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를 갑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는 곳입니다.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塼石)처럼 깎아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模塼石塔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입니다.
수리되기전 사진입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속에서 각종의 玉類, 가위, 은바늘 등과 함께
崇寧通寶, 常平五銖 등 고려시대의 중국주화가 발견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舍利裝置에 추가하여
고려시대에서도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동전을 넣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넓은 方形의 기단 위에 세워진 1층탑신의 4면에 화강암으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양편에는 佛法을 수호하는 金剛力士라고도 하는 仁王像을 조각하였습니다.
전탑주위 기단 위에는 네마리의 돌사자가 있습니다.
두마리는 입을 벌리고 두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선덕여왕대(634)에 건립된 이곳 芬皇寺는 황룡사와 함께 국가적 차원의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보통 절 이름이 경전의 내용이나 절을 짓게 된 사연을 담게 되는 것이 보통인데
분황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사리함속에서 나온 각종의 玉類, 가위, 은바늘 등이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다하여
芬皇寺이름을 향기롭고 아름다운 절이라고 해석합니다.
탑돌이 하듯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보광전으로 갑니다.
약사여래입상에 대한 설명을 찬찬히 읽고 약사여래를 뵙습니다.
여래의 얼굴은 꼭 천진무구한 어린아이같습니다.
양어깨를 두툼이한 옷을 입고계시고 옷주름은 다분히 형식적입니다.
기록에 755년(경덕왕 14)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6700근이었다 합니다.
1998년에 불전을 해체 보수했는데 그 때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다시 만들었고
불전도 1680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절은 자장과 원효가 머무른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華嚴經疏, 金光明經疏 등의 저술을 남겼다고 하고
그의 敎學이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졌다 합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합니다.
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도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
경덕왕 때 漢岐里라는 곳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었답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효대사의 흔적은 화쟁국사비부가 있습니다.
원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고려 숙종대 (1101)에 만든 화쟁국사비가 있었다 하는데
현재는 비신을 받친 비대좌만 있고,
그 위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라고 쓴 글이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제눈으로는 식별이 않되네요.
분황사석정입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우는 신라시대의 우물입니다.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습니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한달 가량 서라벌에 머물렀다가 돌아갔는데,
그 다음날 두 여자가 나타나 원성왕에게 아뢰기를
"임금님, 저희들은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있는 두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저희의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속에 넣어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사람에게 명령하여
저희들의 남편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물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원성왕은 하양관까지 쫓아가서 하서국 사람에게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세용을 잡아서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자
하서국 사람들은 물고기 세 마리를 원성왕에게 다시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원성왕이 물고기를 받아서 다시 세곳에 놓아주자,
세 마리의 용은 각각 물 속에서 한길이나 뛰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분황사의 우물을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는 뜻의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 부르고 있다합니다만...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1965년 우물 속에서 모두 14구의 목이 부러진 석불들이 출토되었고
이 석불들은 경주국립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
종무소건물앞 어느 보살의 사리함이라고 적혀 있는 일본식 석등뒤로
아무 설명이 없는 석조여래가 서계십니다.
노천에 그냥 서계시다 보니 뒷면 광배부분을 포함하여 이곳 저곳 마멸이 심한데
특히 얼굴부분은 육계와 양쪽 귀부분만 남아있습니다.
무릅아래 묻혀 있는 부분이라도 땅위로 나와 땅을 밟고 서계시게 해주면 고마울텐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색이 절집에서 이러면 않되는 거지요.
없어진, 지나간 옛영화만 그리워하지 말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소소한 것부터 귀하게 여겨야 할 것같아요.
석탑을 다시한번 둘러보고
절집밖에 있는 당간지주를 받치고 거북이를 만나러 갑니다.
허허벌판, 불어오는 바람에 내마음도 허허로워 집니다.
Schumann
Liederkreis o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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