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각입니다.
광화문 앞을 지나 효자동길로 해서 자하문을 간후
최근 사진인심이 좋아졌다는(개방초에 왔을때는 거의 사진기를 꺼내질 못하게 했지요) 북악을 지나
서울 성곽길을 걷고자 했습니다만
동수각에서 길을 건너려는데 오른쪽으로 표지석이 하나 보입니다.
한성부 북부관아터.
조선시대 5백여 년간 서울 북쪽지역의 주민행정을 담당하던 관아 터라는 설명이 있군요.
북촌에 왔다는 이야기이지요.
문득 최근 북촌일대에 한옥을 관람하러 온 관광객을 위한 상업시설이 늘어나면서
전통의 거리인 척하는 제2의 인사동이 되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된다고 하는 기사가 생각나고
아마도 그 변화를 막을 능력있는 이 없을테니
더 이상 변하기 전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건춘문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 북촌으로 스며듭니다.
북촌은 조선 시대에, 사대문안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마을들을 통틀어 이르던 말입니다.
권력과 거리를 둔 사람들이 모여 살던 남산 기슭이 남촌이라면
권력의 맛을 보며 그 언저리를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 북촌입니다.
좋게 말하면 정치, 문화, 행정의 중심지이자 오피니언리더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북촌이 전통적인 한옥마을의 모습은 아닙니다.
1920년대 후반에 옛 한옥들이 없어지고 구한말형식의 중소 규모의 한옥들과 서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부터 강남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부모들의 교육열을 이용 개발을 촉진하고자
1970년대 초반 북촌일대 유서 깊은 학교들을 강남으로 이전 시켰습니다.
그 빈자리에 현대사옥으로 대표되는 여러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저런 개발제한을 가하다보니
옛것과 현대적 건축물이 공존하고 있는 지금의 북촌이 형성된 것입니다.
골목길을 들어서는 나를 반기는
상상의 동물의 모습을 한 토우...아니 석상이라 해야 하나
고조선 문화관이라는 간판이 있는 건물 앞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습니다.
성황당을 형상화해 놓은 듯하고 비손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비는 손이라는 뜻일까요?
rubbing hand라고 써놓은 것을 보니 맞나봅니다.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일가에는 화목동이...
예! 비는바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골목
우리는 꽤나 전통에 집착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문화민족이라서가 아니고
수많은 전쟁과 식민지배로 인해 자기 것을 제대로 지켜오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도 그 전통을 생활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뚝 떨어뜨려서 손도 못 대게 하거나
아예 돈벌이와 연계를 시키지요.
사람이 사는 동네면 그곳에 사는 사람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주민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이 계속 없어지고 관람객을 겨냥한 상업시설로 계속 바뀌어 나가면
결국 이 마을은 결국 삶의 냄새는 없는 박제된 마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걱정하며 이곳에 왔습니다만
그 생각은 않하고 그냥 보이는 데로 발길 가는 데로 걸어 보겠습니다.
보임의 너머에서 사유하기. 봄!
갤러리이름인데 쉬운말 참 어렵게 꼬아놓았습니다.
고미술의 귀환과 향유전.
한다는 게 아니라 했다는 이야기.
또 다른 골목 앞을 지납니다.
덕성여고네요.
이런 건물이 있었나? 리모델링의 위력?
갑자기 웃음이 나네요. 나 중학교때 덕성여고누나들 스스로 교복을 보고 하던 말.
항아리치마...
학교정문기둥 앞 감고당터 표지석.
덕성여자중학교
옛날에는 빡간벽돌 건물이었던 것 같은데...아닌가?
먹쉬돈나라는 떡복기집 벽
떡볶이를 아주 맛있게 한다고 소문나서 손님이 아주 많았답니다.
그때 찾아왔던 손님들의 방명록입니다.
손님이 많다보니 잠깐 소홀했나봅니다.
골목앞을 지나는 몇몇이 까르르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가게 이름의 뜻이 먹고 쉬지 말고 돈 내고 빨리 나가라라는 뜻이라고...
다시 좋아지겠지요.
그때 또 오세요.
egg라는 커피집
자랑하는 까페라테 한잔에 마음을 녹이고..
윤보선 생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들어가 볼 수는 없습니다.
안동교회에서 설치한 북촌길 안내지도
사진은 안 찍었습니다. 아니 못 찍었습니다만 바로 앞에 안동교회가 있습니다.
예배시간이 다 되었는지 차들이 계속오고
몇몇 분들이 교회 앞에서 차량안내하시고
또 많은 분들이 교회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찍기가 애매하더라고요.
1909년에 설립된 예장통합측의 장로교회입니다.
꽤 오래전부터 여성장로를 임명한 진보적인 교회입니다.
다시 내려갑니다.
아름다운 가게 1호점 (이제는 본부라 그러나?)
가게 옆 조형물
돈과 힘이 없어도 조용히 남을 도우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는 이야기..
공정무역가게 그루
어디로 갈까?
화살표 반대방향으로 갑니다.
풍문여고
풍문여고는 1937년 안유풍여사가 휘문소학교를 세웠다가 1945년 그 자리에 세운 학교입니다.
안유풍은 민영휘의 부인입니다.
민영휘가 세운 학교는 휘문, 그 부인 안유풍이 세운 학교는 풍문.
어떻게 돈을 벌었나는 묻지마시고 나중에 두부부가 육영사업을 하셨다는 것만 기억하세요.
다시 올라가서 골목 안으로...별궁터 부근 별궁식당.
안동별궁은 그 자리에 풍문여고가 서 있지요.
풍문여고의 서쪽 돌담이 안동별궁의 것입니다.
고종의 아들 의친왕이 죽은 곳이기도 하고
순종의 가례가 두 번이나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막힌 골목에 연이어진 목조주택
선학원, 중앙선원
일제 때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2년 8월 6일자 기사를 보면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선리참구원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무런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데 암(癌)으로서의 존재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그 내용과 구성 인원 등 자세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다."
여기서 선리참구원이란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설립하여 일본식으로 물들어 가는 불교계에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던 선학원이 1934년 12월 재단법인화하면서
그 이름을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바꿉니다.
일본불교는 병합이후 들어온 것이 아니고
한말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지요.
개항 직후인 1877년에 부산에 진종사찰 동본원사 부산별원을 설치한 이래로
신자 및 승려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우선 승려에게 대처식육을 허용하다보니 승려지원자가 많았고
사찰도 산중턱 깊숙한 곳이 아닌 마을 주택가에 있어서 신자들도 찾아가기 쉬웠고
그렇게 까다로운 의례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10년 한일병합 무렵에는
이미 조선에 일본불교가 6개 종단 11개 종파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1911년에 사찰령이 공포됩니다.
조선의 사찰 중 큰 사찰 30개를 본사로 지정해 본사 주지를 총독부가 임명하는데
주지가 될 승려는 일본에 유학을 보냅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한 승려들이 대처풍습에 따라 결혼해서 귀국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불교, 조선불교 구분이 않됩니다.
이런 시국에 개탄한 조선불교의 고승대덕들이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하는 선방을 따로 하나 만들어 보자해서
1921년에 선학원을 설립합니다.
선학원 이름에 寺나 庵이 아니라 院을 쓴 것은 총독부 사찰령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만....
돈이 없어서 이름만 걸고 있다가
1931년 寂音스님이 1931년 주지로 취임하면서 선학원은 중흥되기 시작합니다.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고
주지스님이 침을 잘 놓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져
침을 맞으러 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 것으로 돈이 모였습니다.
하여간 그 돈으로 전국의 禪僧들을 모아 全鮮首座大會를 1931년, 34년, 35년, 39년에 개최했습니다.
특히 1935년에 연 수좌대회에서 총독부의 후원을 받는 30본사의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맞서
조선불교선종이라는 새로운 종단을 탄생시키고 종헌을 만들었고
마침내 전국의 선승들을 통솔하는 중앙선원이 설립됐습니다.
해방 후 불교 정화운동의 토대가 된 것이지요.
그 과실은 조계종이 다 따먹었고
지금은 거대 불교종단들 틈새에서 상대적으로 쇠락해져 있습니다만
올해로 90년째 수행자들의 공동체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명문당.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무엇일까요?
낱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크라운 출판사의 자동차 운전면허 예상문제집이랍니다.
그 다음이 대한민력입니다.
토정비결책인 대한민력은 남산사 등에서도 출간하지만 명문사판이 가장 잘 팔린답니다.
이곳 명문당은 한학자인 송정 김혁제 선생이 1923년 10월 설립해서
적선동에서 운영하면서 보통학교 교재, 전과로 만들어서 번창했고
1970년대 후반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은 그 아들이 낡은 건물을 유지하면서 출판사로 쓰고 있는데
건물 전체가 온통 책이라서 예전에 나왔던 책을 정리하는 것도 힘들다고 한답니다.
골목을 왔다 갔다 몇 번을 하면서도 조선어학회 터로 들어가는 골목을 못 찾았습니다.
기억력이 문제...?
갤러리 본
유리너머로 작은 인형들이 모여 있는 것이 꼭 콜로세움에 모여 있는 군중 같고
몇 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은 패배한 검투사 같네요.
자기들은 다르다 하지만 사실 똑같은 놈들끼리 신분이 갈려있습니다.
갤러리 담
신진작가기획전
정독도서관입구 북촌안내소벽면입니다.
정독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
화기도감터
성삼문선생집터
중등교육발상지
1900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중등학교이자
한때 대한민국학부모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입니다.
강남개발의 기수로 영동대로 옆으로 이전해간 후
정독도서관으로 운영됩니다.
서울 교육박물관
별도로 블로깅합니다.
김옥균집터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조선 왕가의 족보와 왕의 영정을 받들고
왕가의 인사 문제와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습니다.
1981년까지 경복궁 동쪽 건춘문 맞은편에 있었는데
보안사를 짓는다고 이곳으로 뜯어 옮겨졌지요.
인왕제색도기념비
겸제 정선이 비가 지나간 뒤 인왕산의 인상적인 분위기를 실감나게 그린 자리가 바로 여기랍니다.
원본은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고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왔습니다만 박제순 집터를 빠뜨렸네요.
정독도서관 1동과 2동 사이가 을사오적중 한명 박제순의 집터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박제순집 우물터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아 다시 건춘문앞으로 왔습니다.
사간원터
그래서 동네이름이 사간동
종친부터
종친부가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 맞은편에 위치했던 것은
종신과 외척 및 부마, 인척, 그리고 궁에서 일을 보는 상궁들은
건춘문으로만 드나들게 했던 궁궐의 제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종친부 옆에는 의빈의 인사 문제를 관장하는 儀賓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의빈이란 왕의 부마, 즉 왕비의 소생인 공주와 후궁의 소생인 옹주의 남편 되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 의빈들도 왕족 대우를 받았으므로 그들이 모여 의논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곳으로 종친부 옆에 의빈부를 마련했었다 합니다.
규장각터
경복궁 부근이라고 전신주하단에 그래도 무언가 새겨놨습니다.
민속박물관앞
무료입장이지만 차 세울 곳이 부족하다고 하던데..
그래서인가 입구에서 차한대가 경찰과 정담을 나눕니다.
관광객들은 생활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다시 소격동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다시 선재아트센터로 갈까했는데 (무료입장이거든요)
우째 정독도서관 왼쪽 담장옆으로 왔네요.
이름하여 꽃내음길
2008년도에 공공미술프로젝트같은 것을 해서 골목길문패도 만들고
골목마다 맑은샘길, 돌계단길, 맑은 하는길, 바람길, 우물길, 꽃내음길이라고 이름도 붙여 주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습니다.
세계 장신구 박물관 골목 장원서터
설명문을 보다보니
성종실록에
掌苑署에서 영산홍 한盆을 올리니,
傳敎하기를
“겨울 달에 꽃이 핀 것은 인위(人爲)에서 나온 것이고
내가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금후로는 올리지 말도록 하라.”고 쓰여 있는 글이 생각납니다.
성종이 놀란 것이 아니고 다만 그런 재배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재배하지 말라가 아니고 올리지 말라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온실에서 화훼를 재배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대에게 가는 길
정독도서관 담장 일곱 군데에 싯구를 새겼답니다.
그중 하나 미시령노을이라는 이성선 시인의 육필
노랗게 파인 것은
헌화가라는 제목으로
정독도서관 담장을 따라가며 황매화 꽃 수십 송이를 새겼던 흔적입니다.
공연히 안쓰러워 싯구가 걸려있다는 쪽의 반대방향으로 갑니다.
예전 명절전날, 때 빼고 광내던 곳.
사우나인가 요가원인가로 바뀌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 물을 먹으면 일년간 아프지 않고 복을 받게 된다고 해서 귀하게 여겼다는 물,
복정의 흔적이 저 아래로 내려가면 있을 겁니다.
경복궁너머로 인왕산을 보고..
가회동고개길을 올라
한옥마을 지붕을 봅니다.
그 지붕이 이어지다가 삐죽한 건물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이준구가옥?
그 주변으로 1920년대에 미국풍으로 건축한 빌라단지가 쭉 이어져 있을 겁니다.
선비의 나무 회화나무
가회동 골목길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저멀리 도심이 보이고..
가회동 31번지
북촌의 4,5,6,7경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고 쓰여 있는 곳이 여기인 듯 싶네요.
한적한 골목길에서 쉬었다 갑니다.
F. Chopin
Etude for piano No. 3 in E major, Op. 10/3 In mir klingt ein Lied (내 맘 속에 울리는 노래)
Rene Kollo, ten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