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토평동 육일훈 제5숙영지구대장 순직비

하늘타리. 2011. 3. 6. 17:22


아직 토평리 마을묘지에 있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보아 맨 왼쪽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비석에
故陸軍中領洪瑞勳殉職之碑라 쓰여 있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陸軍二中李仁鎬 陸軍下士尹德烈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뒷면에

檀紀四二八五年五月二十二日 故洪瑞勳 中領이

陸一訓第五宿營地區隊長으로서 强兵育成과 國軍의 母胎第一訓練所 發展을 爲하여 獻身努力하다가

初志를 一貫치 못하고 哀惜히도 殉職하였음으로 故人의 英靈을 追慕하고 業績을 받들어

陸軍 第一訓練所 全將兵이 이곳에 故人을 哀悼하는 뜻으로 建立한 것임.

檀紀四二八七年三月十六日 陸軍第一訓練所 將兵 一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4285년 5월 20일 홍서훈중령이 순직하였고

순직한 곳에 애도의 비를 세운다는 내용입니다.

앞면의 작은 글씨 두 분도 함께 돌아가셨는데 그들의 관한 글은 없습니다.

 

이 비석이 처음부터 이자리에 세워진건지 옮겨진것인지는 모릅니다만

지금 세분 모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가장 먼저 이인호 병장이 1959년 4월 13일에 안장되었고

홍서훈 중령이 1959년 11월 25일에,

윤덕열상병이 1960년 5월 20일에 국립묘지로 옮겨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망구분이 윤상병은 순직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홍중령과 이병장은 일반사망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돌아가셨는데

왜 어느 분은 순직으로 어느 분은 일반사망으로 구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안장시 심의에 의해 홍중령과 이병장은 순직처리가 되지 않았다합니다.

 

갑자기 생각난 또 하나의 순직비 사진 올립니다.
모슬포 옛 98병원자리 부근 숲속에 있습니다.

뒷면이 먼저 보입니다.

 

 98병원에서 근무하다 순직하신 분들의 충혼비입니다.

소령 김의헌은 1955년 8월 돌아가셨고(병사)
하사 윤기만은 1952년 9월에(전사),

일병 박희덕은 1953년 6월 30일에(일반사망) 각각 돌아가셨습니다.

김의헌소령이 돌아가신 후에 세분의 영령을 함께 위로해드리려는 의미에서 함께 충혼비를 세운 것 같습니다.

 
토평과 모슬포 두 비석 모두 육군 제1훈련소와 연관이 있습니다.


토평에 있는 비석은 육1훈을 수료한 병사들이 전장에 가기위해 대기하던 숙영지를 관리하던 군인들이고
모슬포에 있는 비석은 육1훈훈련병들을 치료하던 98육군병원에 근무하던 군인들입니다.

 

그래도 이분들은 어떤 이유로 돌아가셨던 이렇게 충혼비라도 남아 있습니다만
훈련소병사들의 죽음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1951년 12월 24일 육군 제 1훈련소 소속 제2 숙영지에서 어떤 적대세력과의 교전중 화재가 났습니다.
그 때 화재로 돌아가신 어느 이병의 유족이 끈질긴 사실규명끝에

사망구분을 '변사'에서 '전사'로 변경할 수 있었고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는 신문기사를  몇년전에 읽은 적 있습니다.
2숙영지 막사는 전부 천막막사인데 그 때 그분만 돌아가셨을까요?


이런 저런 이유로 국립묘지에 계신

제주로 훈련소가 옮겨온 1951년 3월부터 1954년 말까지

제1훈련소소속의 이병들,

즉 훈련병의 숫자만 해도 130명이 넘습니다.

그러면 앞의 사례처럼 변사로 취급되어 국립묘지에도 못간 수는 얼마나 될까요?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먹먹한 마음으로 돌아 나와서 5숙영지가 있던 곳

법호촌이라 부르는 곳 농장 안으로 가서

그 일부를 사진 찍습니다.


육일훈의 숙영지는 총 네 곳이 있었다 합니다.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훈련병들이 있는 곳입니다.


하사관 후보생들이 숙영을 하던 곳이 서광에 있습니다.

하사관 후보생 숙소는 1숙영지, 훈련병숙소는 2숙영지로 이름 붙여졌습니다.

(일설에는 하사관 숙소는 별도이고 훈련병숙영지가 1숙영지는 모슬포에, 2숙영지는 안덕에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기초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전장에 투입되기 전에 대기하며

직능별 훈련을 받던 곳이 영천동과 법화사 인근에 있었습니다.
법화사 인근의 것이 먼저 생겨서 3숙영지라하고
영천동의 것을 5숙영지라 하였답니다.
군대에서는 4자를 쓰지 않으니까요.

 


당시 5숙영지지구대장이 근무하던 곳이라 합니다.

이 사진의 건물이 많이 보수해서 형태가 조금 바뀌었지만 그때 건물이라는 분도 계시고
그때가 언젠데 그 건물이 남아있냐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모슬포에 남아 있는 건물과 비슷하긴 합니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기록도 상이한 게 많고

현장에 가서 어르신들에게 여쭤보면 기억도 다 틈이 벌어져 있습니다.
공연한 싸움만 붙여 놓고
결국 목소리가 크거나 직위가 있으신 분 기억에만 따르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이번 답사간에도 70넘은 어르신 세분을 만났는데 다 토박이라 하시면서 세분의 기억이 다 다릅니다.


비석위치만 해도 어느 분은 비석거리에 있던 목사송덕비를 경찰 순직비 있던 곳으로 옮기면서

삼성여고 부근 하천변에 있던 군인 순직비를 같이 옮겨왔다 하기도 하고

 

어느 분은 길옆에 큰 공터가 있어서 비석들을 다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 하시기도 하고

 

또 한분은 지금 비석이 있는 곳 앞으로 큰길이 있던 것은 맞는데 그 비석들에 대해서는 본적이 없다하십니다.

 

법호촌에 대해서도 기억이 다릅니다.

 

일치하는 것 하나

이길을 따라가면 지금은 농장들이 들어서고 개발이 되어 길이 끊겼지만

홍서훈순직비있는 곳 옆으로 해서  삼매봉까지 갈 수 있었고

숙영지에 있던 병사들이 그 길을 지나서 사계 항만대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전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기억도 사라지듯 그렇게 아픔도 사라지는데

마을 어른들이 저 한테 하시는 말씀, 쓸데없이 그런건 왜 알려고하느냐는 말씀처럼

공연히 잊고자 하는 기억을 헤집고 다니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Fariborz Lachini    -   Desire to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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