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읍 금성리와 한림읍 귀덕리 사이에는 예전 정짓내라고 불렸던 금성천이 있습니다.
정짓내를 건너와서
몸을 돌려
귀덕리 마을 동쪽 바닷가에서 옆마을 금성리포구를 바라보고
다시 몸을 돌려 복덕개앞 큰여의 거북등대를 쳐다본 후
오늘의 답사를 시작합니다.
귀덕리에는
지금 거북등대가 있는 큰여와 그 앞 작은여가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이것을 石淺島(석천도)라고 불렀으며
마을 이름을 석천촌(石淺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서기 1300년 고려 충렬왕 16년에 제주도에 대촌을 제외한 14縣을 설치할 때
中國 重慶지방의 지명을 따서 歸德縣으로 이름 붙여졌고
그 후 서기 1609년 광해원년에 懸制를 폐지하고 坊里制를 실시하면서 귀덕리가 되었습니다.
일제치하에서는 귀덕리를 4개 區로 분할하여
1區에는 사동, 하동, 중동을
2區에는 장흥동과 장라동을
3區에는 성로동과 신서동을
4區에는 마흘동과 다교동을 합하여
행정을 구분하였다합니다.
서기 1945년 해방이 되고
서기 1946년 8월 1일 제주도제가 실시되면서
서기 1953년 10월 장흥동 장라동이 귀덕2리로 분리되었다가 통합, 또 분리되었으며
1963년 마흘동과 다교동이 분리되어 新興里로 불리어 오다가
1997년 5월 1일 신흥리가 다시 귀덕3리로 개칭되었습니다.
정짓내넘어 하동 바닷길가에
일붕선교종에 관련되는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이 앞의 가옥이 일붕선교종소속 사찰인듯 합니다.
절이름은 청호사입니다.
일붕선교종은 일붕 서경보 스님께서 조계종에서 독립해서 만드신 종파입니다.
제주출신으로 불국사주지를 지내시기도 했던 일붕 서경보 스님께서 선교종을 만드시고 초대법왕이 되셨습니다.
그 당시 특히 제주에서는 꽤 많은 사찰이 일붕선교종에 적을 두었었는데
1996년 여름에 일붕선사가 열반하신후
많은 절집의 적이 바뀌었는데 이곳은 계속 일붕선교종을 유지하고 있는듯 합니다.
들어가서 부처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절집앞 길옆에 물통이 있습니다.
썩은 해초만이 가득합니다.
바닷가로 내려가 봅니다.
용천수가 있습니다.
이곳도 더 이상은 쓰이지 않고 들고 나는 바닷물에 그 형태가 없어져 갑니다.
1966년의 어느날 정성드려 작은 자갈로 새겨놓은
豊麗水란 글귀가 마음을 안쓰럽게 합니다.
용천수물통옆에서 보는 거북등대
그리고 빨간 보조등대
하동마을길을 지나...
동포구로 갑니다.
동포구에서 보는 큰여, 거북등대
귀덕1리를 대표하는 풍경이지요.
자리돔잡는 그물
마을길을 따라가다 본 무너지는 옛집
그집과 바다를 경계짓는 담이 회곽도까지 갖추어진 환해장성 입니다.
큰이물
식수통과 빨래하는 곳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귀덕리 해안 어디서나 바다를 보면 보이는 거북이
복덕개
영등할망이 들어오는 곳이랍니다.
영등할망은 그 해의 바다밭에 뿌려질 씨를 가지고 오십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이름이 한 때는 큰개였습니다.
지금으로보면 보잘것없는 이곳
사람들은 영등할망이 오시는 것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예 아마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래서 이옆에 해모살당을 다시 지어놨지만
이곳 귀덕에서는 영등에 관한 신앙행위가 없습니다.
어느 누군가는 영등신화에 나오는 복덕개가 이곳이 아니고
지금은 없어진 수원리영등당앞 바닷가라 합니다.
그곳은 포구이름이 변천되었고 이곳은 비슷한 이름이 남아서 이곳으로 착각되는 것인데
설화속에서도 분명히 조물캐복덕개라 나오지
그보다 일찍 설촌된 마을인 귀덕리복덕개가 아닌 것이 그 증거라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마을상징도 영등과 관계없는 거북이등대이고
이곳 귀덕리 당도 영등과는 상관없습니다.
하동을 나와 일주도로로 접어들기전에 집
언제쯤 지어졌을까? 하며 의미없는 사진을 찍고...
일주도로 건너편 농협창고
귀덕초등학교버스장류장입니다.
길을 건너기전에는 초등학교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농협건물옆에 귀덕1리 설촌유래가 서있어서 그것을 보느라 진행 방향이 틀어졌습니다.
절골에 있는 밭입니다.
고려말까지 절에서 일하는 사람이 70명에 이르는 큰 절이었다는
구정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곳입니다.
예전에 밭 가운데 부분에서 큰 주춧돌같은 것을 본 기억이 있어서 찾으러 갔지만 찾지못하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을 주어 흐르는 물에 닦아 봤습니다.
보아도 모르니 다시 밭 주변에 던져두었지요.
잣질동네
동네입구 옛 예배당 건물입니다.
밭을 개간 하면서 일구어 낸 돌들을 넓게 쌓아 밭의 경계도 만들고
그 위를 걸어 다닐수 있도록 잣길을 만든 동네라하여
이 마을을 잣질동네(城路洞)라 부릅니다만
남아있는 곳도 드믈고
다른 곳에 또 있나 알아보려 그날 만난 어르신 중 그 누구도 관심이 없습니다.
연화못옆으로 왔습니다.
못은 않보이고
그 못을 정비하고 넓히는 데 힘쓰셨다는 분의 시혜비가 넓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을 잘못 썼는지 고친 흔적이 있습니다.
비석 건너편 가림막이 처져 있고 잡풀로 덮혀있는 저 철문속에 못이 있습니다.
어찌 어찌 안으로 사진기를 집어 넣고 일부를 찍습니다.
이곳도 지금이야 이렇듯 대다수가 매몰되어 보잘곳 없고
차라리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만...
설촌당시에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밭작물 모두의 생명의 젖줄이었습니다.
조인철 효자비입니다.
한림읍지 내용을 옮깁니다.
趙仁哲은 歸德人이라.
어려서부터 孝行으로 稱하더니
父母喪埋코 그 墓所에서 慰靈寬人을 3년을 지내니
鄕民이 感動하여 上典하니
孝子完文을 내리우니
高孫明允이가 귀덕리 長興洞 路上에 旌閭를 建立하다.
언제적 이야기인지를 모르겠습니다.
1941년도에 세운 비석입니다.
길을 따라 조금 북쪽으로 내려가면 어느 무덤 산담밖에 서있는
효부조씨열녀비
그 인근 소나무숲
마을안길 보호수
그 그늘아래
쉬었다 갑니다.
귀덕1리마을회관앞입니다.
마을 출신 항일 독립투사들의 이름과 간략한 항쟁기를 적어두었습니다.
보는이는 없겠지만 세운 뜻이 갸륵합니다.
이름을 불러봅니다.
조대수, 홍원표, 김대원, 고태리, 홍성옥, 고경수
각종 송덕비
맨안쪽 커다란 것이 북제주군수재직중 돌아가신 분의 것 입니다.
귀덕 초등학교로 왔습니다.
귀덕초등학교의 북쪽 울타리 부근에 명월진에 소속되어 있는 연대로
동쪽의 애월연대와 서쪽 귀덕2리의 우지연대와 교신했다고 하는 귀덕연대가 있습니다.
지금은 연대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잔디로 덮인 작은 동산과
그 윗부분에 월대의 주춧돌로 여겨지는 돌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앞 비석들은 연대 또는 월대와 상관엇고
학교개교후 보수에 도움을 주신분들의 기념비입니다.
북제주문화원에서 세운 안내비에 의하면
동쪽 애월연대와 서쪽 우지연대와 교신하였으나
애월연대와 우지연대가 서로 교신하면서 필요성이 없어져
연대터에 월대를 구축하여 망해대라 이름짓고 시인묵객들이 교류하던 장소로 쓰던중
1940년 4월에 귀덕초등학교가 개설되면서 학교뒷뜰에 편입되어 그 흔적은 사라졌다합니다.
다시 바닷가로 내려왔습니다.
귀덕본향당입니다.
2005년 9월에 당집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돌로 쌓은 울타리 안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제단이 있었고
제단위에 궤를 두곳 설치해 두었었습니다.
그리고 당굿을 드릴 때 천막을 칠 수 있도록 철골로 지붕을 해 두었었지요.
본향당 앞 표석에 쓰여있는 당의 약력입니다.
“당초 쿠리쿠리(購伊舊伊) 일대에 사람이 살면서 멀왓 입구(당밭 2511번지 경) 부근에 있었다는 설이 있고,
漁業을 하면서 선왕댕이(2733번지 경)에 船王堂을 모셨다 하나 합쳐진 내력은 알 수 없다.
1702년 경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 부임하면서 신당철폐령이 내려져 당수덕(3242-1번지 경)으로 옮겼다가
해안의 현위치인 屯地(1031-3)에 오면서 둔지당으로 불렀다.
처음 宋氏할머니가 좌정했다 하여 ‘귀덕할망당’으로 호칭되어 이 지역 및 실향민들의 情緖를 기려오던 중
북제주군의 토속신앙 中興과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현대식 건물과 제단을 설립,
후세에 지역민 및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의 마음의 정서와 안정을 위하고자 하며
祭日은 每年 陰曆 정월 입춘 후 첫未일에 귀덕 1,2,3리 마을회와 1,2리 어촌계 합동으로 奉行하고 있음.
2005년 9월 歸德里民 一同 謹竪”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몇년전에 실시한 귀덕리 본향당제는
정월 보름 바로 전 양날에 했습니다.
귀덕리 1,2,3리 마을회와 귀덕 1, 2리 어촌계가 공동으로 흑돼지 한마리를 포함한 제물을 준비하여
좌정한 본향신과 함께 용왕을 모셔다가
제관을 지정하여 삼헌관이 절하는 형식으로 요왕제를 함께 지내더군요.
무속제의를 유교제의의 형식으로 지내는 거지요.
본향당과 복덕개사이 됫물
귀덕포구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어서 모살개라고 불리웠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대 동네이름도 사동이지요.
배를 메어두는 버섯모양의 자연석이 포구를 정감있게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이곳을 복덕포구라 합니다.
방파제를 따라 걸어봅니다.
천막아래서 성게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부터는 해산물이 줄었지만 성게는 제법 잡힌다하네요.
마을 현직 잠녀들이 한 40명 된다는데
해산물이 줄자 성게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 양배추 등의 농사에 의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촌계 뒤 일주도로설치이후 갈라진 마을을 지나 다시 내륙쪽으로 갑니다.
신서동
새시멀이라고 하지요.
옛날 소랭이왓(士郞田) 부근 쿠리쿠리(舊伊舊伊=쿠리초)란 마을과 횡개못(黃鶴池)부근에 마을이 있었으나
서쪽에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하여 새시멀(新西洞)이라 부른답니다.
마을올레길을 기웃거리고
김명집효자비로 갑니다.
84년이 지난 1925년 정려를 세웠습니다.
저급수통은 지금도 사용하는 것일까?
궁금해만 하면서 다가가지는 않고
어느분의 체천비를 보고
이런 저런 생각하며
통상 참랑거리라 하는곳으로 내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