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덕3리에서 대림리로 갑니다.
대림리 마을 회관으로 가는 도로변에
홍살문이 서 있습니다.
누구를 정려하는가 궁금하여 다가가봅니다.
효열무등부인누구누구지비라 하여 큰 비석이 서 있고
그 옆으로 어느거사의 추도비와 어느부부의 묘(墓가 아닌 廟)비가 서 있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된 부인이
시부모를 봉양하며 집안을 일으킨 것에 대한
그 후손들의 감사의 표현인듯 싶습니다.
개인사를 알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 옆 나무에게 우람하게 자라서 더운날 찾아오는 후손들에게 좋은 그늘을 제공해주라는 부탁을 해봅니다.
대림리 마을회관앞입니다.
지금이야 약간의 바다를 낀 한라산 서북쪽 기슭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한 한 800세대정도의 중산간 마을 이지만...
한때는 지금의 한림읍지경의 가장 큰 마을이었지요.
선돌 또는 입석촌이라 불리우다가
1685년경 잠수리(지근의 수원과 한수일부지역)가 분리되어 나가고
1884년경 상대(지금의 상대리), 중대(지금의 대림리), 하대(지금의 한림리)로 나뉘면서
현재의 지경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마을에는 용출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변 마을에서는 선돌에 딸을 시집 보내지 않으려 했다하네요.
왜냐하면 물이 귀하여 봉천수로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위생도 안좋고
특히 폐결핵, 간염환자가 많았기 때문이랍니다
(마을지 참조)
게다가 맑은 물이 필요할 때는 대섬앞 삐구물까지 길러 가야 하기 때문에
부인네들의 고생이 심했다 합니다.
그래서 잠수리와 마을 분동시에
향사터 일부을 양보하더라도
대림 사동 삐구물과 대섬(죽도)을 대림에 속하도록 하여야 한다하여
분쟁이 꽤 길었던 것 같습니다.
金興祚孝子碑로 갑니다.
효자비인데 그 부인의 이름도 같이 쓰여져 있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公諱興祚 籍慶州 天性事親至孝 昏晨之省 甘暖之供 禮志俱養 暫不離仰
父病危急終焉 回甦之望禱天祈 地日夜呼泣 斷指湊血涓涓灌口 更生幾絶之命
鄕隣咸稱出天之孝 高宗丁巳 自兩里擧賓修報營庭卽下 完文同庚申 御使行又給 褒揚之題
宜蒙政之樂 世事滄桑 以至于今 卓異之行 念其草野泯沒
以謀不朽之事 玆立棹楔 以與後人之觀感焉'
檀紀四二八七年甲午三月
1954년 그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비석인데 내용은 1867년의 일입니다.
고종치세간에는 정사년이 없었는데
이런 비를 세우면서도 고증을 않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은 잘못쓴것이라 넘어가도
1860년에 완문이 내려왔으면 그 당시 어디엔가 정려를 세웠을텐데
그런 기록없이
단기4287년(1954년)에야 그 후손들이 세웠다는게 이해가 않갑니다.
선돌이 서있는 궁돌왓으로 갑니다.
마을지경에 선돌이 있어 立石村으로 불리었으나
수원리와 분동후에는
돌이 서면 대림리가 흥하고 돌이 무너지면 수원리가 흥한다는 전설이 있어
서로 선돌을 넘어뜨리고 다시 세우고 하는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었다고 하지요.
250여년 전에는 박천총이라는 대림리 사람이 힘이 장사여서
혼자서 선돌을 올려 놓았다고도 하는데
어느시기엔가 다시 무너졌다 하네요
최근에 주변을 정리하였다는데...
세워진 상태는 아닌듯 합니다.
수원초등학교옆을 돌아서 광무8년 甲辰 2월에 세워졌다는
處士高鵬翼妻 孝烈金氏之閭라고 쓰인 정려를 찾아왔습니다만
기억이 잘못되었는지 그자리에 부서진 비각의 흔적 뿐이 없습니다.
갑자기 멍해집니다.
없어진것인지?
옮겨진것인지?
아니면 내가 기억을 잘못하고 있는건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어봅니다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도리어 묻는말..
그건 왜 찾는데...?
김이 새어 나갑니다!!
그래서
부질없는 하루를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