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유수암리

하늘타리. 2011. 7. 11. 16:12

 유수암리입니다.

 유수암리 어디냐고요?

 

극락오름기슭, 4.3전까지 당시 암자이던 극락사가 있던 곳입니다.

 유수암리가 아니고 고성리라는 이야기이네요.
하지만 유수암리 영농조합있는 마을길로 해서 한참 들어와야만 하니까 유수암리라 하고 넘어가지요.
아마도 이 계곡까지는 유수암리일겁니다.

 

극락오름은 옛지도에서는 極落岳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창명은 그 뜻은 확실하지 않지만 극락이라는 제주어의 한자차용일것이다라 하고
어떤이는 오름의 지세가 급격히 떨어지는 낭떠러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極落岳이라고 했을 것이다 합니다.

 

후자에 한표던지고..


극락사가 있던 곳에 남아있는 물통을 봅니다.

 

 

 

 

 

 

이 입구에

왼쪽으로 가면 태산사입니다.라는 표지가 있었습니다.

길이 가파르니  나무그늘에서 잠시쉬고

 

 토굴법당인가해서 들어가 봤더니  

 

기슭을 깍아 기도처를 만들었습니다.

 

그 건너편 천막이 법당입니다.

 

 유수암천 옆에 있었다는 태산사를 재현해 보려고 불사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유수암천옆으로 왔습니다.

 

길건너 보호수

 

유수암천 입구 거리못

 

유수암천 빨래터

 

유수암천입니다.

 

태암천이라고도 하지요

유수암천 머릿돌 비석에

"고려원종 12년에 항몽삼별초군과 함께 향파두성에 따라온  한 고승이

유수암 절동산 아래 용출하는 맑은 샘을 발견하고

언덕아래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이라 이름짖고 불사를 시작한것이

이곳에 처음으로 사람이살기 시작한 시초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근거도 없고 출처도 없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부터 모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태암감당은 후일 중건돼 태산사로 개칭했다가

조선시대 척화스님이 사찰을 재중건하고 천고사라 이름하였으며

 조선 숙종 27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훼손했다'하면서

이 옆 절동산이 절이 있던 터이고 여기 무환자나무로 염주를 만들었다합니다.

 

절동산 올라가는 계단 옆에 태산석이라고 음각된 비가 있습니다.

 


 

이것이 태암감당과 태산사가 있었던 증거라 하는데....
그 비는 여기 있었던 것도 이부근에서 발견된 것도 아니고

 항몽유적지 관리실 뒤 밭에 뒹구는 것을 밭임자가 1994년도에 발견하여 그냥 놓아 두었다가 

1998년도에 밭임자가 바뀌면서 새로운 밭주인이 집으로 가져갔지만

쓸모가 없었기 떄문에 항몽유적지 관리실에 연락하여 가져가도록 했고..

 항몽유적지에서 이 비석에 대한 고증결과 큰가치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처리를 고민하던차

유수암마을에서 가져가기를 원해서 마을에 주었더니

지금위치에 꼽아놓고

태암감당 또는 태산사의 증거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모든 스토리가 여기서 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새로 세운 안내판에도 태암감당과 태산사가 나옵니다.

 

 유수암천 옆 골목을 한번 들어 갔다가

 

 

 종신당터라 하는 곳을 가봅니다.

 사진은 밭입구의 바위를 찍었습니다만....
이 종신당은

김통정이 여몽연합군에 쫓겨 한라산 붉은오름으로 들어가기 전

처와 자식은 고성 안오름에서 자기 칼로 죽이고

어머니는  피신시켰는데

김통정의 어머니는 이곳으로 와서 은신할 굴을 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굴안에 몸을 은신하고 밤에는 '눈비아기쿨'이란 풀의 씨를 따 짜낸 기름으로 불을 켰다고 하네요.

그리고 주위에 살고 있는 주민에게 부탁을 하였답니다.

이곳에 불빛이 안보이거든 입구를 막아달라고....
그 후 이 굴에 불빛이 안보이므로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주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입구를 흙으로 막으니 자연적인 무덤이 된 것이고

그 후부터 이곳을 종신당이라 일컬었다합니다.

 

이 전설은 광령리 매고무덤전설과 같습니다.


고려 말엽 광령1리 비신의굴의 한 집안에 아리따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합니다.

이 아리따운 처녀의 이웃집에는 그녀를 지극히 짝사랑하는 무지럭 총각이 살았다네요.

성혼할 나이가 되자 처녀는 부모의 주선으로 같은 마을 총각에게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야릇한 배신감을 달래며 이를 지켜보던 무지럭 총각은, 

결국 여인의 남편을 없애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여인의 남편에게 같이 사냥을 가자고 졸랐습니다.

사냥을 나선 두 사람은 오갱이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한나절을 걸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해서 그늘에 앉아 잠시 쉬는데,

무지럭 총각이 대뜸 화살로 여인의 남편을 쏘아 거꾸러뜨렸답니다.

워낙 가까운 거리이고 또 급소를 맞췄기에

여인의 남편은 피거품을 내뿜으며 금방 숨이 끊어졌다지요.

대충 시체를 수습해 암장해 버린 무지럭 총각은

자신의 몸에도 여기저기 상처를 내고는 헐레벌떡 마을로 달려들었습니다.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과 여인이 어찌된 일이냐고 다그쳤습니다.

"이게 무슨 변고냐, 어째서 우리 남편은 안 돌아오느냐?"

"아, 무시무시한 맹수를 만나서 나는 어찌어찌 겨우 도망쳤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오,"

무지럭 총각이 이렇게 대답하자,

다음 날부터 이웃 사람들은 총각을 안내인으로 삼아 여인의 남편을 찾아 나섰습니다.

엉뚱한 데만 헤메이니 며칠을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편이 맹수의 밥이 되었을 것이라고 체념하였습니다.

몇 달이 흘러 사건이 잠잠해지자 무지럭 총각은

남편을 잃은 슬픔에 두문불출하고 있는 여인에게 접근했지요.

"죽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산 사람은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 서로 외로운 처지이니 서로 도우며 살아보자"고 살살 얼르고 달랬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인을 꼬이는데 성공했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날

초로에 접어든 두 부부는 마루에 않아 서로 머리의 이를 잡아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부인의 무릎을베고 누운 남편이

아까부터 마당에 생기는 물거품을 보며 실없이 자꾸만 웃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부인이 가만히 물었답니다.

"무슨 일입니까, 비가 와서 사냥도 못하고 식량도 어려운 판인데, 어째 자꾸만 웃으십니까?"

그제야 흠칫 정신을 차린 남편은 물꾸러미 부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제 다 늙고 아들도 뒀는데 옛날 애기 좀하기로서니 어떠냐싶어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응,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당신을 좋아한 나머지 당신 전 남편을 사냥터에 데리고 가 쏘아 죽였는데,

그때 상처에서 뿜어지던 피거품이 꼭 저 물거품과 같아서….

그 생각을 허니깐 지금이 너무 행복한 것 같아서 웃음이 나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부인은 순간적인 재치로 그 상황을 넘겼습니다.

"아, 그거 참 잘했습니다.

부모가 결혼을 시키니까 마지못해 살았지,

그 놈이 생전에 날 괴롭힌 걸 생각하면 이가 다 갈립니다.

그런 놈은 뼈까지 갈아 없애야 되요.

이왕이면 그 뼈까지 전부 줏어다 태워 버립시다." 

그러자 좀 우둔한 남편은 그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 그러면 가자"고 해서 대충 시체를 묻어 놨던 곳에 부인을 데리고 가서 가리켜 줬다네요.

부인은 은밀히 무덤자리를 표시해 두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오늘은 일진이 좋질 않아 지금 일을 벌리게 되면 우리 자식들이나 집안에 화가 미칠지 몰라요.

그러니 다음에 내가 혼자와서 처리하겠어요".

이렇게 남편을 따돌린 부인은 밤중에 유골을 수습하여 다음날 남편 몰래 관아에 갔습니다.

"등장(진정)들이러 왔습니다."

 "무슨 일이냐?"

 "비신의굴 사는 아무개인데 어찌어찌하여…다 죽여줍서."

부인은 자초지종을 다 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현재의 남편을 단죄한 노부인은,

사람 하나가 겨우 기어들 수 있는 구멍 하나만 남기고 흙으로 덮어 무덤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런 후 배채기(질경이)기름 한 허벅을 짜서 굴속으로 기어들며

"이 지름(기름)으로 붙인 불이 꺼지거든 내가 죽은 줄 알고 구멍을 막아주시오"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했다합니다.

그 불은 꼭 석달 열흘을 타오르다가 꺼졌는데

불이 꺼지자 비신이굴 사람들이 이 부인의 소원대로 굴 입구를 막아 버렸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 노부인의 이름을 매고라고 하는 이유는

"전 남편의 원수를 갚아 열녀라 할 만 하지만,

평생을 같이산 현재의 남편이 죽도록 한 것은 너무 매정하다"하여

"매정한 할머니"라는 데서 연유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스스로 "묻혀버린 할머니"라서 매고라 불렀다는데

모두가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 매고무덤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질매굴이라고 하는 곳으로 내려가려다가

중턱에서 하귀 바굼지 오름을 보고 돌아서서

마을을 한바퀴 돕니다.

 

 마을 북쪽 왕돌목 왕돌

 

 

 

 4.3후 마을을 재건할 때 4.3성 동문자리

 

 마을동쪽 선돌

 

 

 

 

 마을 서쪽 선돌

 

 이 바위는 원래 1958년에 세운 충혼비 좌대로 쓰이던 것인데

2007년에 마을 오방신장석을 세운다 하여 충혼비좌대를 새로 만들고 가로 세워놓았습니다.

 

 충혼비

 

 

 

 

 

 

 

 고내봉을 한번 바라보고

 

 흘이물유적비로 왔습니다

 

2008년 유수암리민들이 비를 세웠습니다.

 김두옥이라는 분이 1900년대 초 개인사재를 털어 저류시설을 만들어서

검은덕이, 유수암, 소길, 장전, 수산마을의 식수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곳인데..

 

1994년 도로포장공사로 매몰되어 아주 조금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폿감을 보고 감물들이는 생각을 하면서

 

하르방당쪽으로 가다보니 초가집이 나옵니다.

 

최근에 육지사는 어떤 화가가 사서 잘 정비했다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1년에 한두번 내려온다고 하더군요. 

 

집 구조가 특이해

빙글빙글 돌면서 몇장 찍고... 

 

 

 

 

 

 

 하르방당, 할망당 생략하고....

 

빠른길로 홍랑의 무덤을 간다는게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네이쳐 빌이라고 하는데 개인소유 같아서 입구에서만 꾹꾹하고 돌아갑니다. 

라벨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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