울림을 위해 아래에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예전에는 항아리가 있었다고 하네요.
범종각은 화강암에 조각된 불보살들로 둘러싸여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삼십이응신 32기와 각 띠별 십이지 수본존 8기, 모두 40기가 있습니다.
종각주변을 돌면서 둘레의 불보살들을 봅니다.
자생년(쥐)은 자안관세음보살, 축인생(소, 범)은 허공장보살, 묘생년(토끼)은 문수보살, 진사생년(용, 뱀)은 보현보살,
오생년(말)은 대세지보살, 미신생년(양, 잔나비)은 대일여래, 유생년(닭)은 부동존여래,
술해년생(개, 돼지)생년은 아미타불.
태어난 해에 해당하는 불보살이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밀교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불교에도 오방불이라 해서 다섯방위를 지켜주는 방위불(方位佛)이 있지요.
동방만월세계 약사유리광여래불, 서방극락세계 아미타불, 남방환희세계 보승여래불,
북방무우세계 부동존여래불, 중방화장세계 비로자나불,
천도재에서는 빠짐없이
그리고 일반법회에서도 이 다섯분을 상징하는 오방불번을 세워 사용하기도 합니다.
자안관세음 뒷면 발원문
연호부분이 파여져 있습니다.
지운다고 지워질까요?
누군가의 영가비앞을 지나
다시 대웅전으로 옮니다.
절집에 들어오면 먼저 대웅전 부처님을 뵈어야 하는데
이색적인 모습에 잠시 실수했습니다.
대웅전으르 가기 위해서는 현관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일본식 복도가 이어지고 왼쪽으로 대웅전, 오른쪽으로 요사채가 있습니다.
복도에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계단은 속계와 불계를 구분한다고 합니다.
항마촉지인을 하신 석가여래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계십니다.
나무로 틀을 짜고 진흙을 발라 조성한 조선 중기의 소조불상인 삼존불은
일제강점기에도 이곳에 계셨던 것이 아니고
원래 김제 금산사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해방 후 이곳으로 모셔져 왔는데
발원문과 후령통을 비롯한 경전류 59권 등 총 333점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발원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을 지낸 벽암 각성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한국전쟁 때 소실된 순천 송광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을 제작한 응매스님이 수화승이 되어
6명의 화원이 효종 원년(1650) 조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웅전을 나오니 방들이 옆에 붙어 있는 복도 맞은편으로 요사채입니다.
꺽인 지점을 힐끗해보니 또 다른 복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웅전을 나와 대웅전 뒤 대나무 밭이 그럴듯 하다는 기억이 나서 뒤로 돌아가 보려 했습니다만
대웅전 뒤편에 붙어 있던 납골당을 1960년대 헐어내면서
당시 납골당에 있던 유골들을 수습해서 금강에 뿌린 얼마후
사전 전갈을 받지 못했던 후손들이 찾아와 대성통곡하며
납골당이 있던 대나무 밭 앞 흙을 담아갔다는 일화가 갑자기 생각나서
발길을 돌립니다.
대웅전을 다시 한번 보고
굳이 지금도 일본식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노력을 보고
가상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부질없다고 해야할지 헷갈려하며
동국사를 나섭니다.
동국사 가는 길을 되집어 나옵니다.
고은의 시를 읽으며 걷습니다.
고은 시인은 군산출신이지요.
본명은 고은태이고 군산중학교 4학년까지가 그의 공식적인 학력입니다.
중학교시절 학업에 뜻을 잃고 그림에 열중하게 되면서 화가의 꿈을 키우던중
우연히 주운 한하운 시집을 읽고 나서 그 때부터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의 참혹한 보복학살 사건들을 직접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몇 번의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하고
엿장수 생활을 하다가 군산북중학교에 국어 및 미술교사로 특채되어 교사생활을 하는 와중에
동국사에서 혜초라는 승려를 만나 학교를 사직하고 출가, 중장이라는 법명으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나의 山河 나의 삶>, <만인보> 등에 '동국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고은은 스스로 말하길 "군산 북중학교 교사 시절 혜초 스님의 불꽃 튀는 설법을 1시간쯤 듣고 멍청해졌으나
마음의 근원에서 기쁨이 일어나 틈만 나면 동국사를 찾았다"라고 회고합니다.
이 곳 동국사에서 생활하면서 군산 토요동인회에서 시인으로 활동했던 고은은
은사 혜초의 환속으로 큰 충격을 받아 1955년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그 후 혜초의 스승인 효봉 스님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법명을 일초로 바꾸고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를 써왔습니다.
효봉스님을 모시던 고은은 전등사 주지, 해인사 주지 대리도 역임했고
불교신문을 창간하여 초대 주필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그를 찾은 이종원에 의해 서정주시인을 소개 받았고
고은의 시를 읽은 서정주는 1958년 10월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泉隱寺韻' 등을 단회(單回)로 천료시킵니다.
통상 서정주 시인이 친일분자로 규정된 이후 그의 이름을 이야기 하는데 부담을 느낀 사람들에 의해
고은은 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보낸 '폐결핵"을 조지훈이 추천하여 시단에 등단한 것으로 이야기 되지만
이것은 <현대시> 입장에서는 등단을 위한 3회 추천중 1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은은 현대문학에서 3편의 시가 단회천료된 현대문학추천시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 합니다.
고은은 1963년 봄에 환속합니다.
그가 중이 된지 11년차이고 자살을 시도할 만큼 그렇게 원망하던 혜초의 환속후 8년만의 일입니다.
종교적 입장은 내가 할 말이 없고
그는 자유실천문인협회·민주회복국민회의 등에 참여하면서 70년대 선진적 노동운동에 적극 관여했습니다.
그로인한 여러 반복되는 투옥의 체험과 함께 그의 시세계는 정치사회적 문제에 직접 다가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입구에서 잠시 멈추고
우리마을 보물입니다 아래 채만식
보물이라면서 누구는 판넬 10개가 넘고
누구는 하나라...
쓸데없는 생각속에 길을 건너 다시 골목으로 들어옵니다.
언제 누구게 의해 지어지고 누구에 의해 사용된 건물인지는 모르지만
골목 골목 폐가로, 아니면 보수되어 남아있는 또는 보수 내지는 철거 중인 일본식 가옥을 둘러보며
당시의 이거리를 , 그리고 역사를 생각합니다.
사람이나 국가나 잊어 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있던 일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슬프고 추할 수록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 들여 반면교사로 삼아야만 새로운 역사를 엮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Mozart Piano Concerto No.22 In E Flat Major K482
I. Allegro
II. Andante
III. Allegro
Robert Levin, fortepiano
Academy of Ancient Music
Christopher Hogwood, c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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