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리입니다.
마을안 어떤 집의 작지잣.
천미연대입니다.
정의현에 소속되어
동쪽으로는 직선으로 6.9km거리에 있는 말등포연대와,
서쪽으로는 직선거리 5.3km인 소마로연대와 교신하였던 곳입니다.
따먹지도 않을 비파나무열매에 무한관심보이며 주변을 한바퀴 둘러봅니다.
조금 더 숲속으로 걸어가면 현씨일월당이 나옵니다.
현씨일월당
신목에 한복치마저고리를 예쁘게 입혀놓았습니다.
이당에 얽힌 슬픈 이야기...
아버님은 선씨웨다. 어머님은 고시웨다.
그 몸으로 무위오애 애중애기 한싀설에 죽억살락 한일곱설 나난 돌아탄싀 열다섯에 대천겁저울리젠 호난 어딜 가리요...
아 이렇게 쓰면 못 알아들을테니 번역본을 올립니다..
"현씨 아버지와 고씨어머니 사이에 태어 난 여자아이.
태어나서면서 고아가 되어 세 살 무렵 죽다 살아나고,
일곱 살 무렵부터 정신이 혼미해(아마 무병인 듯) 열다섯에 무병이 완연해졌다.
신내림을 받으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신내림을 받을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하여
앉아서 울고, 서서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현씨 애기에게 위로 오래비가 있어 동생에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신내림을 받으려 하나 무복도 없고, 방울, 쾌차 등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
" 누이야 울지 마라. 내일 군문에 진상하려 가는데 갔다 오면 돈이 생겨 내 너 요구하는 것들을 사오마."
오래비가 진상품을 싣고 고첫당으로 해서 큰바다로 나가는데
돌연 폭풍이 불어 배가 안보였고 헤엄치는 사람도 바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연대위에서 오래비를 전송하던 현씨 애기가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데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외치며,
연대 아래로 죽으려고 뛰어내렸다.
연대아래서 목이 꺾어져 며칠 후에 죽었다.
아무도 이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어 한이 사무쳤다.
술 한 잔 감주 한잔 못 얻어먹고 떠돌던 원한은
기미년 6월 14일 외부 심방인 김씨가 불러내어 비단옷을 두른 당에 앉혔다."
지독히도 인간적인 이야기입니다.
각박하게 살아간 사람,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 가지 못해 한이 맺힌 채 저승에 간 사람의 한은
현실 속에서 풀어야 합니다.
단지 그 한을 위로해주고 한잔 술로 달래줄 때 그 한은 계속 기억됩니다만
나는 너를 위해 줄 테니 너도 나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서로가 서로의 빈곳을 채워주는 공존의 역할을 할 때 그 한이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신천리 마을을 지나 현씨 아기의 오래비가 떠난,
그리고 빠져버린 고첫당 바닷가로 갑니다.
신풍리, 신천리, 하천리 세 마을을 통틀어 내끼라 합니다.
내(川)의 끄트머리라는 뜻이라 하네요.
개로천 또는 진순내라고 하는 내의 끝부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내끼라 하였는데
이를 다시 한문으로 川尾라하고 또 川자를 붙여 천미천이 되었습니다.
하여간 1840년 전후하여 웃내끼는 신풍이라 이름하였고
알내끼는 하천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후 알내끼에서 샛내끼를 분리하여 신천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신천리 지경 고첫당 바닷가에 있는 고첫당입니다.
코지에 있다고 해서 코지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당은
신천 마을의 본향이며,
음력 2월 13일에 영등굿을 치르고, 마을제도 이곳에서 치릅니다.
마을제를 지낼 때 대상 신위는 고첫당신령님이라 하더군요.
배고픈 다리를 건너 하천리로 갑니다
<10월의 어느날 추가>
잠깐 현씨일월당에 들렀습니다.
신목에 옷이 깨끗한 옷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사진 꾹꾹하여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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