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애월읍 고성리

하늘타리. 2011. 7. 10. 14:46

 고성1리 마을입니다.

 

고성천위로 놓여진 다리부근 복개지옆에 김영흥의 시비가 있습니다.

 무화과
         김영흥

 

이른 봄 한 모서리
외로운 잔가지들
별 나비 멀리 하여
동정으로 맺은 인연
목 축일 한 줌 햇살도
은총으로 받아 든다
바람 탓은 아니다
하늘의 일일 게다
고뇌의 잔을 들면
앵돌아 토라진 몸짓
몸부림치는 저 생명.

(강창화 씀)

 

세상을 떠 난후 동인들이 그가 테어난 마을어귀에 세운 것입니다.

 

재미있어서 기억하고 있는 김영흥의 시 한수 더 적어 봅니다.

 

나무 타령

 

장난끼 서린 나무
너름새 저 투정들

 

바람 솔솔 소나무, 십 리 가면 오리나무
사시사철 사철나무, 낙엽 곱다 단풍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불 밝혀라 등나무
곁에 서면 측백나무, 캉캉 짖어 캉캉나무
잣 벽에 난 잣나무, 박박 달아 박달나무
약아빠진 쥐나무, 덫에 걸려 싸리나무
엄청나다 엄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방구 뀐다 뽕나무, 깔깔 웃는 떡깔나무
이리저리 가래나무, 저승길에 머귀나무
혼자 따라 자작나무, 느영나영 살구나무
열매 검다 조롱나무, 꽃이 없어 무화과
오동통한 오동나무, 탱글탱글 탱자나무
먹는 데는 먹구슬나무, 꿀맛이다, 밀감나무
목에 걸려 가시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불당 앞에 모감주나무, 비틀비틀 모과나무
절뚝절뚝 전나무, 비웃어도 너도나무
배꼽 보자 배나무, 입 맞췄다 쪽나무
얼굴 붉힌 감나무, 잘못했다 사과나무
앵돌아진 앵도나무, 두들기고 치자나무
근거 없는 노가리나무, 제나 잘콴 작살나무
눈물 뚝뚝 참회나무, 서방 죽어 매자나무
완, 투, 쓰리 삼나무, 버들버들 버드나무
살아보자 구상나무, 다 끝났다 종나무
대한민국 대나무, 영원무궁 무궁화

 

나무도 제 이름만큼
고독한 몸짓이다.

 

고성천입니다.


이 계곡을 쭉 따라올라가면

물 많은 날 멋진 폭포를 이루는 웃작지소가 나올거고 

가시나물동산을 지나 먹통소가 나올거고

더 쭉 올라가면

산세미를 지나 노루오름까지 도달할겁니다만

어느세월에...

 

고성1리 마을회관앞으로 왔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고성이 처음으로 설촌한 것은 1601년(선조)이라고 합니다..
박언이라는 사람이 임진왜란 당시 당파싸움 관계로 조부와 부친이 별세하자

29세 나이로 벼슬을 사임하고 모친 김씨를 동반하여 제주도로 와서

연화촌(제주시 연동)에 정착하고 제주 향교에 출입하면서

향교에서 성윤문 목사를 만나게 되었답니다.

성윤문 목사는 박언의 부친과 절친한 친구였다고 하네요.

성 목사는 박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당시 귀일촌 남쪽,

고려말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항쟁하였던 부근에

꽤 큰 집터를 마련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귀일촌이 하귀리와 상귀리로 분할될때 상귀리상동에 속했다가

1884년(고종)때 신우면 고성리로 분리되었답니다.


고성2리는 고성 1리와 역사적 배경이 같지 않습니다.
1967년 청정지역 중산간 개발로 이상적인 농촌건설이란 미명하에

광령지경 잡초밭위에 조성된 양잠단지가 고성2리의 전신입니다.
양잠단지는 1967년 120헥타의 면적으로 조성되어

 같은 해 12월 1차로 20세대가 입주한데 이어

이듬해인 1968년에 또 20세대가 입주하였습니다.
한때 정부의 양잠산업진흥시책으로 약간의 호황을 누렸지만

10여 년 만에 양잠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입주민에게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었지요.
하지만 서로 도우면서 정착지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갖고 열심히 일한 결과

 비슷한 시기 조성된 도내 6개 개척단지 중 유일하게

1998년 1월1일 행정리로 성장하였습니다.

 

고성2리까지 가기는 너무 멀고...

왔던길을 되집어서 동구시물 마께왓당으로 갑니다.

 
고성리에는 마을 본향당이 없습니다.


아마도 삼별초가 평정되고 난 후 박언이라는 사람이 와서 다시 설촌 할때까지

약 320년동안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들기도 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아니고...
하여간 이 곳의 당은 외지에서 시집오신 분들이 가지갈라온 당이 네곳이 있었다 합니다.
동쪽(광령 등)에서 시집온 분들은 주로 동구시물,

서쪽(장전·납읍 등)에서 시집온 분들은 성내골,

남쪽(금덕 등)에서 시집온 분들은 백토골,

북쪽(하귀 등)에서 시집온 분들은 던덕모를에 당을 만들어서

기자, 산육 또는 치병을 기원하였습니다.

 그 중 성내골과 백토골에 있었다는 당은 지난번 답사 때 그 흔적 조차도 찾지 못하였고

동구시물 마께왓당과 장털일뤠당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동구시물 마께왓당은 고성리동쪽마을에서 시집오신 분들이

광령1리 자운당에서 가지갈라 모신

송씨아미와 송씨도령이 계신곳입니다만

이제는 이곳이 당이었다고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주변에 엄청 넓은 도로가 새로 개설되고 있으니

더 이상의 다니실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쉬움에... 

몇장의 사진을 계속 찍습니다.

 

 

 

 

다시 고성리 마을안쪽으로 왔습니다.

 

 고성천을 따라 웃작지소까지 올라가볼까 하다가 너무 힘들것 같아서 포기합니다.

 

고성1리마을안에서 마땅하게 갈데가 없습니다.

 

무슨소리냐?

여기에 그 유명한 항파두리가 있는데 갈데가 없다는게 말이 되느냐?

 

나한테는 말이 됩니다.
나는 삼별초를 아주 마뜩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를 써볼까요?


이 블로그 어디엔가 썼던 글을 다시 옮깁니다.

 

삼별초.
삼별초란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 등 세 개의 별초군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랍니다.


고려사에 쓰여 있는 말을 옮기면
"나라 안에 도적이 많으므로 최우가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면서 폭도들을 막게 하고,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뒤에 도적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 막도록 했는데,
그에 따라 야별초 군사가 많아졌으므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한 몽고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신의군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입니다."

 

도적은 어느나라에도 있고 어느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조직해서 도적을 막아야 할 정도라면

그 나라 그시기는 이미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당시 상황을 기술한 책자에는 초적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즉 도적이 아니고 지배층에 저항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의 저항을 막기위해 조직된 군사가 바로 삼별초의 실체인 것 입니다.

그 것도 정규군이 아니고 최우가 조직한 사병집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규군과는 녹봉체계도 다르고 조직체계도 다르게 운용되면서

그들의 정적을 제거하는데도 이용이 되었지요.


결국 최씨정권자체도 문신 유경이 무너뜨렸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최씨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무신 김준이 삼별초를 조종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듯 삼별초는 국가나 민중의 보호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없었던 조직입니다.

 

1231년(고종 18)  이런 저런 이유로 몽고가 고려를 침략합니다.
이때 고려인들은 총력을 기울여 맞서 싸웁니다.
전반적인 열세 속에서도 구주(평북 구성), 자주(평남 순천)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충주에서는 성을 지킴으로써 몽고군이 더 이상 남하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승리는 관군과 삼별초가 이끈 것이 아니라

그들이 초적이라하여 억압하고 핍박하던 이들의 승리였습니다.

 

몽고군이 당황하여 일단 철수 한 후 고려에서는 항전과 강화의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됩니다.
관료들은 대부분 강화를 주장합니다만 최우의 무리들은 항전을 주장합니다.

왜냐 강화를 하게되면 최우의 무리가 더 이상 정권을 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최우가 다수의 반대를 억누르고 천도를 결행합니다.
몽고의 침략에 맞서 싸운 수많은 고려인들을 사지에 버려둔채로

왕을 볼모로 잡아 자기들만 안전한 곳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 까요?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처지에 놓인 백성들은

각지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힘겹게 벌여야만 하였습니다.

고려는 일반 백성들이 수십 년 동안 몽고와의 싸움을 해 왔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1254년의 경우,

한 해 동안 몽고군에 잡혀간 사람이 무려 206,800여 명이고,

살륙당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왜 셀수가 없냐고요?
그 당시 몽고군 전투수칙이 수레바퀴보다 더 키가 큰 자가 반항하면 그자리에서 살륙하라이었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항전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몽고에 투항하는 사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1253년 이후 점차 많아집니다.

 

일반백성이 수없이 죽어넘어 집니다만

고려 조정은 강화도만 안전하면 된다하고

그곳만 삼별초를 이용 철통같이 지킵니다.
더욱이 강화도의 정부는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평상시와 같이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내지 않는 지방에는 삼별초를 보내 강제로 걷어오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1256년에는 정부의 무자비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몽고군이 이르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전쟁중임에도 전라도 일대에서는 백제부흥을 위한 반란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전쟁의 피해가 커지고 백성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강화론이 차츰 힘을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대로 최씨정권이 내분으로 약화되어 강화론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최씨정권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강화론자를 대표하던 문신 유경이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강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때 동원된 군대는 최씨정권 말기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준이 지휘하는 삼별초였습니다.

 

삼별초는 또 김준을 제거합니다.
이번에는 임연의 조종에 의해서지요.

 

임연은 강화를 추진하는 임금을 폐위시킵니다.

하지만 몽고가 군대를 보내어 강화를 추진하는 임금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으면

강화도 전역을 피바다를 만들겠다고 하자 원종을 복위시킵니다.


이제는 왕의 군대도 아닙니다.
이미 처음부터 국민의 군대가 아니었고 이제는 왕의 군대도 아닙니다.

 

원종은 몽고군의 호위를 받으며 몽고에 갑니다.

그곳에서 강화조건을 결정하고 몽고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개경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무인정권과 삼별초에게 개경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이제는 기댈 곳이 없어진 삼별초는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개경으로 돌아간 고려 정부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웁니다.

 

이것이 삼별초의 난입니다.

 

그리고 더이상 버티기가 힘든 강화에서 진도로 빠져 나옵니다.
따라오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목을 베는 등 무력과 협박으로

강화도 안의 재물과 곡식, 사람을 휩쓸어 배에 싣고 진도로 향하였는데,
이때 천여 척의 배가 꼬리를 물고 내려 갔다고 합니다.

 

이제는 군대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에 동원되었던 무장조직이

이제는 그들만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폭력조직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나마 진도에서 까지는

형식적으로나마 왕을 옹립하였으므로 진도정부라고까지는 불러 줄 수 있지만
진도에서 패주하여 제주도에서의 행적은 국민과 국가를 위한 것이 없습니다.
좋게 말해서 웅거하였을 뿐이지요.

 

그러다 어느정도 정비가 된 후 고려의 남해안을 다니면서 조공선을 약탈하는 등
그렇지 않아도 피폐한 민중의 삶을 더욱 질곡에 빠뜨렸으며
그 이전까지는 그런데로 오손도손 살아가던 제주인들의 삶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몽고 백년지배의 단초를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군대라 하는 무력집단은 국가안보가 그 목적이 아니라면 그 정당성이 없습니다.
민중을 탄압하는 무력집단은 국가의 군대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민중의 봉기에 편승하여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다는 것은 더욱 더 용인되어서는 않됩니다.

 

대몽항쟁은 고려의 일반 백성이 한 것입니다.

국왕과 정부가 백성을 버려두고 강화도로 들어갈 때

몽고군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던 백성들...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처지에 놓인 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
이러한 항전을 바탕으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몽고와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고
이 백성들 덕분에 몽고는 고려에 완화된 복속조건을 제시했던 것 입니다.


현양은 이들 백성들의 저항의 흔적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물론 강화, 진도, 제주 그외 밀양이나 거창등의 옛 흔적은 발굴을 해야겠지요.
미우나 고우나, 슬픈일이던 기쁜일이던 있었던 사실이니까요.
특히 제주에서 삼별초가 쌓았던 성.

그 자체는 고려식으로 계획했겠지만 기술 또는 자재의 문제로 제주식이 가미되었을 것이고
각종 도자기나 집기류등 그것이 약탈이던 생산이던

그 당시의 사용품일테니 귀하게 여겨야 겠지만...

그에 대한 과장과 왜곡은 삼가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사이 계속 발굴과 토성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안오름옆 장털왓으로 갑니다. 

 항파두리란 명칭은

지형이 물항아리 같고 인접한 남쪽에 장태가 있어서

물항아리에 장태로 물을 부어 넣는 형태에서 비롯된 명칭이라는데

그 안에 말그대로의 안오름이 있습니다.

 안오름은 고성리 바로 남쪽 오름으로

고성안에 있어 안오름(內岳)이라 하나

실제로는 성이 능선을 관통하여 반은 성안이고 반은 성밖이 됩니다.

안오름 정상에 서면 바굼지오름, 도들오름, 비양도까지 조망할 수 있어

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오름 남쪽 기슭 움쑥하게 들어간 8,000여평 남짓한 밭이 장털왓인데,

장태왓의 와음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장태는 술을 발효시키는 고소린데

그 모양에서 유추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하네요.


장통밭의 와음으로 봐도 의미는 같습니다.


옛날은 여기가 호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종내미로 코를 트고 물을 다 빼어 버려

고성리에 훌륭한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마을어른들은 이야기 합니다.

 

 

숲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금덕 남당밧 송씨일뤠할망을 모신 장털일뤠당이 있습니다만

맨날 당만 돌아다니는 것도 좀 그래서

생략하고

유수암리로 바로 넘어갑니다.

Linda Gentille의 piano  Whisper of the Sea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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