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경주 남산 함월사

하늘타리. 2011. 2. 6. 19:54

 경주 함월사.


달을 머금은 비구니절입니다.
남산의 금자라가 달을 다 먹어버리면 캄캄하여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지고,

달을 먹지 않고 그대로 내 보낸다면 밝은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니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이 절집에서 주석하시는 우룡 스님이 직접 지으신 이름이랍니다.

 

그 이름에 비해 절집이 너무 단촐하고 이 일대 그 흔한 문화재하나 없습니다만 절집 지은지 10년만에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는 절입니다.

 

우연히 작년, 아니다. 재작년에 접한 선지식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에서 우룡스님을 접한후 벌써 두번째 찾아온 절집입니다.

 불자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뵈어도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인생의 길을 배울뿐입니다만.....


책에서 우룡스님은 “<능엄경>을 볼 때는 스스로 아라한이 되고,

<금강경>을 볼 때는 스스로 수보리가 됨으로써 부처님과 직접 대화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당사자가 되어 그 시간과 공간, 그 자리에서 직접 질문한다는 마음으로 경을 봐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우룡스님은
 “불공이란 이제까지의 나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마음가짐과 언행 등을 반성하는 자신에 대한 참회가 기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선지식에게 길을 묻다(박희승 지음/은행나무 2009.7)

 이곳저곳 찾아서 접한 스님의 설법 한구절을 옮깁니다.


여러분들은 불교신자입니까? 불교도 입니까?

부디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참된 불교는 누구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 의지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불교신자' 라는 말이 우리 불자들을 모독하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우리 불자들에게는 '신도(信徒)'의 믿을 신(信)자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불교인'이고 '불교도'일뿐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요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일 뿐,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부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힘이 들어도 내 마음가짐을 내가 고치고 내 행동을 내가 고쳐가며 한 걸음 한걸음 부처가 되어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에 대해 확신이 서면 그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지,

그냥 부처님을 졸졸졸 따라가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인은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요, 부처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남보다도 눈이 하나 더 있어야 합니다.

즉, 진리의 눈이 하나 더 뜨여져야 만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두 눈에 보이는 세계속에서만 살아서는 안됩니다.

제3의 세계를 체험하여 제3의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세계는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죽은 다음에 가는 극락(極樂)이 아닙니다.

여기가 바로 극락이라는 것을 이 몸을 가지고, 바로 지금 내가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몸으로 극락을 체험하고 거기에서 내가 살아야 합니다.

이 몸이 죽고 난 다음에 가는 세계가 극락이 아닙니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 간 극락이 어디인지 누가 알수 있습니까?

거룩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에 가서 사는 것을 '극락을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평생을 불평불만 속에 찌들어 살다가

이 몸뚱어리 죽었다고 하여 어떻게 극락 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란 이 몸뚱어리 떨어진 다음에 가는 극락이 아니라,

이 몸을 가지고 바로 극락을 체험을 하고 거기에서 내가 살아야 하는 극락입니다.
나는 이러한 극락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교인의 목적이라고 생각 합니다...

 

또다른 설법

 

절은 불공을 하거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슴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가슴의 응어리라고 하는 게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데 그걸 이름을 바꾸어서 마음이라고도 하지요.
그리고 이 옷 벗어버린 사람을 영가라고 하고요.

가슴의 응어리 때문에 괴롭게 하면 영가라는 이름도 안 붙이고 귀신이라고 부르지만, 이게 다른 거 아니잖아요.
하나를 가지고 이름을 다르게 부르잖아요.
단 거기에 때가 낀 사람하고 때가 조금 덜 낀 세계가 차이점은 있지만,

결국 가슴의 응어리가 전부 모든 잘못을 만드니까,

이 자리는 가슴의 응어리를 푸는 것을 서로 대화하는 자리라는 것이죠.   

  가슴의 응어리가 수십 가지 수백 가지가 되는데 막상 이걸 제거하려고 생각하면 물질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담겨있는 것도 아니고, 제거할 방법이 없다 이거예요.
제거할 방법이 없으니까 결국 절에 오면

부지런히 염불하십시오, 주력이라도 부지런히 하십시오, 화두를 부지런히 하십시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목적이 거기에 있는 게 아니고, 가슴의 응어리를 푸는 데 목적이 있는 겁니다.

 염불 쪽으로든지 주력으로든지 화두로든지 집중해서 똘똘 뭉쳐나갈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가슴의 응어리가 하나씩 둘씩 어느 틈에 풀어지고 녹아져 버리고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염불하십시오, 주력하십시오, 화두 하십시오, 하는 소리 자체가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가슴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권하는 겁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니

약사여래불앞입니다.

내 가슴의 아픔을 치유할 약병을 들고 계십니다만...

손뻗어 청할 염치가 없네요. 

 종이에 적어온 설법전앞 주련을 옮깁니다.

碧眼老胡默少林 神光立雪更何尋

山光水色非他物 月白風淸是佛心
履携蔥嶺誰能識 盧渡長江自苦吟

可憐遺法今如此 每念顯絲感轉深

눈 푸르른 늙은 오랑캐 소림굴에서 말이 없는데, 신광은 눈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산빛 물빛이 다른 것이 아니고 흰 달 푸른 바람이 모두 부처님 마음일세.
짚신을 끌고 고개를 넘어간 것을 누가 어찌 알았을까? 갈대를 꺽어타고 장강을 건너올때 스스로 괴롭게 말했느니라.
아 슬프다 남겨주신법이 지금 이와 같은데 언제나 실가닥 늘어진듯한 생각을 보면서 감개가 깊어진다.

 

절집을 나서면서 떠오르는 조실스님의 또 다른  설법.

 

무조건 법당에 와서 무릎 꿇지 마세요.

아침저녁으로 내 자리에서 내 가족에게 삼배하세요.

그게 가장 진실한 예배입니다.

 

나는 늘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불교인이라면 먼저 내 가족 앞에 무릎을 꿇으세요.

내 가족이 그냥 내 가족이 아니라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부처님이 무엇인지 생각지도 못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부처님에게는 소리 지르고 욕을 하고 윽박지르면서 법당에 와서는 죽어라고 절을 합니까.

모두가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불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