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봉 가는길.
전망대가 있습니다.
이 계곡 아래 마을이 그 이름 고운 비파마을입니다.
석가사지, 불무사지, 잠늠골 절터와 탑 그리고 풀무절터가 있습니다.
안내판의 전설을 축약합니다.
"신라 32대 효소왕 6년(697), 망덕사 낙성식, 왕이 친히 행차하여 공양을 올리는데,
이때 차림이 누추한 중이 왕에게 재(齋)에 동참하기를 청하여 왕은 마음이 언짢았지만 말석에 참석하라 했다.
재가 끝나고 왕이 조롱조로 그 중에게 말했다.
왕 : 비구는 어디에 사는가 ?
중 : 예, 남산 비파암에 삽니다.
왕 : 돌아가거든 왕이 친히 불공을 드리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중 : 예, 잘 알았습니다. 왕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중은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왕이 놀랍고 부끄러워 수없이 절하고 모셔오라 하여 신하들이 찾아보니
비파골 안에 지팡이와 바릿대만 보일뿐 바위 속으로 숨은 뒤였다.
하는 수없이 왕은 비파바위 아래에 석가사를 지어 사죄하고,
숨어버린 바위에는 불무사를 지어 없어진 부처님을 공양하였다."
이러한 설화들이 이곳 남산에 불상과 불탑을 풍부하게 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설화가 말하듯 일반백성들은 남산과 남산 바위 속에는 부처와 보살이 머물면서
권세있는 자가 잘못을 저지를 때는 산에서 내려와 호되게 꾸짖고 가르침을 주고는 다시 산 속, 바위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려와 보살펴 준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힘있는 자들에게 눌려 살지만 그들을 꾸짖고 바로 잡아줄
그 보다 더 권위있는 어떤것에 대한 신앙이 예술로 승화되고 표현되어,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佛像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진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슬픈 현실이지요.
내 스스로 힘있는 자들의 압제를 극복할 수 없으니 그보다 힘있는 누구에게...
제발 나에게 너무 많은 압력을 주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하는 겁니다.
망산이 보입니다.
아니 산은 않보이고 안내판만 보입니다
서라벌 너른들에 남신과 여신이 찾아왔습니다.
사랑를 속삭이며 이곳에서 천년만년 같이 살고자 합니다.
그를 본 어느 경망한 여인이 크게 소리지르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소리에 놀란 두신이 그자리에 걸음을 멈추자 왠일인지 다시는 걸음을 멈출수 없었다 합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남신은 남산이 되고 여신은 망산이 되어 이곳 서라벌에서 영원이 살게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만....
고속도로건설로 남산과 망산 사이를 넘나들 수 없이 갈라버렸고
여기저기 잘려나가고 지금도 계속 이런 저런 개발로 살이 파이고 뼈가 깍이는 부인, 망산을 보는
남산의 눈에서는 지금도 피눈물이 흐를 겁니다....
금오봉입니다.
서라벌 벌판 한가운데 편안히 자리잡은 황금자라의 머리부분입니다.
남산은 전체적으로 크고 작은 바위들로 모여 있지만 봉우리들은 대개 사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68m의 표고를 나타내는 금오산 정상에는 산이라는 글자가 상형으로 표시된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통상 미소달마라 부르는 엷은 미소가 인상적인 달마도로 이름이 알려진
남령 최병익이 금오산을 노래한 한시가 쓰여 있습니다.
詠金鰲山 금오산을 노래함
高高靈靈金鰲山 높고도 신령스런 금오산이여!
千歲王都雄輝抱 천년왕도 웅혼한 광채 품고 있구나.
待人歷年復千載 주인 기다리며 보낸 세월 다시 천년 되었으니
今日誰在能受氣 오늘 누가 있어 능히 이 기운 받을련가?
최병익의 한시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정일근의 시 한수..
적어봅니다.
비단 오백 년 종이 천년을 증명하듯
우리 한지에 쪽물을 들인 감지는 천 년을 견딘다는데
그 종이 위에 금니은니로 우리 사랑의 시(詩)를 남긴다면
눈 맑은 사람아
그대 천년 뒤에도 이 사랑 기억할 것인가
감지에 남긴 내 마음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경주 남산 돌 속에 잠든 나를 깨우러 올 것인가
풍화하는 산정 억새들이 여윈잠을 자는 가을날
통도사 서운암 성파(性坡) 스님의 감지 한 장 얻어
그리운 이름 석자 금오산 아래 묻으면
남산 돌부처 몰래 그대를 사랑한 죄가
내 죽어 받을 사랑의 형벌이 두렵지 않네
종이가 천년을 간다는데
사람의 사랑이 그 세월 견디지 못하랴
돌 속에 잠겨 내 그대 한 천 년 기다리지 못하랴
임간도로를 걷습니다.
저 맞은 편에 고위봉이 보이는 군요.
495m인데 엄청 높아 보입니다.
아까 용장사지 삼층석탑에서 올라오면서 지나친 용장사터로 내려가는 삼거리의 이정표
일단 길을 따라 이영재로 갑니다.
고위봉 앞으로 이무기능선, 그 앞 태봉과 그능선, 그리고 또 그 앞 쌍봉이 보입니다.
용장사터방향인데 삼층석탑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다른 불상, 다른 석탑을 찾으라 하십니다.
삼화수리라고도 하는 삼화령 고갯길에서 보는 연화대좌입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수리라고 하는 것은 높은 곳을 의미하는 말이라 하고
남산에는 세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가 삼화령이 아니고 삼화령중 한곳이네요.
그럼 여기는 어디라 부르나요?
이름은 모릅니다만 이 봉우리에 지름 2m의 연화대좌가 남아 있다는데....
그 길 입구에 생태복원을 위해 가지 말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시 한번 뒤돌아보고 그냥 지나 가려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까 금오봉에서도 그렇고
불상 및 그 유적가는 길은 식생보호를 핑계로 다 막았는데
식생보호야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길을 막아 그 길에 풀이 자라면 그 길은 쓰지 말라는 것일까?
그럼 어디로 가라는 말?
가지 말라는 말?
안내판도 잘 없고 있는 길은 막아버리고
대상을 찾지못하는 분노가 삼화수리 연화대좌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혼자 씩씩거린 것이 공연히 민망해서
멍하니 고위봉쪽을 봅니다.
은적골쪽입니다.
고위봉 앞으로 2.5Km...
또 다른 사거리
앞의 길이 세갈레로 나뉘입니다만
가운데길로 가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는 안내가 되어 있지 않네요.
아는 사람만 다니는 길인듯 싶은데 이리로 가면 산정호수로 가는길일까?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패스..
왼쪽길로 해서 칠불암쪽으로 갑니다.
천동골쪽을 바라보며 천동탑을 찾는데 보이질 않습니다.
꼭 군인아저씨들 개인호 파놓고 무언가를 지키고 있던 곳 같습니다.
약간 힘들어 하다가..
주변을 보고 감탄하다가 또 심심해 하다가...
또 감탄하다가..
그렇게 능선을 오릅니다.
고위봉과 칠불암이 아직은 같은 방향입니다.
여기서는 갈라져야 합니다.
신선암과 칠불암의 마애석불을 보려면 잠시내려갔다 와야 합니다.
풍광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신선암에 왔습니다.
칠불암 뒤로 높이 솟은 암벽에 磨崖菩薩半跏像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반가상 앞으로는 아찔한 절벽이 자리 잡고 있는데 보살의 모습은 한껏 여유롭습니다.
바위를 얕게 파서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보살상을 모셨는데,
뚜렷한 이목구비, 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표현이 섬세하고,
양감이 두드러지는 것이 입체감이 뚜렷합니다.
어느분이 약사여래와 지장을 함께 모셨습니다.
포대화상이 잘 보필해 드릴겁니다.
마애보살님앞에서 내려다본 칠불암입니다.
마애삼존불과 사방불이 함께 계시는 칠불암으로 내려갑니다.
W. A. Mozart
Rondo for violin & orchestra
in Bb major, k. 269
David Oistrakh, cond & vn
Berliner Philharmoni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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