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절오백 당오백

전통문화연구소와 함께한 당올레 기행 두번째 3

하늘타리. 2011. 6. 2. 22:33

 광령교아래 무수천 계곡을 흘낏보고 광령1리로 들어갑니다.

제주시내중심가에서 한 10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내가 사는 노형동에서는 바로 옆 동네입니다.

 


동네의 특성은 전형적인 중산간마을로 애월읍에서는 감귤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을명소로는 단연 무수천 8경을 꼽을 수 있고

천아, 붉은, 살핀오름을 거쳐 웃세오름까지가 광령리 지경으로
 한라산의 서북쪽 날개를 형성하고 있는 곳입니다.


1653년에 제주목사 이원진의 이름으로 편찬된 탐라지에 광령이라는 마을이름이 최초로 나오고
일제강점초기 광령 1리와 2리가 나뉘었고 1952년에 다시 3리가 분동되었습니다.

아파트 경내를 지나 광령1리의 본향 자운당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송씨대왕의 작은딸 송씨아미와 막내 송씨도령이 좌정해 있습니다.

 

 

 

 

 

이곳 광령 1리 자운당은 신목 밑동 큰가지하나가 부러져 고사한 후 찾는 이 없어

덤불과 잡초가 자욱하고 입구에는 아파트쓰레기장이 있었습니다만...
2009년 9월에 마을이장주관으로 깨끗이 정비한 후 당골들이 다시 찾아옵니다 

 

 

마을에서 정비할 때의 사진입니다.

 

 

다시 오늘의 모습입니다.

 

송씨대왕에게는 딸 아들 일곱이 있었다합니다.   

 

 그중 5명의 아들들과 두 딸들의 좌정처를 정해주다가

막내아들은 너무 어려서 작은 딸과 함께 원당봉수호신으로 보냅니다.

 

 두 오누이가 원당봉에 살려고 하니 개끗 냄새가 나서 못쓰겠다고 신엄 서쪽 자운당에 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남드르 절벽에 파도치는 소리가 너무 크다보니 수산 당동산으로 옮겼고,

그 곳에서도 물이 나빠 어쩔 수 없이 광령 당동산으로 와서 거주했습니다만

그곳에서도 작박거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당동산으로 돌아갔다가

광령1리, 2리, 3리로 가지 갈라져서 이곳에 좌정해 계십니다.

 원당봉에서 광령리까지 최소 4번을 옮기어졌고

 이곳 광령에서도 세 번을 옮기어 졌습니다.

어린동생 보살피며 참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광령리가 1, 2, 3리로 분동될 때 가지갈라가서

지금은 광령 1리, 2리, 3리에 모두 송씨 아미와 송씨 도령의 당이 있습니다.

 

 궤는 왼쪽 신목 앞에 하나 있습니다.
두 개의 화강암 석판이 연이어 놓여 있는데

그중 동쪽 굵은 팽나무 밑의 것이 누이 송씨 아미의 제단이고

서쪽의 작은 석판이 송씨 도령의 제단입니다.

 

 

철없는 막내 남동생의 응석을 받아주며 건사해주는 작은누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부러진 한쪽가지에서는 버섯이 피어 오릅니다.

 

마음아파하며 당을 나섭니다.

 

다랑굿마을 마깨낭당을 생각나게 하는 마가목이 당입구 건너편에 있습니다.

 

들어갈때는 당에만 신경쓰다보니

당입구에 있는 것을

당을 나올때야 보는군요.

 

본다고 다 보이는 게 아니고 관심있는 것만 보인다는거지요

 

감나무꽃이 피어 있는 큰길로 나와 큰차를 타고

마씨 미륵당으로 갑니다.
작은차는 좁은길 바로 질러가면 되는데 큰차는 큰길을 따라 조금 돌아야 합니다.

 

 마씨 미륵당으로 가는 길에 광령리의 전설들을 하나씩 떠올려 봅니다.


광령 3리 설촌시조라 하는 송자종에 관한 세곳의 용천수물 이야기.
광령2리 설촌시조 홍말김의 딸 신집(신댁)며느리 여장부 홍할망 이야기.
제주에 귀양 온 세왕자중 한 왕자의 시체를 물에서 건져 장사지내준 고찰방이야기.
선별감(현별감)네 백정무덤이야기.
남편을 죽이고 자기를 속여서 차지한 새남편에 분노하여 새남편을 죽게하고,

그사이에서 낳은 아이까지 죽도록 한 매정한 할머니의 무덤이야기.
타지에 나가서도 고향을 끔찍이 아낀 고명숙과 남죽이물이야기.
광령 폭낭굴 여우이야기.
그리고 옛 주인을 잊지 않은 의로운 개의 이야기  등 등...

 

 의로운 개 이야기를 옮겨 볼까요.

 

이곳 광령은 농경과 더불어 사냥이 중요한 생활 수단이었습니다.
사냥을 하는데 있어서 개가 반드시 필요한데 어디 좋은 사냥개가 있으면 하나 더 사려고 생각하던 사람에게

 마을 친구가 더럭마을에 좋은 사냥개가 있다고 귀띔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얼마짜리쯤 되느냐"고 의논하니

 "미녕 한 필은 줘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녕 한 필을 짊어지고 더럭마을로 들어가 개주인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당시는 미녕 한 필이면 웬만한 밭도 살 수 있었다고 하네요).
 "이 개 나 줍서"

주인은 한참을 생각하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개가 유명해져 다른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데 팔지 않고 제 욕심만 부리면 그 개는 얼마 못가 죽는다는 속설도 있고 해서

팔기로 작정했답니다.
 "얼마 받으쿠가?" "미녕 혼 필만 줍서."

그렇게 흥정을 하여 미녕을 주고 개를 끌고 나오려는데

"내가 아끼던 개를 파는데 어찌 제값을 다 받습니까, 미녕 반이랑 가정 갑서,

경허고 이 개는 주인이 사랑하는 줄 알면 그냥 좇아가니 걸리지 맙서"하고 선뜻 미녕 반 필을 돌려줍니다.
그래도 아직은 미심쩍어 새끼줄로 개를 걸려 집으로 돌아가는데

서죽잇못(더럭 인근의 연못)에 이르자 웬 시커먼 도적놈이 쓱 나타나

미녕과 개를 휙 낚아채고 도망쳐 버립니다.

손쓸 틈도 없이 얼떨결에 개와 미녕을 빼앗긴 그는 ‘이젠 망했다’하고 멍청히 서 있는데

갑자기 "사람 살려"하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 나는 곳으로 급히 달려가 보니,

개가 도적놈을 물고서 떡 버티고 있더랍니다,

그제야 안심한 새 주인이 "내불라"하고 명령하자 개는 이빨을 풀고 슬쩍 뒤로 물러섰다 하네요.

개의 진가를 발견한 주인은 "이 개가 명구긴 명구구나" 생각하며 목의 새끼줄을 풀어 내렸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그는 집안이 곤궁하여 비록 자신은 굶더라도 개만큼은 잘 먹이는데

이 개가 하루는 이리저리 가로 질러 뛰며 자꾸만 먼 산을 바라보더 랍니다.

사냥을 가자는 신호였던 거지요.
이를 눈치 챈 주인은 개를 데리고 사냥길을 나섰습니다.
천아오름 쯤 갔을 때 산을 타고 노루 한 마리가 비실비실 올라가는 게 보이는데,

이 사냥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더랍니다.
 "이놈의 개가 잘 먹이다 보니…."

주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때려서라도 버릇을 가르치려고 몽둥이를 치켜드는데,

멀리서 큰 웅장(숫노루)이 산을 타는 게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 사냥개가 번개같이 내달아 단번에 수노루를 물어 죽입니다.

그제야 주인은 이놈이 처음 것은 적다고 나무래서 그랬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그날은 운이 좋아 큰 웅장 두 마리를 사냥했는데

도저히 다 옮길 수가 없어 한 마리는 숨겨 두고 한 마리만 짊어지고 내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추렴을 해서 노루고기를 끊여먹고 나머지는 처마에 매달아 놔뒀는데

이튿날 보니 뒷다리하나가 없더랍니다.

주인은 이를 보고 내심으로 "개도 지가 먹고 싶으니까 떼어 먹었구나" 생각했지요.
이튿날은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사냥도 하고 숨겨둔 노루도 찾아올 겸해서 산으로 갔습니다.

그날도 개의 활약으로 운 좋게 두 마리를  더 잡아 세 마리를 짊어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보니 또 뒷다리가 없어졌습니다.

당시는 개가 사냥을 하면 뒷다리 하나는 개의 몫이라 해서 나눠주는 습속이 있었기에

주인은 "개가 제몫을 찾아 먹는구나"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개주인이 더럭마을로 잔치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원래 개주인에게 들리게 됐는데

"하, 거 왜 자꾸 고기를 보냅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전후 사정을 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영통한 개는 늘 원주인을 못 잊어

사냥을 하면 자기 몫의 고기를 밤새 원주인집에 가져다 놓았던 것입니다.

이에 감탄한 주인은 오래도록 그 개를 아끼다가,

개가 죽자 아담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저는 참 재미있게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몇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생각하며 마씨 미륵당앞 큰길에 내렸습니다.

 

큰길가 분홍토끼풀

외국에서 목축사료사료따라들어온  아이입니다.

어차피 자리잡은 아이 예쁘게 봐주세요.

 

 

마씨 미륵당에 대해서도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의 유래를 보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람이 죽은 후 모셔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언뜻 생각나는 경우만 하여도

마라도의 아기업개당, 신흥리의 볼래낭 할망당, 함덕리 서모오름 산신당 등이지요.
특히 함덕리에서는 넋들여주던 심방들이 돌아가시자

그 심방의 무덤을 신체로 하여 모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좃나니모루일뤠당, 한영할망당)

 

그리고 당을 관리하던 심방이 죽어서 그곳 당신과 함께 모셔지는 경우도 제법 있습니다.. 

이곳 마씨 미륵당이 그런 경우에 속합니다.

원래 이곳부근에는 목축을 관장하는 신을 모신 산신당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궷물오름 기슭에도 있다하고 (못 찾았습니다).. 노꼬메 입구에도 있었다 하고... 
이곳도 미륵을 사냥 목축의 신으로 모시던 산신당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씨 미륵당, 마용기당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한라불교 2002년 1월에 게재된 문무병이사장의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광령리 일뤳당은 미륵부처를 모시는 미륵당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씨당'  '마씨 미륵당' 또는 '마용기당'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당을 지키던 마(馬)씨 하르방이 죽어서 이 당의 당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마씨 하르방은 1900년대 초 출생한 사람이다.

1970년대에 70살 나이로 죽었는데

그가 살아왔던 행적으로 인해 백년 안팎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미륵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옛날부터 광령리에는 길이 험하여 찾아가기 힘든 당이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일뤳당(七日神堂)이라 하여

어느 마을에서나 마찬가지로 음력 초이레, 열이레, 스무 이렛날 아이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여인네들이 찾아가는 당이었다.

그러니까 이 미륵당은 아이를 잘 길러 주는 산육치병(産育治病) 신(神)의 당이었는데

이제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이 당에만 갔다 오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당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미륵불 연기설화라 할까 은밀하게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마씨 하르방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영웅적인 존재는 아니다.

미륵불의 출현이라고 믿을 만한 존재는 더욱 아니었다.

다만, 일뤳당의 서쪽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그는 키가 육척이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하는데

자칭 '한라산신령'이라고 했다.

마치 여러 마을의 당 본풀이에 나오는 '밥도 장군, 떡도 장군함도 장군'을 연상케 할 만큼

촐(꼴)을 등짐으로 져 나를 때는 눌(낟가리)만큼 크게 져서 작은 산 하나를 져 나르는 것 같았고,

방목하던 소를 잃어 버렸을 때는 마씨 하르방에게 부탁하면 귀신 같이 찾아 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거칠게 들러퀴는(날뛰는) 소일지라도 양뿔을 두 손으로 잡아 꼼짝을 못하게 한 다음 고삐를 묶어 주었다고 한다.

한라산의 산신들 중에는 테우리(牧童)가 찾아가 빌면 잃어버린 소를 찾아 준다는 신들이 많다.

그렇다면 마씨 하르방도 살아 있는 산신령이라고 믿을 만도 하다.


이런 그의 행적과 함께 새로운 소문이 하나 떠돌게 되었다.

광령리 미륵당에 찾아가 미륵불에게 빌면 누구나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육지에까지 퍼져 육지 사람들도 찾아왔으며

심지어는 어느 법무부장관의 부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곳에 찾아와 기도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런데 어느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

아들을 낳기 위하여 기도하러 간 아녀자들이 이 마씨 하르방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게 되면서부터

이곳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말이 퍼져 나간 것이라고 한다.

증언자가 1950년경에 마씨 하르방에게

"지금까지 낳아 준 아들을 전부 주민등록에 올리젠 허민(올리려면) 몇 명이나 되염직 허여?(될 것 같은가?)

아마  400명은 될테주이?" 했더니

 "그것만 되어? 천명도 넘주." 하더라는 것이다.


마씨 하르방이 살던 곳 인근에 대나무 밭이 있는데

사람들이 대나무를 잘라가려고 하면 겁나게 욕설을 퍼붓다가도

술을 한 병 들고 오면 필요한 만큼 베어가도 좋다고 허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은 지금도 사람들은 술을 올리고 대나무를 마음대로 베어간다고 한다.

마씨하르방은 나이 칠십쯤 되었을 때 미륵당 옆에 초가를 짓고 살았는데

 어느 날 술을 먹고 잠자다가 집에 화재가 나서 불에 타 숨졌다고 한다.


살았을 때 자칭 도사다 산신령이다 하는 주장 속에는

소를 찾는 능력, 소를 다루는 능력 등은 산신령의 힘을 가진 것으로 인식 된 것이며,

그의 강한 정력이 아이 못 낳는 여인에게 아이를 낳게 했다는 소문은

효험은 어쨌든 불륜이었기에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더욱 신비롭게 신화처럼 살아남은 것이다.

신앙민들에게는 그가 살아 있었을 때 그의 강한 힘을 믿었고,

죽어서도 그 사람을 조상신으로 믿고 모시면 신통력이 발생한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죽은 그가 사내아이를 낳게 해 주는 조상 미륵으로 모셔지는 것은

민간신앙의 주술성과 관련이 있다."

문무병이사장이 마을사람에게 들어 채록한 내용이라 합니다만...
마용기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용기는 1900년대 출생한 것이 아니고 1900년대 활동한 사람이랍니다.
심방이었던 마용기는 1900년 초 회천동 폐사지에

사람 모양의 자연석으로 다섯 구의 석불을 조성하여 모셨습니다.
이 석불들은 이곳에 치성을 드리면 그 효험으로 득남하게 된다는 속설 때문에 유명해졌고,

득남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처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12년에 마용기는 그 자리에 만덕사라는 절을 창건하였습니다.
 

 

심방이 무슨 절을 창건하냐고요?


관음사를 창건한 안봉려관도 원래는 심방이었습니다.
심방으로 어느정도의 돈을 모은 그녀는

토굴 속에서 개남보살(관세음보살)을 모시다가 

전북위봉사에서 1892년에 출가한 강창규 스님과 1894년 출가한 김석윤 스님의 도움으로

안도월스님을 주지로 하는 법정암(지금의 관음사)를 1912년에 창건 한 것입니다.

대화주의 역할을 하신 것이지요.
그 후 강창규, ·방동화 스님을 모셔와 제주 각지의 사찰을 창건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만덕사라는 절을 창건한 마용기는

김보관, 송재술, 현갑생 등과 여러 해 동안 절을 운영합니다.
그러나 동네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이 절이 생긴 후 마을의 수맥이 끊어지고 말았다는 마을주민들의 동요가 있어

만덕사는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육지에서 스님을 모셔왔지만 결국 폐사되어 

다시 석불단만 남게 되었습니다.


화천사 창건 당시의 상황은 1973년 봄 화천사 주지 김운공 스님이 세운 ‘화천사 창건기’ 비석에  드러나 있습니다.
“서기 1912년 임자년 봄에 마용기가 사찰을 창건하여

여러 해 동안 온 힘을 다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오고가는 사람들마다 안타까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중략)”


 마용기는 송씨 심방에게 석불단을 넘기고 광령일대로 돌아와

목축신을 모신 산신당의 심방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만덕사 자리에는 1968년도에 마곡사에서 오신 스님이

마을사람에게 주변땅을 기증받아 화천사를 세웠으며 계속 중창중입니다.)
 

지금이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 때 테우리코사를 지내는

목축신을 모신 산신당 심방의 수입은 제법 좋았다 합니다.


그리고 특히 잃어버린 말을 찾아주면 그 보수는 엄청났습니다.
조선시대말기까지 말 한 마리 값은 말을 관리하는 테우리몸값의 세배였습니다.
이건의 제주풍토기에 의하면 말을 잃어버린 테우리는

밭과 소를 팔고 솥과 농기구를 팔고 또 모자라면 일가친척에게 나누어 징발하였다하고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말을 잃어버린 테우리가 그것을 배상하기 위해

부모를 판 자가 5명, 처자를 판 자가 8명, 자신을 팔아 머슴이 된 자가 11명이고, 동생을 판 자가 26명으로

자기 재직간 총 96명이 패가망신했다고 적혀있읍니다.
이런 형국에 그 어떤 않좋은 소문이 돌더라도 잃어버린 말을 찾아주는 능력을 갖춘 마용기는

한라산 산신령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마용기는 70세 되던 해에 한라산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기도생활을 하다 죽어 민대가리동산에 묻힙니다.
(그날 함께 기행하던 강정효선생이

마용기의 기도생활을 하던 터의 흔적이 Y계곡에 있다고 하시네요)

 

민대가리동산도 광령리지경입니다.
한라산 북서쪽의 Y계곡을 사이에 두고 왼쪽봉우리는 만세동산이라하고

오른쪽의 봉우리가 민대가리동산입니다.
그곳에 있는 마용기의 무덤의 석물입니다.

 

일대의 목축을 관할하는 산신당을 관리하던 마용기가 사라진 후

광령사람들은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자연석으로 된 돌미륵 옆에

나름 정성을 들여 또 하나의 석상을 세워 제를 올립니다.


그런데 2003년 초에 석상이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2002년부터 준비해 2007년 개장한 돌문화공원에서 몇 곳의 신당을 재현하였는데

마씨 미륵당이 석상이 없어지기 전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나마 다행이다 해야 하는지...

아니면 얼빠진 일인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돌문화공원에 재현된 마씨 미륵당입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당을 둘러 봅니다.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러 안개속을 다가오는 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오늘의 기행을 마침니다.

Yuriko Nakamura   Album In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