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청계천 광통교

하늘타리. 2011. 2. 20. 21:40

淸溪川입니다.

 

한강을 비롯한 우리나라 하천의 거의 대다수가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거의 유일한 하천입니다.


본래의 명칭은 하천을 수리하여 열었다는 뜻의 開川이었으나

후에 개천이 하천을 나타내는 보통명사가 된후

일제강점기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평소에는 마른 하천으로 있다가

서울의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여

동쪽으로 흘러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져 한강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이후 광복후까지 치수사업과 유지관리에 힘써오다가

1958년 6월부터 복개 공사에 착수,

1967년부터 1976년까지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해

그 이후로는 청계천은 물 없는 이름뿐인 개천이 되었지요.

 

그 후  고가가 철거되고, 총 6km에 이르는 개천이  총 3천9백억원을 들여 복원 되었습니다.

복원그자체로도 큰 일을 한 것이고

도심콘크리트숲 주변을 청량하게 하는 냉각수역할을 하며

전통문화의 복원과 볼거리와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는 면도 있으나

 

장마철이나 큰비가 오지 않으면 물이 흐르지 않는 마른 하천이라

복원후 생태하천으로 유지하기 위해 밑에 콘크리트를 발라 인공호수를 만들었고

필요한 물을 충당하기 위해 자양 취수장에서 끌어올리는 하루 12만톤의 물과

인근 12개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지하수를 대형 모터 펌프로 끌어다 사용하다보니

하루 240만원의 전기료를 포함해 연간 18억원의 유지비가 소요되고 있다합니다.

 


광통교로 갑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육조거리-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내 남북대로의 일부로

광통방에 있는 다리라 해서 대광통교라 불리었으나

그자리에 광교가 있어서 약 150미터 정도 이전해서 복원한 다리입니다.

 

광통교다리밟기 재현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네요.


1925년 중단되기 전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정월대보름 행사였던 다리를 밟는 풍습인 답교놀이는

원래 중국 연경(燕京)의 풍속으로 우리나라는 중종 말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도성의 남녀모두 보름날 밤 종루의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경 소리에 맞추어 열두 다리를 지나다니면

그 해 열두 달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고 액도 면하면서 봄이 온다 하여,

보름날만 되면 모두 청계천의 다리로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 이 광통교가 소광통교 · 수표교와 함께 답교놀이로 유명한 곳이기도하였다합니다.

오늘 오후 1시부터 시작된다하니 즐거운 행사가 되길 바랍니다.

여기 광통교는 처음에는 토교였다합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다리가 무너지고 물이 넘쳐 사람이 빠져죽는 경우가 많았다 합니다.
그래서 태종 10년(1410년)에 의정부에서 啓를 올려 석교를 만들었다 하는데

그 때 쓰여진 석물이 옛정릉에 버려져 있던 석물이었답니다.

약간의 스토리가 필요한데...
태조 이성계는 6명의 부인에게서 8남 5녀를 두었습니다.
그중 아들은 부인 6명중 2명의 왕비, 즉 향처(鄕妻)인 정비 신의왕후 한 씨 소생 여섯 명의 아들(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과

 경처(京妻)인 계비 신덕왕후 강 씨 소생 두 아들(방번, 방석)입니다.
향처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와 혼인한 후 계속 함흥 운전리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조선 건국 1년전인 1391년에 죽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무덤은 개성(齊陵)에 있고

1398년 정종이 즉위한 후에야 신의왕후로 추존되었지요.
둘째 부인 강씨는 젊고 총명하고 친정이 권문세가여서 태조의 입신에 큰 힘이 되었고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개국후 첫번째 왕후는 신덕왕후 강씨입니다.


조선 개국 한 달 뒤인 1392년 8월 강씨 소생 방석이 세자로 책봉됩니다.

 불과 11세입니다.
한씨 소생 장남 방우의 나이는 39세,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데 가장 공이 많았고 방석의 왕자책봉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진 정안대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태조 5년(1396년)에 계비 강씨가 숨을 거둡니다.
그녀가 죽자 장지로 선택된 곳이 지금의 고려대학교 자리인 안암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땅을 파자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 (또는 조선시대 취현방이라 불리우던 지금의 주한 미국대사관저 영내)에 뭍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용된 석물은 태조가 애도 추념하는 충심에서

특별히 濟州牧使 呂義孫으로 하여금 일류 석공들을 감독하여 제조하였던 것이라

그 정교한 솜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398년(태조 7년) 8월 25일,

태조 이성계가 병환중일때 방원의 주동으로 정도전, 남온, 심효생 등 세자 방석 옹위세력을 전광석화처럼 살해하고

강씨 소생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체포, 귀양 보냈다가 죽이니

방석의 나이 17세, 방번의 나이 18세였습니다.


바로 1차 왕자의 난입니다.


그후 2차왕자의 난을 벌리고

정종을 거쳐 왕위에 오른 방원은

신덕왕후의 능, 정릉을 도성밖 양주 사을한록(沙乙閑麓·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라 합니다.
정릉의 정자각을 헐고, 목재와 석재는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라 합니다.
그리고 병풍석과 난간석은 그자리에 버려두고 석인과 봉분만을 옮기도록 하고

그것도 모자라 석인은 묻고 봉분은 깍아버리라합니다

(지금의 정릉은 신덕와후 사후 260년에 현종에 의해 재조성된 것입니다)

그 버려졌던 병풍석과 난간석들이 광통교 축조에 쓰인 것입니다.

아래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알아서 기니까요.
일부러 석물들을 거꾸로 올려놓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청계천복개공사로 땅에 뭍혔다가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꼭 이렇게 거꾸로 세워야만 되었을까요?
봉분 옆으로 둘러쳐서 받쳐주는 돌, 병풍석이 거꾸로 되었었다는 사실을 밝힌 후 다시 바로 세워주면 않되었던 것일까요?


다른 것들은 잘도 왜곡 변형하더만..
이곳도 제 위치도 아닌데 머리에 피쏠려 있는 돌 바로 잡아주면 않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시한번 뒤돌아 보고..

청계광장쪽으로 갑니다.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인 隅廛,

그 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모전교로 이름지어진 다리 밑을 지나
팔도의 돌을 모았다는 팔도석의 일부를 보고 스프링 가까이 다가갑니다.

스프링. 이 조형물의 이릅입니다.

청계천 복원 1주년을 기념해 2006년 9월 청계광장에 세워진 스프링은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팝아트 작가 클라에스 올덴버그가 제작했습니다.

높이 20m, 폭, 6m, 무게 9t, 제작비 34억원의 파격적인 규모로 KT가 만들어 서울시에 기증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워진 이후 참 말이 많습니다.
"청계천 복원 후 그 중앙에 불의 형상을 세웠으니 나라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는 일제가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 북한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보다 더욱 치명적이다"(서울대 김성균교수)
"물의 기운을 막는 것은 물론

도시의 중심에 비비꼬인 붉은 쇠말뚝을 박아놓은 듯한 느낌이라 나라와 서울이 꼬이고 있다”(우석대 김두규교수)

 

예술적 그 가치는 모르겠습니다만
올덴버그는 한국적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었다고는 하는데

 어느 한구석 청계천이 나타내는  역사적, 생태적, 문화적 의미와 전혀 관계없는 듯한 이 조형물이

청계천을 상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로위를 걸어 광통교로 다시 갑니다.

광통교

 문득 생각나는 시
언제적 쓰여졌는지 일천 구백하고 육십년 무렵을 이야기하는 조병무의 시,

청계천 물 따라가기를 읊조리며 광통교다리를 넘어 갑니다.

 

일천 구백하고 육십년 무렵,
나무기둥 청계천 물 바닥에 처 받고
헐렁한 판자 집 허허허 웃고 있는 걸
여기 누가 보았나요.

 

줄줄이 나란히 사이사이에
촐랑촐랑 흐르는 물소리 장단에
막걸리 마신 쉰 목소리
삐죽하게 내민 판자 흔들며
여기저기 출렁이며 비뚤거리고 있는 것을
본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요.

....

 

시가 나타내는 그 무렵 사진 몇장 올리면서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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