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령리입니다.
가까이 있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주로 지나치게만 되네요.
오늘은 몇군데 들러볼까 합니다.
광령이라는 마을이름은 1653년(효종) 목사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에서 처음 나옵니다.
거기에는 아마 光靈이라고 적혀있을 겁니다.
그뒤 1725년(영조)에 받은 고씨가문 교지에 의하면 다시 光映으로 표기되어 나옵니다.
그뒤 光令으로 이름이 정착되는데...
마을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이 마을은 산칠성, 물칠성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합니다.
즉 아름다운 산, 큰수덕·정연동산·서절굴동산·무녀마를이 칠성의 앞 사성을 이루고,
엄지굴동산·테우리동산·높은마을 등이 후 3성을 이루어 칠성형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맑은 물, 정연·거욱대물·절물·자중동물·독지굴물·행중이물·샘이마를물 등
이렇게 7개 샘물로 칠성형이 이루어져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아 산주수청하니 광이요,
백성의 민속이 밝고 선량하니 令(령)이라 했다고 합니다.
절물으로 갑니다.
향림사옆에 있습니다.
향림사는 87년도에 창건된 절입니다.
이절 입구에 절물(寺水)이란 샘이 솓아나고 있습니다.
이 샘을 절물로 부르는 것은 향림사 창건이전에
이 샘가 주변에 영천사란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근에 큰 석불이 묻혀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고
절물 입구에서 큰 주춧돌이 발견되어
그 돌의 크기로 당시 영천사의 규모를 짐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절 입구에 있는 절물으로 갑니다.
이 샘물을 보수하는데 도움을 준 이들의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2기의 사수수선비를 보고
물통으로 내려갑니다.
정비를 했네요.
다행이 옛모습에 크게 손상은 없습니다.
태고종사찰인 향림사 법당입니다.
사찰경내 어느곳에서 바라춤을 연습하시는지 바라울리는 소리가 계속 들립니다.
정진하셔서 사람들의 번뇌와 망상을 바라춤 한판으로 모두 날려주셨으면 합니다.
법당입구에 포대화상이 계십니다.
중국 後梁의 禪僧이시지요.
이름은 계차(契此)라 하고.
호는 정응대사(定應大師).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도 하며,
당시의 사람들은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사(布袋師)라 불렀다고 합니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이었다고 하고
또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렸답니다.
기이한 행적을 수없이 남겼으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예언하여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항상 세인에게 나뉘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네” 라는 게송을 남기고
중국 봉화현 악림사에서 반석 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포대화상이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임을 알아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네요.
또한 포대화상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있는데
아마도 포대를 메고 다녔던 그의 행적 때문인 듯 합니다.
그의 게송을 하나 옮겨 봅니다.
"하나의 바릿대 천집의 밥을 빌며
몸은 고고히 만리를 노닌다.
푸른 눈은 사람을 보는 일 없고
길을 물으니 백운의 끝이더라
미륵 참 미륵이여
천백억의 몸으로 나투어
때때로 시속 사람들에게 보이나
시속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법당안으로 들어갑니다.
티벳불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지난번 텐파렌포체 친견법회를 다녀오셨는가 봅니다.
사진을 다시 찍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에 약사여래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로 모셨고
좌우벽에는 전부 지장보살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
불법을 수호하는 동진보살상
지장보살상
통상 법당이 하나인 절집에서 단으로 모시는 칠성단과 산신단, 용신단, 조왕단 등은 보이질 않습니다.
법당을 나와서 연못으로 가 봅니다.
절집의 연꽃구경을 해보려고요.
향림사를 나와 남쪽으로 쭉 올라갑니다.
관광전문대학 후문옆으로 왔습니다.
광령2리 이승굴 할망당입니다.
밭 두개 넘어에 있는 하르방당과 부부신이라 하시는 분도 있는데...
그 당은 한라산 산신계당으로 예전에는 가축 특히 돼지를 잘 기르게 해준다하여 당궐이 제접 많았습니다만
언젠가 마을포제를 그곳에서 지낸이후 당궐들의 발걸음은 끊겼습니다.
이 당은 광령1리 본향인 자운당에서 모시는 송씨아미와 송씨도령을 가지갈라 모시는 당입니다.
광령3리 조중굴당입니다.
이곳도 광령1리 자운당에서 가지갈라온 송씨아미와 송씨도령 두오누이를 모시는 당입니다.
하천 확장공사를 하면서 제장앞부분이 많이 깍여서 누군가 돌계단을 놓았습니다.
신목에 지전과 물색이 있습니다만 그 앞에서 비념을 할 공간이 없어졌습니다.
광령 3리에 당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산새미오름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마씨 미륵당입니다.
그당은 원래 목축을 위한 비념을 하던 당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득남을 비는 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바뀌는 스토리가 음사라는 빌미를 주고
풍속을 훼손한다하여 훼철되는 이유가 됩니다.
큰자종이물입니다.
이곳 광령 3리를 자종동이라고도 합니다.
고려 공민왕 10년경 송자종이란 사람이 육지로부터 입주하여 설촌했다고 전하며
그에 따라 리명도 '자종'으로 굳어진 듯합니다.
이 마을에는 큰자종이물·샛자종이물·말젯자종이물 등 3개의 샘이 있어
식수가 풍족하고 농토가 광활하여 농경생활에 적합했던 지역입니다.
조선 태종시대에 송씨 몰락으로 폐동되었다가
그 후 조선말엽(고종)에 강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부활된 마을입니다만
4.3때 또 한번 폐동되었다가
1949년 광령1·2리, 고성, 하귀1리 광동 주민들이 자종동에 모여 집단재건하므로써 큰 부락이 형성되어
초등학교 및 경찰관 파견소를 설치 운영하게 됩니다.
그 후 1951년 광령 1·2리, 고성리 주민이 복귀하고
이마을에는 자종동, 장전동, 하귀 광동 출신 주민이 영주하면서
1956년 광령 3리로 분리되었습니다.
이 큰 자종이물은
수질이 양호하고 용출량이 많아 자종동주민이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합니다,
샛 자종이물입니다
이 용천수 역시 생활용수로 적합하여 예전에는 하귀 1리 광동(廣洞) 주민이 사용했다 합니다.
말젯자종이물은 마을 서북방에 위치해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매몰되었습니다
광령저수지까지 내려왔습니다.
애월에서 조천까지 연결하겠다고 뚫어놓은 애조로변에 위치해 있는데
배한이 저수지라고도 부릅니다.
일제 강점기간에 일본인이 착공하여 소규모 저수지를 만들어 배한이들을 경작했는데
1950년 이후 수리조합에서 관리 2·3차 보수하고
어승생수원을 주입 저수하여 배한이 평야를 확장 경작했었다 합니다.
지금은 낚시외 어느용도로 사용되는지는 모르지만
기록에 의하면 면적은 2만3000㎡이며 저수량이 최대 5만1000t으로
제주도에서 세번째 크기라 합니다.
저수지 북쪽에는 약 130m가량의 둑이 있습니다.
제방을 한바퀴 빙 돌아보며 광령리 답사를 마칩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범능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