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종각역(종로1가)사거리에서 경복궁 동수각까지

하늘타리. 2011. 2. 21. 00:42

 종각역 지하도를 건너 제일은행쪽으로 오니
1908년부터 1909년 10월까지 통감부시기의 최고법원이던 대심원 터가 나옵니다.

 
일본은 1907년 12월 재판부구성법을 제정하여 새재판제도를 도입했는데

이 법에 의해 대심원이 최고,최종심을 맡게 됩니다...


불행한 역사의 한페이지이지요.


우리가 일제 36년이라 하지만 저는 일제 39년 이라고 생각합니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후 체결된 정미7조약부터 대한제국의 내정 전권을 일본이 장악합니다.

법령제정 및 행정도 통감의승인을 받아야 하고, 사법사무, 관리임용 등에 관한 모든 것을 일본에 넘겨줍니다.
정미 7조약은 7항목에 불과하지만

사실상 대한제국의 입법, 사법, 행정부를 비롯하여 황제의 권한까지 모두 일본에 넘겨준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달에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지요.

 어찌보면 1910년 8월 22일 체결되어 29일에 공포된 합병조약은 그냥 형식일 뿐입니다.

 

제일은행 앞 의금부 터


이름에서 부터 조금  겁을 먹습니다만
우리같은 민초는 해당이 없던 곳이지요.


朝鮮朝 높은 관리들의 범죄를 담당하던 관아가 의금부입니다.
태종 14년(1414) 의용순금사를 개편한 것으로,

경국대전에는 경찰업무를 5위에 넘기고 의금부는 다만 ‘봉교추국(奉敎推鞫)’만을 맡는다 하여

왕명에 의해서만 죄인을 추국하는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길을 건넙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몇몇 건물을 철거할 예정인가 봅니다.

 사회공공성회복을 위한 철거민 체험행사라고 포스터에 써 있습니다만

그런 체험행사가 필요없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로 개발과 그에 따른 철거. 신중히 결정해야 합니다.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라지만
개개인의 복리를 보장해주는 것,

약자를 배려해 주는 것,

어쩔수 없을 경우 그 피해를 최소화 해주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나라가 되는 기초입니다.

 

지금은 농협으로 쓰이고 있는데 근대건축물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입니다.

1926년에 한국인에 의해 지어져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으로 쓰이던 건물입니다.

 조선중앙일보는 한 3년정도 뿐이 발간되지 않아서 아시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만

조동호선생 후원으로 설립되어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정통민족신문입니다.

1936년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사진을 지운채 게재하여 동아일보와 같이 무기정간처분을 받습니다.

동아일보 사장은 일선기자의 치기라고 사과했지만 이 신문은 당당히 버티었습니다.

결국 다음해 폐간되었습니다.

 

그 당시 같이 운영되었지만 어찌어찌 시류를 잘 탄 조선과 동아는 부근에  아주 커다란 사옥을 짓고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만

올곧은 길을 걷던 조선중앙일보는 지금 옛건물과 그건물에 대한 표지석 하나 덩그러니 남겨놓고 있을 뿐이고

그를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벽에 붙어 있는 각종 공연 및 전시 포스터

 
가볼 여건이 않되니..  포스터 사진만으로 만족합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문에 붙여 놓은 종이에 벌건 글씨가 멀리서 볼때 꼭 휴업표지처럼 보였습니다.
저 아름다운 식당이 왜?하고 다가가 봤더니

원산지 표시 우수식당이라는 표지입니다.


 

대한불교총본산 조계사.

불경 어딘가에
사랑하는 마음도...미워하는 마음도 갖지말아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조계사에 대해서는 별도 블로깅하였고
새로운 세존진신사리탑을 세우면서 한쪽 구석으로 내몰려진  옛 사리탑을 보러 갑니다.

 쓰여있는 글을 옮깁니다.
사리탑은 태국왕실에서 모시고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를

스리랑카의 달마파라 스님이 하사받아 호신용으로 모시고 다니다가

한국에 왔을 때 전해 준 사리를 봉안했던 탑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 경호스님의 주선으로 조계사 대웅전 앞에 일식으로 조성했던 탑으로

2009년 8각 10층의 세존진신사리탑을 새로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권상로스님이 짓고 김돈희선생이 쓴 석가세존진신사리탑비명이 새겨진 비석 또한 이 탑 서쪽으로 함께 이전하였다.
불기 2553(2009)년 9월 조계사 주지 세민

 

민영환집터를 지나...

민영환동상으로 갑니다.


민영환의 사후 자라난 혈죽을 상징하여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 놨네요. 

동상 뒷면을 둘러 쓰여 있는 그의 유언를 적어봅니다.

 

슬프다 국가와 민족이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다 죽게 되었고나
대개 구차히 살고저 하는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한자는 도리어
살아갈 길이 있는것 이니
동포 여러분 은 어찌 이를 모르리오
영환은 한갓 죽음 으로서 임금의 은혜를 갚고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 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은것이 아니라 기필코 여러분을
지하에서 도울지니 바라건대
동포 형제여 아무쪼록
더욱 분투 노력하여 뜻과 기운을 굳게 가지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나도
지하에서 기뻐 하겠노라
동포여!!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자결한 옛터는 가까운 인사동 무슨 여행사앞에 있습니다만 옛 사진으로 대치합니다.

 

도화서터
화원 양성, 국가의 각종 의식 행사. 초상화 등 그리는 일을 담당하였던 곳입니다.

 얽힌 이야기를 보려면 차도로 나가 표석의 뒤를 봐야합니다.

 

그 옆에 있는 전의감 터

 의료행정과 의학교육을 관장하던 관청이었습니다.

 

우정총국

이런 저런내용의 주변 표지판 

 

 우리나라 최초의 우편행정관서. 전의감터를 개수하여 청사로 사용했으며

원래 여러동이 있었으나 한 동만 남아 있습니다.

 홍영식, 박영효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현장이고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정총국 마당에 우표프린팅
몇장을 모았습니다.

 

 

 

조계사좌측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터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영국인 베델(Bethell)과 양기탁이 창간한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항일 민족 언론입니다.

이후 중동학교가 이곳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표석 뒤로 목은 이색의 영당이 보입니다.
문이 닫혀있으니 목은 선생영당이라는 현판만 보시지요. 

 

 보성사/보성학교 옛터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인쇄한 천도교의 보성사가 있던 곳입니다.

 보성사는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으며,

천도교에서 경영하였던 인쇄소로 30평에 2층 기와벽돌집이었다합니다.

조형물 하단 그림을 살펴보면 보성사는 보성학교와 같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성학교는
1906년 9월에 이용익 선생이 창립하였습니다.
다음해 이용익선생이 서거하자 그 손자가 계승하여

노백린선생을 교장으로 초빙하여 민족교육을 강화하였고

1909년 취임한 박중화선생이 교장으로 계실때인 1910년12월에 천도교회 손병희가 경영권을 인수하여

1911년 1월 최린 선생이 교장에 취임합니다.


1924년 1월에 재단법인 조선 불교 중앙 교무원이 경영권을 인계받고

1927년 5월에 혜화동 1번지로 학교를 옮기고 그 자리에 교사를 헐고 조계사를 세웁니다.

당시 2층 목조교사뒤 견지동으로 통하는 길에 있던 후문이 지금의 조계사 정문이고

그때의 회화나무와 백송이 남아있습니다.


보성전문은 1932년 김성수에게 인계되어 1946년 고려대학교가 되었고
보성학교는 1935년 재단법인 고개학원(동성학원)으로 인계되어 지금의 보성고등학교가 됩니다.

 

 

사복시터(司僕寺址)

 사복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수레말, 마구, 목장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태조 1년(1392) 조선의 새 관제를 정할 때,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사복시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궁중에는 내사복시와 도성에는 외사복시, 지방에는 목장을 두었다하고

사복시에는 응사(鷹師)가 소속되어, 궁중의 주방이나 제사·연회에 필요한 동물은 모두 잡아서 조달하였습니다.

여기에 있던 외사복시는 1907년에 폐지되었답니다.

 

사포서터

 조선시대 궁중의 채소전과 원포(園圃;과일이나 채소 등을 심는 밭)를 관장하던 곳입니다.

1466년(세조 12)에 침장고(沈藏庫)를 사포서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합니다.

 

동수각으로 왔습니다.
도로 한가운데 있어서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멀리서 보며 생각합니다.
실록에 보면 中宗때 경복궁 동수각의 모퉁이에 벼락이 떨어졌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자신을 돌이켜 스스로 책망하여 반드시 내 도리를 성실하게 하기를 요하고,

덕을 펴고 혜택을 베풀어 허물을 용서하고자" 잡범에 대한 대사면을 내렸습니다.

자연의 질서와 그 변고에 대해 겸허한 위정자의 자세가 느껴집니다 .

멍하니 동수각을 보고 오래 서 있으니 제복의 젊은 경찰이 주변을 계속 왔다갔다 합니다.
공연히 불심검문이 있겠습니다하면서 삐뚜름한 경례를 붙이면 내 기분이 아주 않좋아질테니..
사간원이 있었다는..

그래서 사간동이라고 하는 동네의 골목으로 스며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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