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경주 인왕동 상서장

하늘타리. 2011. 2. 7. 01:00

 경주박물관 인근 인왕동 도로옆에

꽤 높이 올라가는 돌계단 앞으로 넒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돌게단끝에 있는 건물은

최치원이 살던 집으로 상서장이라하여 경북도기념물 4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습니다.

 

문창후 최선생 유허비라 쓰여 있는 비석이 서있고

 

 그 옆에 친절한 안내판이 있습니다.

 시무십여조의 글을 진성여왕에게 올렸던 곳이다라고 설명되어 있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일설에는 상서장이라는 뜻이 고려태조왕건에게 글을 올린집이라 합니다.
신라의 신하가 고려태조왕건에게 글을 올렸다?


한번 알아보지요.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합니다.

그의 나이 12세에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 학문을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18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당나라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한림학사승무랑시어사라는 큰 벼슬에 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28세가 되자 신라로 돌아와 西學하여 얻은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합니다.
이때가 신라 헌강왕 11년이지요.


헌강왕 이후 정강왕의 뒤를 이어 51대 진성여왕이 왕좌에 오릅니다.
이때의 신라는 임금이 무능하고 정치가 섞어 백성의 고충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으며,

국력도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최치원에게도 의심과 시기가 쏟아져 외지인 태산군태수로 나가게 됩니다.


이 때 선생은 문란해져만 가는 나라를 바로 잡고자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의 글을 올렸습니다만

돌아오는 것은 질책과 하시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조용히 살면서

계원필경', '석순응전'등의 저서와 숭복사지 등 많은 비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최치원은 신라말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자 할 때

왕건이 비상한 사람으로 천명을 받아 반드시 나라를 열 것을 알고 편지를 보냈는데,

그 글 중에 계림은 낙엽이 지고, 고려의 송악산엔 솔이 푸르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남의 나라인 唐에서는 실력에 따라 관직에 나아 갈 수 있는 과거제가 시행되었으나

신라에서는 골품에 따라 신분과 계급이 정해져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려는 왕건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고려 현종은 최치원이 조상의 왕업을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하여 內史令을 추증하고,

14년 太平2년 임술(1022년) 5월에는 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습니다.


그후로 선생이 살던집을 상서장이라 부르고 고려말에 文昌侯崔致遠上書莊遺許碑를 세웠습니다.

 

상서장으로 올라갑니다.

문이 잠겨 있습니다.


기념물이긴 하지만

근년에 후손들이 다시 세웠고

최치원유적보존회에서 소유, 관리하니까

문을 열지 않아도 누구에게 무어라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담밖에서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대문안 왼쪽에 있는 유허비각을 한장 찍고 

 

 저 안쪽 상서장 건물과 추모문을 한장 찍습니다.

돌아내려오면서 떠오른 생각
쓰러져가는 신라를 위한 애국심으로 時務策등을 건의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자기에게 국비유학을 시켜주고 그나마라도 출세할 수 있도록 해준 나라를 삼키려 하는 다른나라의 왕에게
그를 칭찬하는 편지를 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
알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