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산리 마을길을 걷습니다.
걱대모루를 가려고요.
이마을은 난미라 불려오다가
1895년 제작된 지도에서부터 난산으로 한자 표기되었습니다.
걱대모루는 웃가름 동쪽이 허하였기 때문에
걱대를 세워 동쪽을 막았다 하여 붙어진 이름인데
지금은 거욱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곳이 걱대모루가 아닐 수 도 있습니다.
이당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한 20년뿐이 되질 않거든요.
걱대모루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걱대모루 일뤠당이라 하는 건지
이곳으로 옮겨온 후에 걱대모루일뤠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지...
지난번 이것을 마을사람에게 물어보니 무슨 소리하냐는 듯 쳐다만 봅니다.
걱대모루 일뤠당입니다.
난산리의 본향이고
토산에서 가지갈라온 요드레또인 서편한집이라는 토산 뱀신과
치병과 육아를 돕는 일뤠또를 모시고 있습니다.
물색이 참 곱네요..
난산리 마을을 돌아 나옵니다.
올레에서 만난 통오름 민박 고정화할망과 반갑게 인사 나눕니다.
신산리본향 범성굴왓 일뤠당으로 갑니다.
신산리는 중산간 지대의 마을들 중에서 가장 끝,
해변 가까운 곳에서 위치한 동네라고 해서 '끝동네(그등애)'라 불리었던 마을입니다.
물 사정이 어려워 생활에 불편을 느끼게 되어 물이 좋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을 따라 옮겨진 곳이 현재 신산리 해변이었으며
그 후 인구수가 늘어 호수가 증가해 1800년도 후반에 동리명을 신산으로 개명했다 합니다.
범성굴은 마을을 기준으로 볼 때 반대방향인 신도릿빌레일대인데
2008년에 예산을 지원받아 이곳에 당을 새로 지어 옮겨왔습니다.
좌정해 계신 분은 명오부인과 그 명오부인을 섬기던 심방이었던 문씨영감입니다.
본풀이를 한번 볼까요.
明天子 三兄弟가 나서 너무 글 잘해여 역적으로 몰려
父母내가 배에 먹을 것을 실어서 귀양보내
처음 대리는 朝天 정병堂에 近當하여 坐定하니
큰성任은 정중부인(鄭重夫人), 둘째 성任은 짐녕(金寧) 황세부인(夫人)
말젯똘은 新山이 고정남밭 명(明)오夫人, 거기 臣네는 문씨 영감....
조천과 김녕의 당은 지금 없습니다
이곳 명오부인이 계신당은 자리는 옮겼지만 아직 건재합니다.
온평리 본향당도 이곳에서 가지 갈라간 당입니다.
신산리 고장남밧 요드렛당입니다.
토산에서 가지 갈라온 나는 물또 지경에 있던 당입니다만
해안도로개설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본향당 건립과 함께 이곳으로 왔습니다.
본향당 뒤로 오다보니 별도로 이당을 오는 사람은 없고
본향당에 오신분이 들렀다 가신다 합니다.
포구를 멍하니 바라보다
신천리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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