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종달리

하늘타리. 2011. 8. 18. 15:15

종달리 입니다.


종달리 동중동 길에서 보는 지미봉. 

 길을 나설 때의 생각은 

금붕사 앞 정류장에 내려서 신속곶으로 연하는 지역에 堰堤를 쌓아 논을 만들었던 지역을 보고

설촌과 관계있다는 경주김씨 제주 입도조 김검용의 방묘도 들러보고

이영조효자비앞을 지나

양천 허씨 제주 입도조 허손의 묘를 갔다가

씨사이드팬션 옆길로 해서

시흥리와 종달리 경계선에서 마을과 해안의 답사를 시작하려 했습니다만....


한정거장 더 와 종달리교차로에서 내리고 나니

확 밀려오는 더운 기운에 빠꾸하기싫어

동중동쪽으로 바로 왔습니다.

 

신착개 앞바다의 간척사업옛터라는 표식과

종달리패총이라는 안내문이 서 있습니다.

 

간척사업옛터  

1899년 채구석에 의해

갯벌을 막아 농토로 이용하고자

지금의 금붕사앞 신속곶에 둑을 쌓아 논을 만들었으나

 海水가 땅 밑으로 계속 솟아올라와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조천사람인 전 구례현감 송상순이 매입하고

이중으로 둑을 쌓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바다 쪽은 양어장, 일주도로쪽은 수답을 완성하였지요.

송상순은 다시 함덕 사람에게 매각하였고

그 후 수리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고 관리 또한 소홀해지면서

논은 차츰 습지로 변했다. 라고 하네요. 

 

종달리패총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지점에서 약 500미터쯤 되는 곳의 모래무지를 발굴하는 중에

이곳에서 이런저런 토기류와 숫돌, 갈돌등

철기시대에서 탐라시대전기에 이르는 유물이 발견되었던 곳입니다.


동중동마을 뒷동산에 있어 마을사람들이 뒷동산당이라부르는

종달리본향 오막개당입니다.

 본풀이에는 온평리 본향에서 가지갈라모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맹오부인을 모신다고 보면 되는 데...

마을분들이야기로는 백주노산주라는 본향당신을 모시고 있고

카름 산짓당이 없어지면서 산짓당 일뤠할망을 함께 모신다고도 합니다만...

당에 다니시는 분들에게 여쭈면 그저 자손들 잘 그눌러달라고 빌러가는 할망당입니다.

  문이 잠겨 있습니다.

굉장히 아쉽네요.
안에 들어가면 2단으로 된 시멘트 제단 중앙에 당신을 모신 櫃가 있고

그 궷집안에 옥색한복을 입은 남신과 색동한복을 입은 여신의 상이 있습니다.(있었습니다)


아쉬움에 뒤돌아 보고...

 

 

 

 

 

 

패총입니다.

 1991년경 하도리로 연결되는 도로를 개설 중에 대부분 파괴된 후 발굴한 곳이지요.
두개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다하는데

제1문화층은 기원전 1세기경 육지에서 유입된 점토띠토기 등의 유물이라 하고

제2문화층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에 걸친 석촉과 철촉 등의 유물이라 합니다.

 

조개라도 하나 볼까 싶어 안내문 뒤로 올라가 보니 콩밭입니다.

 

 

 종달 논길로 들어갑니다.

 제주도 제염의 효시인 동시에 소금생산의 주산지였던 종달 염전이 있던 곳,

그 염전이 바뀌어 수답이 되었던 곳,

지금은 갈대만 무성한 곳 옆으로 난 길입니다.

 

 아주 일부지역에서 밭벼가 자랍니다.

 

 정미소

마을사람들이 계속 찾으시나 봅니다.

 중동이라는 마을이름은 종달리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동산동네라 하였다 하고

이 부근에 향사역할을 하는 都家집이 있었다하나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비석거리입니다.

새밧디에서 연결된 마을 가운데 삼거리 지점으로

'69년 5월에 전화 사업에 도움을 준 재일교포 姜平年·高長汝의 송덕비가,

'70년 2월에 수답을 완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 준 제15대 제주도지사 구자춘의 송덕비와·제12대 북제주군수 김인화의 공덕비,

그리고 '73년 7월에 수도 시설에 도움을 준 재일교포 玄圭奉·金泰權의 송덕비가 세워지면서

이 곳을 비석거리라 부르고 있습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2)에

'강려 목사가 종달 해변의 노지를 보고 도민들에게 해염 생산법을 가르쳐 소금을 만들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한국수산지 제3집(1910)에

'조선 중엽 1573년 강려 목사가 종달리 해안 모래판을 염전 적지로 지목하고

이 마을 유지를 육지부로 파견하여 제염술을 전수케 하여

제염을 장려한 것이 제주도 제염의 효시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1900년대 종달리 마을 3백53호 가운데 1백60명이 제염에 종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가 46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제염에 참여하려는 인구가 대거 유입됐던 동동은 당시 '큰 동네'로 불리웠고,

주민들은 '접'을 만들어 제염을 위한 가마 구입이나 사용을 공동으로 대처했다고 합니다.
염전조성, 해수운반, 연료채취 및 운반, 전오(煎熬) 과정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종달리 사람들을 일컬었던‘소금바치'라는 말은 이처럼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한데서 연유했다고 하네요.

 

이곳 천연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은 조정에 진상은 물론

전라도 지역까지 보내졌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고 합니다만

종달 제염업은 해방 후부터 육지부 천일염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수지를 맞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염전지를 수답으로 바꾸는 공사를 1957년부터 시작하였으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공사가 답보상태를 거듭한 끝에

1969년에 드디어 32ha의 옥토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金仁和 북제주군수는

사업의 진두지휘를 위하여 날마다 종달리 현장에 나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기 때문에

'종달리군수'라는 별칭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이 사업은 제주도의 간척지 사업으로 성공된 첫 케이스였습니다만

좋은 의미에서의 제주도와 육지간 물류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육지에서 쌀을 사먹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냥 버려진 땅이 되어

지금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갈대만이 무성합니다.

 

허망한 마음으로 김인화공덕비 뒷면에 쓰여진 글을 옮겨 봅니다.
“바닷물 밀려들던 옛날 갯벌이 황금빛 물결치는 옥답이 되어 풍년송 하늘 높이 울려 퍼지니 높으신 그 은덕의 보람이어라.

이 기쁨 잊지 않고 언제까지나 자손만대 길이길이 간직하리라. 

여기 버려졌던 넓은 갯벌에 영글은 벼이삭이 넘실거리고 보람찬 새 희망의 꿈을 이루니 높으신 그 은덕의 보람이어라.

이 희망 길이길이 언제까지나 자손과 더불어 간직하리라”.

 

  

옛 소금밭 갈대숲 너머로 지미봉을 바라봅니다.

지금은 地尾峰이라 합니다.
그래서 제주의 서쪽 한경면 두모리를 '섬의 머리'라 하고

동쪽 끝의 이 오름을 '땅 끝'이라 한데서 地尾라 했다 하는데

조금 애매한 설명입니다.
지미라는 이름이 나오는 가장 오래전 기록인

세종 21년(1439년) 2월에 按撫使 韓承舜이 임금에게 防築計劃과 여러 조건을 보고한 서찰에서는 

 只未烽燧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只未가 이런저런 변화를 거쳐 地尾로 바뀌었다는 것이 되지요.
지미라는 음가를 가진 어떤 제주어를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이런 저런 한자가 쓰였다고 보아야지

땅끝이니 어디니 하는 말은 조금 삼가하는게 좋을 듯합니다.


내친김에 종달이라는 이름도 한번 살펴보지요.
제주목의 끝 마을, 즉 통달함을 마친  마을이라 종달이라 이름하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숙종 때의 제주목사 이형상의 耽羅巡歷圖와 南宦博物을 보면 종달은  旌義境에 속해있습니다.

당연히 地尾烽燧와 終達烟臺도 水山鎭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고종 8년(1874년)에 제주목사 이밀희가

제주도의 행정구역 관할 변경 시에 구좌읍으로 편입시켰던 것이지요.
제주목의 끝 마을로 설촌된 마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차라리 끝을 강조하고 싶으면 정의현의 끝이라고 했어야 하지만

 제주목의 끝이라는 것과 가치가 다르다 보니 굳이 제주목의 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종달이라는 이름의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은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1984)에 나옵니다.

"鍾처럼 생긴 산(지미봉) 밑이 되므로 鍾達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조정 이후 終達으로 표기 되었다."

 

 

 청강사라는 절집입니다.

청강보살이라는 화주가 절을 지었다고 해서 청강사입니다.
무종파사찰이지요.
제주도의 절집수가 2010년 기준으로 250곳이 조금 넘는다 하는데

 태고종이 약 80개소, 조계종이 약 70개소, 일붕선교종이 약 30개소, 법화종이 약 20개소, 원효종이 약 10개소,

천태종, 아미타종, 용화종, 총화종, 일승종, 진각종, 수운교

그리고 무종파 절집이 몇 곳씩 있습니다.
종파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무종파는 어쩐지 생소합니다.


연못속에 노니는 자라를 보다가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을 뵙습니다.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서가모니불

천상천하 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

 

 

  

 

 

 

법당을 나오는 길에 고색창연한 달력이 걸려 있기에 다가가 보니 금년도 달력입니다. 

요새도 이런 달력을 만드는 군요.
윗부분 왼쪽 전화번호 옆에 주지000 부전000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일본인 부전스님도 계시구나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아려오는 어떤 말이 생각납니다.


"주지 아니고 부전"이라는 말인데...

주인이 아니고 나그네라는 우울한 말입니다.
유나스님, 강사스님, 원주스님... 여러 가지로 불리우지만

개인 절집에서 주지가 아니면 다 부전이지요.
사실 부전스님이 모든 일을 다 맡아서 합니다.

새벽 예불에서부터 시작하여 청소까지 각종 일을 도맡아 할 뿐만 아니라 잦은 일을 다 하는데
이런 개인절의 부전스님은 절집이 어렵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절을 떠나게 되면

결국 객승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주지스님이기를..... 

 

 

 

조개왓을 지나 시흥리와 종달리의 경계지점으로 왔습니다. 

 

 우도와 성산을 보고

 

  해안도로를 따라가려다가

다시 조개왓으로 돌아갑니다.


성산리와 종달리의 경계지점인 말미오름이 보이는 군요.

 

 

 

 

 

 

돌아가는 이유는 조개왓 틀목 일뤠당을 가보려고요...

 최근 마을 답사시에 너무 당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이것을 민속이라고 구분하기도 어렵지 않느냐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피해 다니듯 했습니다만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지만

또 그 옆을 지나면서 피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싶어 되돌아갑니다.

 

 조개왓 틀목 일뤠당이라는 이름처럼

틀목서편한집을 모시는 당입니다.

 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전수물당이 없어지자

전수물일뤠중저도 이곳에서 같이 모신답니다.

 

 

 큰 바위를 신체로 모시고 좌우 나뭇가지에 물색을 걸었습니다.

 

 

 


당을 나와서 말미오름을 한 번 더 보고

마파지 일대 옛 관로시설옆을 지납니다.

 

 
해안도로를 걸어갑니다.
구좌올레1길 안내도가 있습니다.

 설명과 사진 속에 월정리에 있는 당처물동굴이 있습니다.
못 들어가게 하는지 알았는데 들어가 볼 수 있나 봅니다.
빠른 시간 안에 가봐야 겠어요.

 

소금밧개입니다.

소금밧을 드나들던 조그마한 배들이 머물렀던 흔적이지요.

이렇게 저렇게 막혀 있어서 지금은 아무쓸모가 없습니다.

 

 

감태로 차선을 그은  모래밭을 걷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걸어가다 다시 포장도로로 올라왔는데

풀밭사이로 불턱의 흔적이 보입니다.

 

 

 다가가 보니 불턱을 둘러싼 담장 안에 또 다른 구덩이가 있습니다.

 돌로 잘 마감한 것을 보니 어떤 용도가 있었을 텐데 ...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그 뒤 만난 마을어른 들에게 물어도 그런 것이 있는 것 자체를 모르더군요. 

 

모래와 

빌레와 

해초위를 걸어서 

 

해안선을 따라가다가

용천수가 있네 하고 다가가 봅니다. 

 누군가가 감태를 쌓아 놓았습니다.
흐르는 물에 행그려고 하는 가 봅니다.


물의 근원을 찾아보니 용천수가 아니고 길 건너편 양어장에서 배출되는 물입니다.

 

우도의 긴 몸체를 훑어보고

 

바닷가 암반위에 있는 불턱으로 다가가면서 주변 사진을 찍습니다.

 

 

 

 

  

 

 

 

 

 

 

 

 바닷가를 지키는 해녀상

 

 

 

소금밭으로 가는 배를 썰물 동안에 매어두었던 자리라는 뜻의

자리코지에 의지하고 있는 산하포구입니다.  

 

 

 

 

자리코지에 올라 두먼이개를 봅니다.

 

지금은 종달항이라 불러야 겠지요 

 

 

 

 

 

 다가가다 뒤돌아보고...

 

옆에서 같이 걸어주는 지미봉에도 고맙다하고 

꼬닥 꼬닥

 

앞으로 앞으로

 

종달항으로 우도도항선이 들어옵니다. 

차를 가지고 우도를 들어 가실 때

성산항보다는 이곳을 이용하시는 게 더 좋을 듯 합니다.
종달항은 우도 섬이 가장 크게 보이는 곳입니다.
나오실 때는 성산으로 가셔도 되고요. 

 

 

 이 포구는 종달리에서 가장 중요한 포구입니다.

1800년대에 작성 된 지도에는 斗元浦로 표기되고 있었습니다만

마을사람들은 통상 두문포구 또는 두먼이개라고 부릅니다.
포구중앙 검은여를 중심으로 좌우 두 곳의 문이 있어서 두먼이개라고 한다고...

 마을어른들은 말씀하십니다.

 

 

 

 

두원포연대가 보입니다. 

 

 그리고 바위위에 올라앉은 난파선...

이 아니고...전망대

 

사진에서 식별은 않되지만

전망대 앞 바위에 돈짓당이 있습니다.

 

두원포연대로 올라가는 길 우측

 해안도로방향으로 자연습지가 보입니다.

 주변이 전부 개발 중이니 곧 없어질 풍경입니다. 

 

지미봉수와 두원포연대

 

두원포연대에 올라갑니다. 

 

 

 

 

 

 연대윗부분에서 보는 주변 풍광

 

 

 

 

지금의 나는 풍광으로 즐겼지만

그 어느 땐가 이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는 공포일수도 있었을 겁니다.

 

기록에는 남쪽으로는 오소포연대, 북쪽으로는 입두연대와 교신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입두연대와는 직접 교신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잘못알고 있나 싶어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 봅니다만 그 내용은 적혀있지 않네요.

공식명칭이 두원포연대인데 1999년 복원하면서부터 종달연대라는 명칭을 씁니다.
사용은 안하면서 이름만 바꿔놓은 것이지요.

 

 

다시 해안도로로 내려 왔습니다. 

 

 

 생개납 돈지당입니다.

 

 

 

 어부와 해녀를 관장하시는 용왕과 선왕을 모시고 한 때는 요왕제를 지내던 곳입니다.
지금은 잠녀들이 찾아와 물질 때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쥐똥나무 앞에  잔돌들을 모아 정성 드려 제단을 쌓은 것을 보니

그 간절한 바램에 마음이 울컥해집니다.

  

 

 

 

조금은 치졸한 듯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전망대에 오릅니다.

 문득 내가 지금 사진기를 들고 서있는 이지점,

전망대를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진 천막식당은 어디로 갔을까?
돈을 벌고 떠났을까?
아니면 돈이 않되서 접었을까?
전망대를 오르며 주변을 둘러봅니다.

 

 

 

 

 

 

 

 

 

눈에 들어오는 바위마다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면서 바닷가를 걷습니다. 

 

 

 

 

 

 

 

 

 

또 하나의 전망대

올라가서 한번 둘러보고 

 또 걷습니다.

 

 

 

 

 

 

 

 

 

 고망난 돌

 커다란 돌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고망난 돌이라 부릅니다.

 그 고망사이에 바다가 있습니다.

 

간절한 바램이 서로 의지하여 하늘을 향하고 있고

쪽빛 바다가 그들을 응원합니다.

 

 

 

 

 

 

 

 

 

 

고망난돌 쉼터입니다.

 고망난 돌과는 꽤 떨어져 있습니다만 그 이름을 같이 쓰고 있는 곳이지요.

 

 슬프도록 아름다운 곳

 그러나 이 길을 지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목적지까지 급하게 달려갈 마음에 놓치고 지나가는 곳

 

 

 

 

 

쓸쓸한 벤치에 앉아 자연의 조각품을 봅니다. 

 

 

 

 

 

 

 

 

 

 

 

용목잇개로 가다가 뒤돌아보고 

 

옆을 보고

 

 앞을 보고

 

방조제 넘어 하도리를 보다가

 

 침팬지와 곰이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봅니다.

 

방조제 갑문

 그 위로 내려앉는 석양

석양아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방조제를 건너지 않고 용목잇개 남쪽으로 가려 했습니다. 

 용목잇개 주변에는 성창여, 용목잇개, 숭에통(숭어가 많은 통),

서느렁이(우물), 신착개, 물개, 성창마루(해변), 대조개코지 등이 있습니다.


용목잇개 남쪽 성창여와 성창마루가 있는데 그 옆으로 해서 신착개자리까지 가려 했습니다만...
사람들이 않다니는지

포장도로끝난지점에서 부터 작은 길이 있던 자리에는 잡초만이 무성합니다.

 

다시 방조제로 나와서 방조제를 건넙니다.

 

 

 

관광안내도 간판앞에서 하도리 창흥동 마을 안길로 들어갑니다. 

 

철새탐조대 

새들도 다 집으로 돌아갔나 봅니다.

물새 없는 물길건너 지미봉과 말미오름을 봅니다. 

 

 

 

 

 

버려진 마을물통 두 곳을 지나

 

 

마을길옆 꽃들을 하나하나 찍어주고

 

 

 

 

 

 비어있는 옛창고를 지나
큰길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한걸음도 더 옮길수 없는 지친다리를 쉬면서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오늘의 답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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