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절오백 당오백

전통문화연구소와 함께한 당올레 기행 1.

하늘타리. 2011. 5. 18. 17:20

당으로 가는 올레,
당올레.


제주의 어머니들이 큰 구덕에 정갈한 제물을 차려 등에 지고 다니던

 신을 만나러 가는 길.
언제나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걸었던 좁은길.
여러 가지 이유로 정성으로 걸었던 흔적들을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아있는 당올레를 찾아 (사)제주전통문화연구소에서 

신화와 마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당올레 기행을 실시했습니다.


그 기행에 끼어 당올레를 걷습니다.

 

송당리입니다.


1만8천 신들의 고향, 제주의 본향이라 합니다.
특히 오늘의 답사를 주관하는 전통문화연구소 문무병이사장은 송당은 신당의 성지이고 신시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에 이 마을에서는 축제를 하면서

마을의 진입부인 송당머리에 제주의 모든 남신과 여신을 상징하는 남녀신상 2기를 세우면서

송당마을이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새로운 제주문화의 메카임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 답사회 항해자님의 몇년전 사진입니다.
  저도 축제때 현장에 있었습니다만 송당리가 제주의 모든 신들을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진을 않찍었습니다.)

 

 

송당리 본향 웃손당 당오름 백주할망당으로 갑니다.

 

 

강남천자국에서 태어났다하기도 하고 서울 김정승대감의 딸로 태어났다고도 하는  백주또는

 천기에 따라 제주특별자치도 송당으로 찾아와 소천국과 백년가약을 맺습니다.
자식이 불어가자 부인은 남편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지요.

 
어느 날 밭을 갈러 가는 남편을 위해 백주또는 밥과 국 열여덟 동이를 소길마에 걸어 두고 옵니다.
소천국이 밭을 가는데 태산사 중이 지나가다 점심을 청하기에 허락합니다.
그러나 그 중은 밥과 국 열여덟 동이를 모조리 먹고 가버려 소천국이 밭 갈던 소와 남의 소까지 잡아먹고야 말았습니다.
빈 그릇을 가지러 온 백주또는 소를 잡아먹은 소천국이 배때기로 밭을 가는 것을 보게 되고

소천국의 전후사정을 들은 백주또는 '소도둑하고는 못산다.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분산 하자'면서 이혼을 선언합니다.
소천국은 정동칼젯 딸을 소첩으로 삼아서 사냥질을 하며 사는데, 그러는 사이 백주또가 아들을 또 낳았습니다.

 


아들이 세 살 나자 백주또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보이기 위해 소천국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아들은 소천국 무릎에서 수염을 잡아당기는 등 버릇없이 굴고 화가 난 소천국은

아들을 석갑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답니다.

아들은 용왕국에 가서 세변을 평정하고 그 곳에서 하사하는 큰 벼슬을 물리치고 송당으로 돌아옵니다.
세 살 때 석갑에 띄워 보낸 아들이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웃송당으로 올라가 당오름 당신이 되고, 아버지는 알송당으로 내려가  고부니모루 당신으로 좌정했다합니다.

 

이것이 문무병이사장이 채록한 박인주본 송당 본풀이입니다.

 

 

 

 

 

 

 

 

 

문무병 이사장은 이 송당 본풀이가 제주도 당신 본풀이중의 뿌리로

웃송당리의 신은 금백주이고, 셋송당리의 신은 세명주이며, 알송당리의 신은 소로소천국인데

그 아들이 18, 딸이 28, 손자 친척이 378이 된다는 말이라고 강조하십니다만....

 

저는 조금 생각을 달리합니다.

 

무식한 탓에 추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이 송당 본풀이는

김녕궤네깃당 본풀이가 나온 다음 그 후 한참 뒤에 그 앞부분이 각색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궤네깃당 본풀이를 옮겨봅니다.

"강남 천자국에서 솟아난 백주또가 제주도의 알손당에서 솟아난 소천국을 찾아와 부부가 되어 산다.
아들 5형제를 낳고 여섯째는 포태중일 때, 백주또가 남편에게 농사짓기를 권했다.

많은 자식을 먹여 살릴 방법인 것이다.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소천국은 부인의 말대로 소에 쟁기를 메어 넓은 밭을 가는데,

배가 고프자 밭 갈던 자기를 소를 잡아먹고 또 이웃 밭에 풀을 뜯는 남의 소까지 잡아먹어 겨우 시장기를 면했다.

부인이 와서 보고 남의 소까지 잡아먹었으니 소도둑놈이 아니냐하고 말다툼이 생겨

소천국은 쫓겨나고 부인은 여섯째아들을 낳는다.
이 아들이 세살이 되자, 아버지에게 데려갔는데,

아들은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아버지의 수염을 뽑고 가슴팍을 치곤했다.

아버지는 불효자식이라고 야단치며 아들을 돌함에 담아 바다에 띄워 버렸다.

돌함은 동해 용왕국에 표착하고 용왕국에 들어가 용왕국의 막내딸과 혼인한다.

용왕국에서는 융숭하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지만, 이 사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내 나라는 소국이라도 돼지도 잡아 전마리를 먹고 소도 잡아 전 마리를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용왕국에서는 사위 손님 하나 대접 못하랴 하고 매일 돼지와 소를 잡아 대접하기 시작했는데,

그 엄청난 식성에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용왕은 할 수 없이 사위와 딸을 다시 돌함에 담아 바다에 띄워 버렸다.
돌함은 강남 천자국에 표착하고,

마침 일어난 강남 천자국의 병란을 평정하여 대공을 세운 후,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왔다.

죽으라고 띄워 버린 아들이 살아 돌아옴을 안 부모는 웃손당과 알손당으로 각각 도망가 죽어 그곳의 당신이 되고,

여섯째아들은 김녕리의 당신이 되려고 이 마을로 내려왔다.

김녕리 사람은 누구 하나 대접해주는 자가 없었다.

아들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갖가지 흉험을 주어 당신으로 들어서려 함을 알렸다.

이것을 안 마을 사람들이 모여 모실 자리를 정하고 물었다.

“무슨 음식 잡숩니까?”

“소도 잡아 전 마리를 먹고 돼지도 잡아 전 마리를 먹는다.”

“가난한 백성이 어찌 소를 잡아 위할 수 있습니까? 가가호호에서 돼지를 잡아 위하겠습니다.”

“어서 그리 해라.” 이처럼 양해가 되어

1년에 한번씩 돼지를 잡아 물 한 방울도 덜지 않고 위하는 신당이 되었다."

 

왜 궤넷깃당본풀이가 먼저 나왔다고 생각하느냐고요?

 
구좌읍 송당리의 백주또는 자손이 번성하여 아들이 18, 딸이 28, 손자·방계후손이 78명(또는 3백78)이라고 합니다.
제주도내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큰 수호신집단이지요.

그렇다면 이 신앙은 언제 생성됐으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번성하게 됐을까?


이상한 것은 이렇게 번창했으면서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각종 옛 문헌에는 송당리의 신앙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심지어 1702-3년대 제주목사였으며 도내 마을신당을 모두 파악한, '당(堂)오백 절(寺)오백'(기록에는 129개소)에도

광양당이나 차귀당, 애월·귀덕·김녕 등의 신앙행위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송당의 신앙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또 이 송당리 신앙이 특이한 것은 신들이 金씨라는 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주축이 돼 온 이른바 상단골은 광산 金씨집안인데

이들은 백주또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우리 김씨 집안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죽어서도 우리를 수호해주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매해 제사를 지내는 거야" 하고 말합니다.
조상신이 마을신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원래 백주또의 당이 여기가 아니고 안친오름에 있다가 이리 온지 채 100년이 않된다 합니다.


또 마을설촌전설에 도리송당이 나옵니다.
맑은 조상할망인 백주또가 원래 도리(교래리)에 살다가 송당에 건너와 살았다는데서 연유했다하여 그렇게 불러왔답니다.


그리고 제주도의 장수설화(현길언 지음)에 의하면 김녕에 늙은 총각이 있었는데

상대방을 구하지 못하던 차에 마누라감이 송당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상면하고 천상배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송당(당오름)의 시조가 됐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주도무가를 집대성한 현용준이 채록한 무가본에는 송당 본풀이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그리 유명한 당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90년 이후 집필한 책에 타인이 수집한 본풀이를 짧게 언급할 뿐입니다.

 

결국 백주또에 대한 신앙은 다른 마을의 신앙이 근절되다시피 하자 그 이후 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이거나

근대에 들어와 어느 심방에 의해 그렇게 스토리가 엮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1957년에 장주근이 채록한 고봉선본과 1960년대에 진성기가 채록한 김오생본을 포함한 송당 본풀이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다가 문무병이사장이 1980년에 채록한 박인주본이 김오생본을 그대로 수용하여 하나의 스탠더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애월읍 일대에도 성씨가 있는 여신이 신앙의 대상인데 바로 송씨 할망입니다.
송씨할망에 대한 신앙은 제주시 도두동에서부터 서쪽으로 제주시 서부지역과 애월읍 일대를 대부분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송씨할망에 대한 신앙은 백주또의 아들들(김씨하르방)에 대한 신앙보다 훨씬 앞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도두동의 당신화와 애월읍 하가리 등의 신화를 보면

송씨할망이 이미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를 잡은 후 김씨하르방이나 한라산신이 뒤늦게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송씨할망신의 유래를 설명하는 신화는 애월읍 광령리 일대에도 남아있는데

이 신화에 따르면 송씨할망은 송제대왕의 딸로서 원래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의 신이었다고 합니다.
원당봉은 고려시대인 1330년께 元나라의 황제가 절(불탑사)을 짓도록 했다는 곳으로

지금도 당시 세웠다는 석탑이 남아있습니다.
元의 관할 하에 있던 시대 절과 당이 성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송씨할망에 대한 신앙도 그시대에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합니다.

 

백주또이야기는 구좌읍 세화리 본향당 본풀이에도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백주또가 외방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백주또의 남편이 외방에서 옵니다.

"금상님은 본래 서울 남산에서 솟아난 천하 명장인데,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제주도로 도망 왔다.

피난지를 제주도로 정한 것은 제주도 세화리에 아름다운 여신 백주또가 있음을 알고

 세상에 펴지 못한 기세를 이 여신과 결혼하여 달래자는 데 있다.

그는 제주도에 도착하자,

곧 세화리 본향당을 찾아가 천잣도(天帝)에게 “백주또와 천정배필이 되기로 찾아왔습니다. 고 하자

천잣또는 그 식성부터 물었다.

육식을 한다하자

천잣도는 “더럽다! 어서 나가거라,

우리는 손으로 벤 음식은 손 냄새나서 못 먹고, 칼로 벤 음식은 쇳냄새 나서 못 먹고,

실로 밀어 끊은 정과나 말 발톱 같은 백돌레나 백 시루떡이나

놋그릇의 메나 청감주, 무채, 계란 안주나 먹는다.

우리와 같이 좌정 못하겠다. 나가거라.”
이렇게 거절하니, 금상님이 뒷머리를 긁으며 나왔다.

백주또가 옆에 와서 “나하고 천정배필이라면 먹던 돼지고기를 참기로 하면 어떻습니까?” 한다.

금상님은 어쩔 수 없이 돼지고기와 술을 참기로 약속하고 백주또와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금상님은 육식을 금하고 몇 달이 지나가니 피골이 상접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다.

백주또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큰 돼지를 기르는 집에 흉험을 주어 돗제를 하도록 알렸다.

이로부터 금상님은 돗제를 받아 먹게 되었는데,

돼지를 잡으면 먼저 털, 피, 발톱을 받아먹고, 고기를 삶으면 그 고기 전 마리를 잡아먹는다.

이렇게 고기를 먹은 후, 금상님은 소주로 목욕하고

청감주로 양치질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서 천잣도, 백주또와 같이 좌정한다."

 
하여간 지금 송당은 제주당신의 원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송당계 당신의 계보에 대해서는 여러 심방의 전승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이중 열여덟에  이르는 신당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이는 김오생 심방뿐이 없습니다.
그런데 김오생 심방의 경우 자신이 주로 활동하던 지역의 신당들을 대거 계보에 편입하면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당(광정당, 광양당, 내왓당, 토산당, 와흘당 등)을 끼워 넣어

열여덟 아들로 송당신의 계보를 만든 것 같습니다.


신화가 자연적으로든 인위적으로든 변형되는 것이 사실이고

더욱이 특수한 계층의 특수한 집단에 의해 고의로 변형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송당은 제주 동북부 신당들의 원조로 정립시키고

제주 서북부와 남부 신당의 원조는 따로 규명하는 것이

신화와 신앙의 변천사를 되짚어 

주민들의 삶과 사회상의 변화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덕천리 본향 거멀 문국성 산신당으로 갑니다.

 

 

 

 


거멀이라서 한문으로 금흘이라쓴 것인지 금흘이 거멀로 발음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거멀은 구좌읍 덕천리의 옛 이름 금흘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본풀이에는 문국성이 거론되지도 않습니다.
본풀이 앞부분을 보면
"체 오름 앞 몰오라 모신 당은 구엄장 신엄장 송씨 할으방 송씨 할망 불 잘 놓는 정포수 .....이렇게 진행됩니다.
아마도 자청비이야기에서 문국성이야기를 들은 어느 심방이 문국성 산신당이라 이름한 듯 합니다만
마을에서는 금흘산신당(금산당)이라하여 개로육사또와 산신하르방을 모신다 합니다.
한 3~4년 전인가에 지원을 받아 당을 정비하였습니다.

 

 

 


제일은 정해져 있지만 단골들이 생기맞는 날 다니고 있습니다.

다니시는 단골들에게 본향의 개념은 없고 가내평안에 대한 비념을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이라면 이런 것 저런것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민이 믿고 싶은 데로 믿으면 됩니다.


기독교에서도 구약 39서, 신약 27서 외에는

사도 베드로 행전이나 사도 바울 묵시록, 사도 바나바 행전, 사도 도마 행전, 빌립 집사의 기록, 마리아 승천기 등 많은 기록을

전부 외경, 위경 등으로 취급하여 신앙의 보조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신약 4대복음의 기술내용과 관점이 다르더라도 필요한 부분만을 인용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문화와 역사로 이해하여 연구하는 사람들은

종단에서 신앙에 도움이 않된다고 정경에 포함하지 않은 많은 문서들을 찾아 연구하고 대조합니다.


당신앙에 대해서도 신앙 그 자체의 문제라면 우리가 이렇게 찾아다니고 알아보고 할 필요 없이

믿는 이들만의 관심사로 치지도외할 수 있습니다만,
제주생활의 원류이고 뿌리라면...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라면

대조할 수 있는 것, 규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노력을 치열하게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앙연구에 대해 가장 권위가 있다고 인정되는 전통문화연구소에서 주관하고

문무병이사장이 직접 안내하신다기에 따라 나섰습니다만......

많은 사람과의 답사길..그리고 주제가 당올레이다보니 무엇을 묻고 확인하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용히 따라갑니다.

 

그리그  피아노협주곡 A단조 작품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