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하원동

하늘타리. 2011. 7. 5. 14:41

 

 서귀포 하원동을 갑니다.

 

하원동을 제대로 답사하려면 하원동 산 1번지인 영실존자암에서 출발,

영실기암을 거쳐

무오항일항쟁의 발원지 법정사를 다녀 와야 합니다만...

 그냥 차로 달리며 그 앞을 지나치기만 하고....

 대포동지경인 거린사슴전망대에서 숨을 고릅니다.

 

 

 

 

또 다른 하원동의 명소인 해상왕 장보고 대사가 창건했다는 법화사도 오늘은 바이패스하겠습니다.

위에 거론한 장소들은 상당히 자주 다녀왔고

꽤 많은 자료가 제 블로그에 있기 때문에

오늘은 마을 쪽으로 바로 내려 가겠습니다.

 

도순천지류를 건너 탐라왕자묘라 불리우는 곳으로 갑니다. 

 

 

이런 저런 말이 많기 때문에 탐라왕자 묘 안내판 설명을 그대로 옮깁니다.  

 "성주.왕자는 탐라국시대(서기 476~1005)의 왕족을 나타내는 작위로서 성주는 탐라국왕을 말한다.
고후.고청.고계 등 3인이 신라로부터 처음 작위를 받아 세습하여 왔으나,

조선조 태종 2년(1402년) 성주는 좌도지관. 왕자는 우도지관으로 개칭되었다.
하원동탐라왕자묘는 모두 3기이다.
이곳의 왕자묘에 대한 기록은 이원조 제주목사가 지은 탐라지초본(1842년) 대정현 고적조에

 "왕자묘는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고, 궁산 양쪽 하천 사이에 3기가 있다" 고 기록되 있다.

그러나 왕자묘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1998~1999년까지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잘 다듬어진 석재로 4~8단의 판석과 할석으로 축조된 방형석곽묘로서 목관을 사용했다.
고려말 조선 초기(13~15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당 시대의 자기편과 소옥, 혼유석, 석재향으로 문인석 등이 출토되어 당 시대의 고위층 무덤으로 추정되며,

제주도 묘제사 변천 과정 연구에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 되고 있다.
하원동 탐라왕자묘 제 1.2.3호 분은 1910년 이후 여러 차례 도굴되었으나, 2001년도에 복원하였다.
가장 남쪽에 있는 제1호분은 3기 중 가장 잘 만들어진 분묘이며 좌우에 문인석이 있다.

점판암 판석을 받침돌로 쓰고 현무암 판석을 세로로 맞춰 세워 곽을 만들었다.
규격은 남북 4.3m x 동서 3.0m x 높이 1.0m 이다.
제 2호분은 3기 중 가운데 있으며, 1호 분과는 달리 점판암 할석을 7~8단으로 수평쌓기하여 곽을 만들었다.
규격은 남북 4.3m x 동서 3.0m x 높이 1.0m 이다.
제 3호분은 북쪽에 있다.

3기 중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무암 판석을 세로로 맞춰 세워 곽을 만들었다.

규격은 남북 4.5m x 동서 3.1m x 높이 6.5m 이다.
묘역3기를 조사한 결과 내부 층위는

 대부분 1.표토층 2.흑갈색부식토층 3. 황갈색점토질층 4.흑갈색부식토층 5.황갈색점토질층

6.목탄층 7.흑갈색부식토층 8.황갈색점토질층 9.흑갈색부식토층 10.황갈색점토질층

11.목탄층 12.흑갈색부식토층 13.황갈색점토질층 14.목탄층으로

층위가 구성돼 있다."

 

 

3호분

 

 2호분

 

석곽묘사이에 있는 일반 묘

양쪽에 문인석이 있고

한쪽에만 남아있는 동자석은 머리가 깨어진 채로 주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1호분

오른쪽 문인석은 최근에 만들어 세운듯하고

 

 한쪽 문인석은 오래된듯한데

머리부분이 없습니다.

1호분은 같은 산담속에  비석없는 다른분 묘도 같이 있습니다.

그 묘의 산담이 석곽묘도 같이 감싸준 것 같습니다.

 묘역주변에 하늘타리가 예쁘게 피었네요

  

나무사이로 보이는 한라산을 한번 보고

마을길로 내려갑니다.

 

삼면원혼제단입니다.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하시겠지만 4.3때 희생된 삼면의 희생자들을 위령하는 제단입니다.

삼면은 희생자들이 생존했을 당시 거주지인 서귀, 중문, 남원의 3면을 말하며

희생자수는 총 81명이라 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예비검속령을 발동합니다.

제주에서는 제주경찰서장이 정한 기준에 의거 적성분자를 체포,

당시 서귀포 오일시장이었던 서귀포시 서귀동 587번지 창고에 구금시킵니다.
그렇지만 이 적성분자라는 기준이 참 애매합니다.
공무원, 교사, 학생, 부녀자까지 포함돼 있던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태도가 애매하다거나,

4.3당시 무장대였던 누구와 친척 또는 어릴때 가까운 사이였다거나

지역경찰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서귀포경찰서로 잡혀갔던 것이지요.
이렇게 끌려간 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임을 당한지도 모릅니다.

 50여년이 지난 뒤에야 현 제주공항인 정뜨르 비행장에서 구덩이에 켜켜이 쌓인 유골로 발견됐고

희생자의 도장이 구덩이에서 유골과 함께 발견되고

유전자 감식을 통해 13명의 유족들이 희생자의 유골을 찾았습니다.
50명에 가까운 이들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못한 것이지요.

 

하원마을 충혼비와 순직비입니다.

 충혼비는 한국전쟁시 산화한 이 마을 출신 24명의 영령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비 측면에 새겨진

"드리는 글"


나라위해 싸우다 가신 그대여
선혈은 흘러서 산하 물들고
충정은 어리아 무궁화 되니
삼천리강산에 꽃을 피웠네.

 

청산이래 잠이든 그대 얼이여
정혼은 천추에 달빛 서려도
앞날에 통일이 다가오리니
무훈은 영원히 빛날거외다.

 

진짜 빛나고 있을까요?

아무도 찾지 않습니다.

 

 

그 옆 두 비석은 4.3당시 무장대의 습격으로 부터 마을을 지키다 숨진 마을사람들 중 11명의 이름과
그리고 1950년 11월 조천읍 와흘지경에서 공비와 교전중 사망한 김태욱경위의 순직비입니다.

 

일주도로가 하원마을을 지나고 있어서 중산간 마을도 아니었는데

토벌대와 무장대 양쪽으로부터 학살과 습격을 당하며  피눈물을 흘린 마을입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픈 곳입니다.

 

아마도 무장대에 의한 중문지서 피습 당시....

서귀포에서 지원 오던 토벌대가 무장대로부터 매복 공격을 받은 속칭 어둔마루라는 곳에 하원리가 근접해 있어서

마을에서 무장대를 지원했을 것이다하여 토벌대가 이 마을을 주목하게 된 배경으로 보입니다만

1948년 9월15일쯤에 하원리 마을 청년 3명이 경찰에 잡혀 간 후 행방불명 된 것을 시작으로

주변에서 일이 생길 때마다 하원리 주민들은 토벌대에게 잡혀 갔습니다.
1948년 11월24일 토벌대는 중문면 하원리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후

강득록을 불러내 총살 한 후 일부 가옥에 불을 질렀답니다.

이것이 마을 안에서 벌어진 토벌대의 첫 총살극이라고 합니다.

토벌대의 학살에 이어 이번에는 무장대에 의한 학살의 공포가 시작됩니다.
1948년 말 무장대의 1차습격시 1명의 무장대원이 사망합니다.
그 때부터 1951년 7월까지 무장대의 습격이 6차례나 있었으며

식량과 의류등을 강탈당하고

마을 사람 십수명이 무장대에 의해 납치후 피살됩니다.
결국 무장대의 방화로 마을 가옥 104채가 불에 타버리는 일이 발생

 마을이 거의 폐허가 되었습니다. (조명철)
그리고 그 난리를 겪고 남아있던 이들중 많은수가 

앞에 기록한 예비검속으로 다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원동본향 뒷동산 비바리당

 당신은 옥활상제의 말젯딸애기입니다.

무슨이유에서인지 귀양정배와서 도순동정동모들에 좌정한 처녀신을 월평동 성창골당과 함께 가지갈라 모십니다.

 예전에는 도순, 하원, 월평이 같은 생활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을 통물

 

 물고기 두마리가 눈에 띕니다.

이름은 모르구요..

 

삼백초가 고와서...

 

하원동 보개동산 요드렛당

 

 

토산계 당신을 모시는 당입니다.

 

 제주도 남쪽 중동부지방과의 통혼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마을 끝에.. 

나무를 타고 끝없이 오르는 하늘타리를 보고...

하원동을 나섭니다.

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Romance` Suite from `the gadfly` Op.97a

  (첼로연주) 로스트로포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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