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덕리 신당을 찾아갑니다.
함덕리에는 당은 몇곳 남아 있습니다만 인접한 와흘이나 송당에서 볼 수 있는 큰당은 없습니다.
큰당이 없으니 당제가 없는 것인지, 당제가 없으니 큰당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만큼 당세가 약하다고 볼 수 있지요.
당은 많은데 당세는 약하다?
말의 앞뒤가 않맞는 것 같지만 당세가 약하니 집단적 의례를 할 수 없고
몇몇이 다니는 조그만 당이 산발적으로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통문화연구소 2008년 자료에 마을에 있던 14개 당중에 7곳이 멸실되었고 7개소가 남아있다.
그중 4개는 당의 기능이 남아있고 3개는 폐당되었다합니다만
저의 이번 답사로 보아서는 폐당된 세곳중 한곳은 멸실되었고
당의 기능을 하던 네곳 중 한곳은 폐당되었다고 보여집니다.
현재 당의 기능을하는 세곳을 먼저 찾아 봅니다.
먼저 함덕리 본향 알카름 서물당.
함덕포구옆 알갯물로 가서 해양연구소쪽 골목길을 걸어가면 길가 돌담사이에 당이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네다섯명 둘러서면 꽉찰듯한 넓이의 당이 있습니다.
서물당이라는 이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먼저 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당을 정비하신 분이 세운 한태흥 표석에 삼수신당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알카름 이 마을에 물통이 세곳 있었는데
그중 서쪽에 있는 지금 알갯물 부근에 있는 당이라 하여 서물당이라 한다는 마을주민도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음력 3월 서물(음력 열하루, 스무엿새 날의 물찌)에 고기 잡으러 테우배타고 나갔던 영감이
고기는 못 올리고 돌덩이만 올립니다.
던지고 자리를 옮겨도 그 돌덩이가 또 올라오고, 던지고 다른 곳으로 가도 그 돌덩이가 또 올라옵니다.
고기도 못 잡고 돌덩이만 던지고 끌어올리고 피곤하여 깜박 잠이 들었는데
웬 여인이 꿈에 나타나 용왕국의 고명딸이라며 나를 모셔다 서물날에 봉제한다면 너의 집안을 잘되게 하리라합니다.
낚시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일을 부인에게 말하자
부인이 깨끗이 목욕 후 옷을 갈아입고 배위에 실려있던 이 석상을 모셔옵니다.
영감과 함께 청룡백호잡아 조그맣게 신당을 차리고 석상을 모신 후
그 위에 궷문을 만들었습니다.
이 용왕미륵돌을 성심으로 모신 후 부터 배는 만선이요,
자손은 건강하고 다복해 지고 영감도 첨지벼슬을 받게 되었다 합니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이 이 신당에 찾아와 용왕미륵에게 정성을 드리기 시작하여
지금은 해녀와 어부를 차지한 함덕의 본향당이 되었답니다.
외방신이 본향당신이 된 드문 예가 되겠습니다.
그 후 주변 신당들이 폐당되고 멸실되면서
베남물당에 계시던 급서황하늘, 뒷당동산에 계시던 일뤠한집,
알질웃당에 요드레한집, 신흥리 열싀거리 삼천병매,
신촌 죽도 남빌레당에 있던 일뤠한집
이분들이 모두 이리로 모셔져있습니다.
최근에 당을 정비한 듯 한데
제단 뒤에 나무들을 다 베어냈습니다.
신체가 미륵신석이니 당목이 없다하여 무어라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꼭 포제단식으로 정비를 해놓아 마음이 언짢습니다.
좃나니모루 일뤠당으로 갑니다.
좃나니모루 일뤠당과 다음에 찾아갈 한양할망당은 모두 실존인물의 무덤입니다.
생전에 할망이 아픈 사람을 위해 당신에게 비념을 해주면 병이 잘 낫는다고 하여 찾는 사람이 많았는데
죽은 후에도 그 할망을 찾습니다.
절에 다니는 분들이 오백나한을 찾아가 부처님의 가피를 함께 빌어 주십사고 기원하는 것과 같은 경우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좃나니모루 일뤠당입니다.
예전에 좃나니모루 일뤠당을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당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당을 관리하는 다른 할머니 집을 가르쳐 줍니다.
그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얼마정도의 돈을 내고 넋들일 아이의 옷을 주고가면 당에 가서 넋들임을 하고 나서 옷을 돌려 줄 테니 그 옷을 입으면 된다고만 하시면서
당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부정탈것을 염려하시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쁜 마음이 아니고 민속을 알고 싶어서 그런다는 자기합리화를 시킨 후
꽤 오랜 시간 헤매어서 당을 찾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이 길에서 보입니다만 모르면 지나칩니다.
모퉁이 네곳에 백일홍이 심어져 있고 산담이 둘러져 있는 곳에 묘가 있습니다.
孺人高氏之墓라고 쓰여 있는 묘비가 있고 비석앞의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망의 무덤 뒤 두기의 애기무덤과 우측 옆으로 또 한기의 애기무덤이 있습니다.
이 아이무덤은 어떤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요?
공연히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비석뒤 비문을 읽어봅니다.
濟州東朝天面咸德里南尊閑伊旨有枕丁向祭三尺之原卽陽川許辰之妻耽羅高媼之藏也生年月日文獻未徵
癸丑七月十六日均有子內宗無育斯人也寄而遺陰歸而靈一抔土前孰不崇拜淸香美醑遠近來酹愛我比兒圖報无量刊玆一石以表其情
歲戊子 三月 上巳 丹陽 禹成集 謹竪
해석을 해보면...
제주의 동쪽 조천 함덕면 남쪽 존나니모르 남서쪽 좁은 땅에 제를 지내 양천 허씨 진의 처, 탐라고씨성의 할머니를 묻은 곳이다.
생년월일은 기록에 없고 계축년(1913년) 칠월십육일, 아들 균이 죽으니 나에게 영을 의지하겠다. 유언하셨다.
묘앞에 술 한 잔 따라드리고 숭배하지 않아도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맑고 향기로운 술을 가져와 땅에 붓고 간다.
나를 아이처럼 사랑해주던 것에 보답하기 무량하나 감히 돌 하나에 글을 세겨 정을 표한다.
무자년(1948년) 3월 단양 우씨 성집 세움
아마도 할머니무덤 주변의 아기무덤중 하나는 일찍 간 자식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슬픔이 극에 달한 사람은 신기가 통한다 하지요.
청상으로 아이까지 일찍 잃고 혼자 살아가시면서
타인의 아이들을 위한 비념을 하며 지내시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신듯 합니다.
아쉬움에 애절함에 주변분들이 계속 찾아오시고
아이들 때문에 설운 사연 하소연하고 아이들의 건강을 빌게 되고
그렇게 그렇게 넋산이 된 것 같습니다.
한양할망당입니다.
이곳도 무덤입니다.
대리석으로 제단과 비석이 만들어져 있고, 비석에 한양할머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단부에 1998년 10월 16일 孫 한순섭이 정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궤가 두곳 있네요
통상 마을사람들은 한영할망당이라 부르며 자주 찾고 있고 넋산을 물으면 이곳을 친절히 가르쳐 줍니다.
특별한 제일은 없고 자손이 관리해서인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습니다.
산담주변 수선화 사진으로나마 제단에 바칩니다.
한곳을 더 갑니다.
폐당된 곳입니다만 이곳도 실존하셨던 인물을 모셨던 곳입니다.
서모오름 산신당입니다.
지금이야 밭가운데 돌무더기위에 동백 몇 그루와 잡목만 우거져 있지만
예전에는 일대가 우거진 동백동산이었다 합니다.
산신당의 당신은 延州 玄氏 입도 9세로 이름은 萬伯,
출생년도는 단기 4170(1837년) 이고 1880년 2월 12일 사망하신 분입니다.
현만백 할아버지는 동백기름을 파시던 분인데 선흘로 동백기름을 채취하러 갔다가 변을 당해 돌아가셨다합니다.
그래서 그 시신을 운구해 두었던 곳, 마을 근처에 있는 동백나무아래에 조상신으로 모셨다 합니다.
현씨 집안에서만 사나흘에 한번씩 찾아가 인사를 하곤 했는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 당에 와서 비념하곤 하여 산신당이 되었다가
어느 날부터 현씨 후손을 비롯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어 지금은 폐당되었습니다.
이곳은 외지에서 돌아가신 분을 집에 들이지 못한 풍습과 연관 지으면 조금 이해가 되실 겁니다.
아주 나이 드신 마을 어르신 말씀에
이 부근에 이 당 외에도 교래에서 돌아가신 분을 모신 당,
사라오름에서 돌아가신 분을 모신 당 등이 있었다 하시고
지금도 부근에서 마을 상여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폐당된 곳의 흔적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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