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영천동에 있는 웃법호촌이라고 불리우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대해서는 황당한 일화가 있지요.
한 5~60호정도의 가구가 살 마을하나 건설하는데
도 검사장과 도의회에서 우습지도 않은 감정싸움이 벌어집니다.
당시의 제주신보기사를 정리해 가면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볼까 합니다.
1955년 1월에 길성운 도지사 주재로 열린 제주도 기관장회의에서
도 김상욱검사장이 "제주도에 범법자가 없는 낙원(樂園)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중앙과 美CAC의 협조로 서귀면의 선돌에 법호촌을 설립할 계획이며,
이미 60세대가 입주해 개간을 서둘고 있고 단장은 김용모(金龍模)라는 사람이 맡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웃법호촌에서 보는 한라산>
그러자 도의회는 3월11일 길 지사를 출석시킨 가운데
"법호촌 건설은 사법기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행정기관의 귀농정착업과 구분이 애매모호해 사업주관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밝히라"면서
세간에 나돌고 있는 법호촌의 의혹을 따지고 들었지요.
도지사는 4.3 사건과 6.25 사변으로 재산을 잃고 방황하는 난민들에게
생활의 안정을 도모해주는 것이 귀농정착사업의 기본방침이며,
법호촌 건설 역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난민들에게 생계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사법보호위원회의 협조로서 법호촌에 정착하는 주민들에게 법의 보호를 받도록 해주자는 데에
김창욱 검사장과 합의를 보았을 뿐이며,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성과를 보아가며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고 대답합니다.
<웃법호천 위 동산에서 본 성널오름>
<참고로 사법보호위원회는 1941년 제정된 조선사회보호법을 근거로 하여 출소자에 대한 갱생보호대책으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재범을 하지 않도록 출소자 또는 출소자가족에게 어떤 지원을 하는 형사적 목적으로
지역 독지가들의 찬조와 중앙정부의 약간의 보조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8·15광복 이후 수용보호단체의 사법보호와 관찰보호단체의 사법보호위원회가 재단법인으로 구성되어 운영되었으나
6·25동란으로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휴전 성립 후 사업이 재개되기도 하였으나
형식적인 사업으로 활동 실적은 매우 부진하였습니다.
김검사장은 이것을 활성화시켜서 4.3 등으로 집안이 무너진 사람들을 정착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후에 사법보호사업은 61년도에 갱생보호법에 의해 사업의 이름이 바뀌었고
1995에 사업시행책임을 명확히 하는 한국갱생보호공단이 설립되었으며
2009에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으로 기관 명칭이 변경되어 사업이 시행중입니다>.
<웃법호촌에서 본 제지기오름과 숲섬>
다시 당시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김 검사장은3월 12일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4.3 사건과 6.25 사변으로 갈 곳이 없게 된 이재민들에게 정착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법호촌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인데도
도의회가 마치 내가 행정기관에 압력을 넣는 사람처럼 비치게 함으로써 나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면서
"당시 질의를 했던 의원들을 소환해서 진의를 밝히고자 하며,
도의회에 출석하여 답변하고 싶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자 도의회는 도의원이 의회에서 발언한 문제를 놓고 검찰이 어떻게 소환할 수 있느냐?며 펄쩍 펄쩍 뛰지요.
김검사장은 3월30일과 31일자 제주신보에 「제주도의회에 일언(一言)함」이라는 제하의 글을 기고합니다.
"지난 3월11일에 있었던 법호촌에 대한 도의회 질의는 검사장이 무슨 불법을 행하거나
행정기관에 간섭이나 하는 사람처럼 불명예를 입혀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도의회에 출석해 답변하고 싶다고 했으며 의원들을 소환하고자 했던 것은
누구의 선동을 받고 나를 비난하기 위해 질의했던 것으로 의심치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득이 질의자인 김찬익 의원 등을 호출, 질의의 진의를 조사코자 한 것이다.
그런데도 김 의원은 내가 의회에서 해명하고 싶다고 하는 것조차 피의자로 간주하고 있다.
또 행정기관을 간섭하고 귀농정착 자재를 사용한다고 했는데
귀농정착과 법호촌 건설은 CAC원조물자로 추진되는 것이며
법호촌 건설에는 귀농자재를 빌리기는 커녕 휴지 한 장도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해당 의원은 자진해서 진의를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웃법호촌에서 본 숲섬과 문섬>
여기에 또 도의원들이 발끈합니다
기고문이 신문에 발표된 된 다음날 긴급회의를 소집, 김 검사장을 규탄하는 한편
이 사실을 중앙정부에 보고하기 위해 6명의 도의원을 대표로 선출하여 상경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전인홍도의회의장은
"김 검사장의 기고문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으로서
지난번 도의회에서의 질의는 법호촌의 의구심을 풀기 위한 의결기관의 당연한 일이며,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람도 간섭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방자치단체의 의결기관인 의회에 대해 의원들을 소환하여
검사장의 비난진위를 조사하겠다는 것은 도의회를 협박하는 것이며
도민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성명을 냅니다.
<웃법호촌 마을 북쪽 무너져가는 방사탑>
김 검사장은 또다시 성명을 내고
"협박이란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오해를 풀기 위해 출석을 요구한 것이 도의회에 대한 간섭이고,
사법기관의 위신확보를 위해 신문에 기고한 것이 협박이 될 수 있느냐.
도의회는 협박이란 뜻도 모르고 있으며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글을 정심(正心)으로 읽어보라.
직권으로 호출하고 싶지 않아서 자진출두를 요구한 것이다.
전인홍 의장이 도의회에 대해 어떠한 기관도 간섭할 수 없다고 하나
사법기관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그 기회를 요구한 것은 간섭이 아니다"며
"도의회가 중앙에 가겠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국회에서 문제를 일으켜 법호촌을 전국적으로 선전해주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악(惡) 중에서 가장 큰 악은 남의 선의를 악으로 왜곡하는 것이며 선을 악으로 보복하는 것이다"고 반박합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김 검사장은 법호촌 건설 사업을 계속 추진해나가면서
경찰국 주최의 「법호촌 웅변대회」를 여는 등 도민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일에 주력합니다.
4월 10일 의회가 진정단 6명을 상경시킵니다.
그 이유로 검사장이 법무부의 상경지시를 받고 4월11일 서울로 간 뒤 8일만인 19일에 귀임했습니다만
이틀 뒤 다시 상경하게 되고
김검사장이 없는 사이 4월28일에는 광주고등검찰청 검사가 진상조사를 다녀갑니다.
5월 3일 내려온 김검사장은
"도의회 대표들이 비밀리에 중앙관계기관에 자신에 대한 중상 모략적인 진정행위를 벌이고 있는데,
싸움은 인격적으로 정정당당하게 해야지, 국가민족과 관계없는 문제를 일으키면서
선(善)을 악(惡)으로 갚고 인격을 중상하는 일은 심히 불쾌하다.
또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도의회가 도비를 들이면서까지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재임 1년이 넘는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라고 도의회를 비난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싸웁니다.
법호촌 건설이 좋으냐 나쁘냐 필요하냐 아니냐 지원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고 추후 어떻게 관리하겠느냐가 아니고
한쪽은 왜 도의회를 무시하느냐? 육지부출신 기관장 세 명(도지사, 검사장, 경찰국장)이 제주도를 무시한다(길지사는 북한출신..)며 소리를 높이고
또 한쪽은 왜 중상모략 하느냐? 왜 선을 악으로 갚느냐?고 싸우다가
막상 법호촌에 입주한 50여 가구는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그러다가 싸움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인 6월 12일
제주도의회와의 불화책임을 물어 보직이 해임되어 대검찰청에 소환된 김검사장이
7월 2일 부로 대구 고검장 직무대리로 발령받아 제주도를 떠남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 과정에서 법호촌으로 이주해 왔던 50여 가구는 완전히 찬밥신세가 됩니다.
<웃법호천 마을 농가 우영밭>
그러다가 결국 일부만 남고 대다수가 거처를 옮깁니다.
그해 여름 무렵 5숙영지가 폐쇄됩니다.
(공식적으로 1훈련소의 육지로의 이전은 56년 1월이지만 55년 봄부터 시설 및 숙영지가 점점 축소됩니다)
그해 7월에 5숙영지가 있던 벌판중 동쪽 (지금의 비어있는 천주교 시설 서쪽)으로
사단법인 제주난민귀농정착단의 주선으로 백원정을 단장으로 하는 6.25피난민 150세대가 들어옵니다.
이 마을은 사법보호위원회와 아무런 연계가 없었고
행정기관의 귀농정착활동지원사업으로
난민정착귀농단을 조직하여 건축자재와 구호미 농기구 등을 정부에서 지원받아 실시한 사업입니다.
그 다음해인 1956년 4월 30일 이곳에 입주한 귀농정착단장인 백원정장로를 포함한 50여명이
그때까지 남아있던 군인공회당을 인수, 첫예배를 드리고 마을 이름을 가나안 새마을이라 합니다.
(그때 생긴 교회가 지금의 시온교회입니다.
당시 1284번지에 있던 교회가 1967년경 지금의 1291번지로 옮겨졌습니다.)
<66년까지의 시온 교회(시온교회소장사진)>
<지금의 시온교회>
<시온교회성전에서 본 한라산>
<1955년 가나안 새마을 입주식(시온교회소장사진)>
<1956년경 이지역에 세웠다는 사단법인 제주난민 귀농정착개척단 창립기념으로 세운 유관기관장 송덕비>
(시온교회 소장사진,김선옥남제주군수의 재직기간이 1955. 3. 23 ~ 1957. 3. 27이니 그 어간에 세운듯함)
그 마을 안에서는 이런저런 복잡한 스토리가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금의 웃법호촌에 설립되다 중단한 법호촌과 다를 바 없었고
끈 떨어진 법호촌 사람들도 이쪽으로 한 10여호 이전했다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나안 마을이라기 보다는
법호촌으로 이름이 굳어져 돈내코윗쪽은 웃법호촌
이곳은 상동법호촌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동네안의 길은 가나안로라는 명칭이 남아 있네요.
마을안길을 돌아보면서 당시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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