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리입니다.
신자가 들어가는 제주도의 대다수 마을처럼 일제강점초기이후 설촌된 마을인가 할 분이 있겠지만
고려조 충렬왕 26년(서기 1300년)에 제주를 동·서 도현으로 설치할 때에도 이곳에는 마을이 있었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곳보다 보다 위쪽 지역에 숙군마을(숯꾼마을으로 들립니다)이라고 이름하고 있었는데
식수 곤란으로 물을 찾아 해안으로 내려온 것이 지금의 신촌리 자리이고,
이 때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는 데서 신촌리라 부르게 되었다합니다.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유서 깊은 마을의 신당을 찾아갑니다.
마을 올레길을 지나
성처럼 쌓아놓은 남당물 옆을 지납니다.
큰물에서 다시 마을 쪽으로 올라와 좁은 올레로 통하여
이런저런 작물이 섞여 심어져 있는 밭 맨 안쪽에 있는 당으로 갑니다.
신촌리 본향 큰물머리 영등빌레당입니다.
배의 안전한 출입을 기원하여 당을 만들었다 하고
큰물머리 신당한집이라고 불리우시는 해신계할망이 좌정해 계십니다.
지금은 특별한 제일이 없이 농사를 지으시거나, 바닷일을 하시거나, 물질을 하시거나 구분 없이 택일하여 다니시면서
해상안전, 풍어, 풍등, 우마목축의 번성, 아이의 치병 등을 기원합니다.
조심스러이 문을 닫고 뒤돌아 나오며 평안하시길 빕니다.
큰물옆 몰물입니다.
주변의 공사자재에 깜짝 놀라 내부를 보니 아직은 온전합니다.
그런데 일뤠당은 황당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앞에 이덕구생가를 비롯한 집 몇 채를 철거하고 큰 길을 내는데
아무 상관없는 일뤠당도 훼손하고 건설부수재를 가져다 놨습니다.
주변에 경로당이 있어 할머니들이 꽤 계십니다.
여쭤봤습니다. 당을 어디로 옮길 계획이 있느냐고요.
돌아온 대답이 젊은 사람이 쓸데없는 소리한다. 귀신대접을 이제 뭐 하려 하냐? 입니다.
젊다하니 기분은 좋습니다만....이미 그분들에게 당은 쓸데없는 시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어머니, 내누이들이 어렵고 힘든 세월 하소연하던 장소. 그리고 내가족의 안녕을 위해 절실하게 빌던 곳. 그곳을 찾아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 옆 돈물
(소금기가 안 섞인 단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을의 가장 맑고 깨끗하던 생명수
그곳도 이리 처참히 뭉개어 집니다.
과거 어느 날 그것이 어렵고 힘든 생활이었다 하여 기억하기 싫더라도
그날을 슬기롭게 지내준 어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겁니다.
또 다른 개발로 무조건 부수고
나중에 어떤 필요가 있으면 그때 그럴듯하게 다시 만들면 되겠지 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닌 듯싶습니다.
신촌리 동동네를 갑니다.
일뤠낭거리 일뤠당.
당옆에 큰나무가 있어 일뤠낭거리라 했다는 데 큰 나무는 이제 없습니다.
길목에 자연석으로 돌담을 두르고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뤠도를 모시고 그와 함께 큰물머리 영등빌레당을 설립했다고 하는 고동지와 김동지를 모십니다.
이곳 일뤠도가 고동지영감 백발 술에 올라온 미륵보살이라 합니다.
신체는 네모난 돌로 만든 석궤인데 그 안에 미륵이 계신 듯 합니다.
현재 제일은 일정치 않으나 당궐들이 다닌 흔적이 있습니다.
랄로 / 첼로 협주곡 D단조 피에르 푸르미에(v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