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역사박물관을 나와 다시 내항길을 걷습니다.
구 일본 제 18은행 군산지점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바라보니
본 기억이 없는 건물들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일본식새건물이 많이 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낑겨서 좋게 말하면 깨끗이 단장한 건물이 눈에 보입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두고 있었던 구 일본 제 18은행 군산지점입니다
이래야 되나요?
역사의 현장, 그 중 슬픈 기억의 현장을 보존하자는 것은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에서 다시는 그런 슬픔을 겪지 말자는 다짐을 하자는 것이지
이렇게 관광시설을 만들어 그 시기에 영화를 누렸던 자들이나
그 후손들이 찾아와 그 날의 영화를 되새기도록 하자는 뜻은 아닐겁니다.
무엇을 하는 것인가를 알아보니 예술창작벨트 사업이랍니다.
100억원을 투자해
장미동에 있는 '조선은행'과 '일본제18 은행', '미즈상사', '대한통운창고' 등 5개의 근대 건축물을 원형 복원하여
이들 시설의 내부를 일제 강점기 때 쌀 수탈과 생활과정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밀 계획이라고 합니다.
쌀보리 판매체험시설이 쌀 수탈의 현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최초 계획은 2011년까지 다 마칠 계획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늦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말을 만들여 붙인다 해도
본론은
군산시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근대 건축물을 활용한 도심 재생 사업이 성공하면 구도심 권의 경기 침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새만금 관광객이 머무를 수 있는 문화관광 명소로도 주목을 받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돈이 될까요.?
어설픈 관광지 및 특산품 매장이겠지만
한때의 영화를 추억하려 또는 한때 우리 선조가 이곳에 이렇게 영화롭게 살면서 조선일을 부렸다는 기억을 상기하려는 일본인 몇명이 오거나
일본풍에 물든 한국인 몇명이 오겠지요.
과연 이곳이 그 질곡의 현장에 대한 어떤 징표가 될까요?
화가 납니다.
내가 이것을 보려고 시간과 돈을 들여 이곳에 왔는가?
월명동 월명성당 일대 부지에의 근대 역사경관조성사업까지는 그래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그 당시 민간의 영역으로
시대형 민박, 술 제조 체험장, 시대형 음식점, 일본식공원등의 생활 시설 등의 조성을 할 수도 있겠구나 했지만
여긴 말그대로 수탈의 현장입니다.
옛 조선은행
채만식의 소설 '탁류'속에 등장하는 초봉이의 남편 호색가 고태수가 근무를 했던 곳.
1923년 문을 연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사용하던 이 건물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대표적 금융시설입니다
광복 후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되다가
최근에는 소설에서 호색가가 근무하던 곳 답게 플레이보이라는 상호의 유흥업소로 사용되었었다고 하네요.
건물은 2층인데 천정이 4층 높이라고 합니다.
이 건물도 보수공사를 합니다.
가름막 사이로 안을 들여보다가 출입이 가능한 곳이 있어서 가림막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보수공사가 아니라 골격만을 남기고 내외부 모두 다시 짓고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을 모두 부수고 1923년 최초 지어진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모두 지워지고 새로 건축된 옛 건물...말이 되나요?
2012년에 지어진 1923년형식의 건물인것이지요.
불에 타서 아니면 어떤 천재지변으로 없어진 건물을 필요에 의해 다시 세울때는
최초의 형태로 복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보수로 가능한 건물을 왜 이렇게 하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관광객들이 더 많이 와서 더많은 돈을 벌어 주나요?
아닐겁니다.
호남평야의 쌀이 통째로 일본으로 실려가는 조선 최대의 흑자무역항이자 호남최대의 도시를 자부하던 군산에서
이곳의 조선인들은 어떻게 삶을 이어갔을까요?
농민들은 오히려 더 가난해졌으며 그래서 끊임없는 소작쟁의가 일어납니다.
항구에서는 거듭된 축항공사로 선적량이 늘어 일본인 무역업자들의 수입은 크게 늘었지만,
조선인 노무자들의 노임은 오히려 줄어들어 부두노동자. 미선공들의 노동쟁의가 잇달았습니다.
일설에는 중간에서 쌀을 거두어들이고 노무자들을 관리하던 조선인 거간꾼과 십장들이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등골을 빼먹었다 합니다만...
지금 만들어 지고 있는 이러한 단지들도 결국 주민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많은 예산을 엉뚱한데 쓰고
그 결과는 미약하여 주민들의 삶만 더 피폐하게 되는 것 아닐까 걱정됩니다.
청소용역중이신 듯 한 아주머니인부 한명이 어디선가 뛰어나와 어디를 들어오냐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얼음처럼 그 자리에 멈추었습니다.
1923년경에도 이자리에 있었을 이 나무에게 그 간의 경과를 물어보다 쫒기듯 돌아나옵니다.
군산화물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아예 없어져 버린 구 군산역을 지나왔을 철길의 흔적을 넘어 갑니다.
1999년 5월 조성된 개항백년광장
일체 유심조
마음이 편치 않으니 그냥 썰렁하게만 보입니다.
주변을 빙 돌아보며 눈에 들어오는 데로 사진만 찍습니다.
미두장 빗돌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냥 지나치며 새만금에 대한 기대를 봅니다.
뜬다리라 불리우는 부잔교
네개의 다리를 건설했는데 세곳이 남아있습니다.
그 중 하나
물이 들어와 수면이 높아지면 올라오고 물이 나가서 수면이 낮아지면 내려갑니다.
지금은 내려가 있습니다.
수탈을 하는 것도 머리를 써야 하지요.
뜬다리 시설로 선적에 따른 비용과 시간이 줄어들고 선적량은 갈수록 늘어납니다.
지금은 뜨지 않은 뜬다리를 건너 갑니다
넘어와서 보는 부두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한 진포해양테마공원, 그 안내판입니다.
진포 대첩이란 고려 우왕 6년(1380)에 금강하구 진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크게 이긴 싸움을 이야기 합니다.
나세(羅世), 최무선 등이 전함의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 500여 척을 격파하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이 진포대첩을 재현하는 행사를 군산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 당시 진포가 어딘지에 관해서 전라북도 군산과 충청남도 서천 간 갈등이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 해양테마공원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안내판에 쓰여 있기로는 고려말 최무선정군이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을 기념하여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의 체험학습의 장으로 활용 bla..bla..bla..
쉽게말하면 퇴역 군용장비 모아서 아이들 놀이공원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뜬다리앞을 지나고 ...
어린아이같은 호기심으로 몇군데 기웃거려 봅니다.
세번째 뜬다리
오른쪽으로 연해있는 말그대로의 녹슬은 기찻길을 흘싯 보고
다시 바다를 봅니다.
물빠진 갯벌,
아랫도리를 들어낸 민야암 등대가 있고
그 모습이 민망한지 배들은 저만치 나가 있습니다.
무심한 잡초속 철길의 흔적을 넘어...
눈에 계속 뜨이던 무너져가는 창고건물로 다가갑니다.
공연히 기웃거리다 험한 꼴 당할것 같아서 멀리서 사진 한장 만 꾹하고 갑니다.
군산 구불길중 금강하굿길 표시가 그려져 있는 포구로 통하는 수문이 있습니다.
이 수문의 안쪽이... 사진찍는 이자리가 지금은 복개 되어 없어진 째보선창이라는 포구가 있던 곳입니다.
째보선창 안내문
째보선창은 옛 '죽성포구'를 일컫는 것이고
금강의 줄기가 백마강쪽으로 뻗어나가다 살짝 옆으로 째져서 흐르고 있는 곳에 선창이 있었으므로
"째보선창"으로 불리운 곳입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름의 유래가 하나는 포구의 지리적 특성에서 온 것이고
또하나는 힘센 째보가 이곳을 주름잡아서 그리 불리었다라고도 합니다.
'선창은 분주하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웅긋쭝긋 떠받고 물이 안 보이게 선창가로 빡빡이 들어 밀렸다.
배마다 셈 세는 소리가 아니면 닻 감는 소리로 사공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 속같이 분주하다….'던 탁류속의 째보선창과
만세사건으로 도주하는 학생을 쫓아 집에 들어온 일본순사의 총뿌리에 맞아 큰 흉터가 생기게 되자
세끼야로부터 버림을 받아 이 선창가에서 떡장사를 하는 아리랑속의 보름이를 생각하는데
째보선창 주모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거기다 (배)대고
아 이놈들아
어서 술 먹으러 올라와
술국 끊였다
이 씨부럴 놈들아 어서 와…'(고은, 만인보, '째보선창 주모' 일부).
고은의 만인보에서 째보선창 갑술이를 불러옵니다.
"그렇지
째보선창 갑술이 모르면
그 갯냄새 몰고 다니는 갑술이 모르면
군산 사람 아니지
군산 손님 아니지
언제나
째보선창에서
제 5 부두
제 3 부두
제 1 부두 지나
도선장까지 해망동까지
갯바람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절뚝거리는 갑술이
금강 하류
물새 아비인가
물새더러 야자 불러대고
사람이 길 물으면
어김없이 딴 길 일러주고
혼자 낄낄거리는 갑술이
누구한테 한대 철부덕 얻어맞고도
낄낄 웃어대는 갑술이
선창가 가게주인
간밤 술타령으로 깜박 조는데
그런 때 놓칠세라
슬쩍 궂은 손짓 하다가 들켜버려
빗자루 막대기로 실컷 얻어맞고 나서도
낄낄 웃어대는 갑술이
빡빡머리에 큰 도장밥 나서
나이 쉰살 처먹고도
그냥 열대여섯살 그대로인가
이어온 조상 없고
이어나갈 자손 없는 갑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갑술이
경인년 홍수 나서
불 지나간 데는 자취 있어도
물 지나간 데는 자취 없는데
그런 큰물 진 뒤의 해망동 거리
단 한 사람 낄낄거리는 사람 갑술이
가재도두 다 떠내려보낸 사람들
집 무너진 사람들
가슴 쥐어뜯으며 울부짖는데
단 한 사람 낄낄 웃어대는 갑술이
오 그대 해동 공자인가
공자의 사촌
천치 백치인가
낄낄거리는 갑술이 째보선창 갑술이...."
큰길로 가면 채만식 소설비가 있고
그리 쭉가면 나름 유명한 중국집이 있을텐데...
그리고 옛 철길을 따라 경암동을 가야지 했는데....
생각만 하다가 구불길 표지를 따라 왔는지,
애처로운 나무와 꽃 따라 왔는지 골목길을 걷고 있습니다.
경포천 넘어.. 화력발전소가 보입니다.
구불길 표지따라 경포천 다리로 나왔습니다.
경포천자락에 기대어 있는 소규모 선박수리소 몇곳
생계는 유지되나 모르겠습니다...
주제넘은 생각...
너보다 돈 많다.
그러니까 수리소를 유지하지....
광애만방
화력발전소들의 필요를 과시하는 글일겁니다만
사랑 애자는 힘력자로 바꾸어야 할겁니다.
68년도엔가 준공한 공장인데
해수오염과 공해발생등 여러가지 이유로 민원이 끊이지 않자 2008년인가에 폐쇄한다고 온동네 소문을 내더니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복합발전소로 바꾸어 2010년도에 다시 가동을 하는 곳이지요.
천연가스(LNG)를 연료로 사용해 환경오염이 없고 안전성이 높다는 것인데
서천쪽으로 나가는 배출수에 의해 해수온도가 높아져
서천군 어민들은 피해가 막심한 것 같습니다.
법원판결에서도 숱한 절차적 하자가 나타났지만
서천군쪽 피해보상요구에 눈과 귀를 막고
도리어 공기업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 고압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한때는 서천군 어민들이 해상에서 집단행동에도 나서기도 했지만
해상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공장이 있는 군산쪽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으니 대책이 있을리 없지요.
그리고 군산경찰서가 바로 앞에 있으니 발전소앞에서 시위하면 금방 해산될 겁니다.
맨드라미
통상 닭의 벼슬처럼 펴져 있는데
이아이는 꽁꽁 뭉쳐 있네요.
...거짓말처럼 어제의 젊음도 죽고
계절이 비켜가는 골목은
언제나 외롭고 적막한데
가슴은 저 홀로
천지에 진홍빛 물들이다가
눈물로 영글어 가는 덧없는 그리움...
갑자기 생각난 지은이도 모르는 시 맨드라미연가의 한구절입니다.
경암동입니다.
이 건물들 바로 뒤로 철로가 있습니다.
원래 바다였던 경암동 일대를 일본인들이 매립해 방직공장을 지었고
1943년 근처 조촌동에 제지공장 북선제지(지금의'페이퍼코리아')가 설립되자
원료와 제품을 수송하기 위해 군산역으로 부터 2.5Km되는 조그마한 분선이 공장까지 이어졌습니다.
해방 후에는 이일대가 거의 나대지이고 땅주인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갈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말 군산선이 장항선과 연결되면서 전북 군산역은 군산시 내흥동으로 옮겨갑니다.
옛 군산역은 화물 업무만 맡다가 반 년 뒤 역사마저 철거해 버렸지요.
하루 한 차례 이지역을 지나가던 페이퍼코리아 화물열차는 이에 맞춰 신문용지 수송을 트럭에 넘깁니다.
어떠한 기차도 운행하지 않는 기차길이 남은겁니다.
그후 북군산IC로 가는 왕복 6차선 도로가 이 철길 바로 옆을 지나가니
도로와 철도 사이 약 10m 남짓 남은 공간에 일렬로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기찻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더이상은 갈수가 없습니다.
뒤돌아보고... 멤돌아보고...
구암 3.1로라고 이름지어진 길을 걷습니다
이유없는 막연함, 그리고 그리움
구암공원 임시개방안내문을 보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나중에 무엇을 조성하려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산책로 뿐이 없습니다.
결국 빠른 길 놔두고 빙돌아서 구암교회를 온것이지요
지금의 구암교회와
군산 3.1운동 사적지인 옛구암교회에 관해서는
군산 첫 포스팅할때 이런 저런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사진속의 안내문을 참고하세요.
구암교회를 다시 한번 보고
마을길을 질러 강변으로 갑니다.
진포시비공원
군산 또는 그 일대를 모티브로 하거나
군산과 그 인근출신 시인들의 시로 엮은 시비공원이려니 했는데
유명한 시들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좋은 시들이지만 그냥 아쉽네요.
그래도 한때 암송했던 기억에 하나하나 둘러봅니다.
전주에서 여기까지
문교수가 차를 몰고 달려와 주었습니다.
금강하구둑을 차로 넘습니다.
장항
나름 유명하다는 먹거리골목에서 오늘의 걸음을 멈춥니다.
Maurice Ravel
Argerich(Gaspard de la N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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