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

하늘타리. 2011. 3. 7. 11:44

웃법호촌을 다녀오다가 들러본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입니다.

 

유족중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다니시는지

 내부는 약간 정비되어 있습니다.

 

 

 

1970년 12월 15일 오전 9시경 일본 교도통신이 일본 해상보안청소속 구사사카 마루호의 긴급보고를 인용

300여명이 탑승한 여객선의 조난사실을 전세계로 타전합니다.
우리나라에는 11시경에야 방송으로 이사실이 알려지지요.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 50분경 대마도 서쪽 100km 지점에서 전복돼 침몰한 것입니다.
침몰 직전 발신한 긴급구조신호(SOS)를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곳도 수신하지 못하고 일본에서만 희미하게 잡았을 뿐입니다.

승객들이 처음 구조된 것은 오전8시경. 일본 어선에 의해서입니다.

일본 측의 무선연락을 받은 한국 해경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당일 정오까지도 '연락을 받은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던 해경이 출동한 시각은 오후1시.

일본의 순시선 급파보다 네 시간이나 늦었습니다.

당국이 헤매는 사이 표류하던 생존자들은 추가 구조된 6명을 제외하고는 영하의 바다에서 얼어 죽었습니다.

 

 

남영호 서귀포취급소 승선자 명부에는 승객 수가 274명으로 등재되어 있었지만

확인 과정을 거치면서 승객 수는 계속 불어났습니다.

경찰은 승객 수를 338명으로 최종 확인하였고 여객승선 정원 302명보다 36명을 더 태운 것으로 밝혀졌으며

64명은 승객 명부에도 기록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적재 화물량은 정량인 130톤의 2배에 가까운 229톤으로 밝혀졌지요. 
적재정량의 약2배를 초과한 과적, 항해부주의,

긴급신호를 발신 후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것이 피해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었다고 분석합니다.
게다가 구조작업이 늦어져 326명(어느기록에는 319명)이 숨지고, 당시 금액으로는 1억7천만원의 큰 재산 피해를 냈습니다.

그 당시의 건국 이래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된 이 사고는 생존자가 겨우 12명이라 합니다.
이 남영호의 조난사고는 1945년 10월 4일 귀환동포를 태운 부도환(浮島丸)이 일본 해상에서 침몰해

360여 명이 익사한 사고 이래 최악의 참사입니다.

그리고 부도환사건때와 마찬가지로 남영호의 승객 대부분이 제주도민들이어서

남영호 침몰로 인해 제주도민들의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당시 제주신문은 남영호 참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희생자 조위금품 접수를 하는 등 유가족 돕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1971년 3월 30일 남영호 조난수습대책위원회명의로

서귀포항에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을 세워 유가족과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로 하였습니다.

 

제막식 당시 제주도지사는 이렇게 말했다합니다.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은 슬픔의 탑으로 남기지 말고

이를 극복하고 모두의 지성으로 바다를 다스려 힘차게 전진하는 역사의 탑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말 그 자체는 의미있는 말입니다만 ...

슬픈 기억을 애써 잃버버리려 하는지

이 위령탑은 항만확장을 이유로 부수어지고

다시 1982년 9월 현재의 서귀포시 상효동 돈내코 근처에 새로 세워졌습니다.

 

 

 

 

  


단순한 확장공사에 따른 것이라면 그 부근을 정비해서 옮기면 될 듯한데 이렇게 구석진 곳에 다시 새운것은

관광객들에게  여객선 이용에 대한 불안감을 주게 될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없엤다가 어떤 이유에서건 다시 세운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제주도와 서귀포시 어디에도 이를 관리하는 부서가 없습니다.

담당부서가 없으니 부수고 새로 세운 기록도 없습니다.
공적시설이 아니라서 공기관에서 관리할 수 없다는 말에 모순이 있는 것이
사건발생후 접수된 일반조의금을 도에서 집행하였으며

(기록물제목 : 남영호조난자조의금최종분지급액결정및전도지급. 1970)
1972년 일반회계 예비비로 국가에서 유족보상금이 지급되었고

유족보상금에 대한 기채변경을 당시 내무부에서 승인해주는 등

국가와 도에서 사건수습을 하였는데

이제 세월이 지나니 개인의 슬픔을 어찌 다 공공기관에서 하느냐하는 것은

유족들을 또 한번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유족들은 더 이상 슬퍼할 여력도 없습니다.
골프장 건설로 진입로도 없어 돌담을 넘고 잡목숲을 헤쳐가며 묘역에 가야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골프공이 날아들어옵니다. 

 

위령탑 뒷쪽으로 보이는 법성사라는 큰 절이 옆에 있는데

그곳에서라도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수륙영산 천도재를 지내주시고

이곳까지 길이라도 정비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은 너무 큰 것일까요

 

위령탑 문을 나서서

골프장 너머 보이는 영천오름, 칡오름, 제지기오름과 숲섬을

하염없이 처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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