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 넓은 들 입니다.
면적 82,000제곱미터(24,500평)라고 합니다.
신라의 국찰이 있었던 자리
영화가 컸으니 그 쇠락도 컸나요.
찬란한 영광 뒤의 허무만이 남아 있는 공터는 인간사의 부질없음을 느끼게 합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 지은 절입니다.
진흥왕은 흥륜사의 주지를 지냈을 정도로 불심이 높았던 왕으로,
진흥왕 14년(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고 절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절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습니다.
우연한 일치이겠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 결과
이곳은 애초 늪지를 메워 대지를 마련했음이 드러났는데,
이런 사실은 황룡이 나타났다는 설화와도 얼마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절의 건물배치가 일단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뒤 574년에 금동장육삼존상을 만들었고,
장육존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진평왕 6년(584년)에 세웠습니다.
구층목탑은 선덕여왕때 세워집니다.
이 목탑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세우게 되었는데,
당시 신라인의 기술로는 이 목탑의 건립이 어려워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645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이로써 황룡사는 4대왕 93년간에 걸친 대역사가 마무리되어 명실상부한 신라의 국찰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왕성인 월성 주변에 위치한 지리적 요건, 9층 목탑의 거대함과 화려함으로 왕들이 자주 드나들던 신라시절 호국불교의 중심지였었고
고려시대때도 중요사찰로 보호받았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습니다
황룡사의 중심선상은 남쪽에서부터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절의 배치를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차 칸 수를 늘려 잡아
절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도록 고려한 것도 매우 이채로운 모습입니다.
금당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건물로, 금당 안에는 장육존상과 좌우에 10대 제자상및 사천왕상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신라시대 최대 사찰인 황룡사(黃龍寺)에 안치된 불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황룡사9층목탑을 비롯한 사찰 규모와 가람 배치 등은 그동안의 연구작업과 첨단과학기법 등에 힘입어 대략적인 윤곽은 드러났지만
정작 이곳에 모셔진 부처님상은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금당터에 남아있는 대좌석을 통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금동장육존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인도의 아쇼카 왕이 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를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여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 실어 보냈습니다.
이렇게 울산만에 도착한 금과 철을 동축사에 모셔 두고 있다가 경주로 실어와 574년(진흥왕 35년)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 하였는데,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황룡사에는 구층목탑과 장육존상 외에도 성덕대왕신종보다 무게 4배나 크고 17년 앞서 주조된 동종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오고 있지만
이 역시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지금 황룡사터는 저멀리 미탄사 삼층석탑만이 시야에 들어오는 그저 텅 빈 넓은 벌판입니다.
경주시와 문화부는 이곳에 2034년까지 4단계에 걸쳐 총 사업비 2181억원을 들여 황룡사 복원사업을 추진키로 했다고 2합니다.
그 계획대로 하면 지금이 2차 년도이지요
1단계로 아마 2006년인가 7년에 황룡사 9층목탑을 투각으로 형상화했다는 82미터 높이의 경주타워를 준공한바 있고요.
(경주타워)
2단계로는 레이저쇼를 정기 상영하면서 황룡사 관련 유적 발굴과 원지(園池)유적 복원 ,
신라 전통공원 등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어 2015년부터 10년간 3단계로 황룡사 복원사업을 준비ㆍ착수한 뒤
2025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연차적 복원공사를 추진할 예정이라 합니다.
좋은 이야기입니다만
학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황룡사 9층 목탑의 구조는 물론, 높이조차 정확히 모르는데 어떻게 ‘복원’할 수 있는가”라며 비판합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높이를 삼국사기는 “경문왕 13년(873년) 9월에 (기울어진) 탑의 개조가 완료되니 9층으로
높이는 22장(220척·약 66m)이었다”고 썼고
삼국유사는 ‘황룡사 9층탑’이라는 항목에서 “높이가 225척(약 67.5m)”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터에서 출토된 ‘사리함기’(舍利函記·서기 872년 황룡사 탑을 고치기 시작할 때 그 내역 등을 기록한 것)에도 높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일부 글자가 탈락돼 정확히 판독되지 않는 상태라고 합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문화부가 제시한 높이는 기록과 비교해 12m 이상 높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문제는 높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황룡사탑의 정확한 구조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황룔사탑 복원 모형)
황룡사탑터는 1976~1983년 발굴됐는데, 탑의 구조를 알려주는 자료라고는 건물의 기초를 이루는 초석과 기와, 풍경뿐입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대략의 높이와 몇 칸 건물이었다는 것만으로 문화재를 복원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습다”고 비판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황룡사탑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21세기에 새로 지은 ‘제2 황룡사탑’일 뿐일 수도 있겠습니다.
베트남의 고대 푸난(Funan·扶南) 왕조 시대 6세기 유물로
남부 메콩강 하류 삼각주 지역인 옥에오(Oc Eo)유적에서 출토된
높이 29.4㎝의 아육왕상(阿育王像)식 불상사진을 올리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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