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足입니다.
정몽주선생 생가지와
그를 배향한 오천서원.
그리고 유허비각을 올리고 난후..
다른 곳에 대한 정리를 하다가...
무언가가 빠진듯하여
옛사진 뒤적여
정몽주선생과 이석형의 묘역을 올립니다.
이방원은 뜻을 같이 하지 않겠다는 정몽주선생을 그의 부하들을 시켜 선죽교에서 살해합니다.
그리고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저자 거리에 내다 버리고 시신을 치우지 못하게 하였지요.
이를 본 송악산 스님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초라하게 나마 풍덕군(豊德郡)에 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몽주를 비롯한 반대세력을 모두 숙청한 이성계는 3개월만에 조선왕조의 태조(太祖)로 등극하였습니다.
그후 왕자들의 왕위 다툼으로 정국은 혼란해졌는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권력 장악에 성공하였지요.
이성계는 자식들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선덕왕후 강씨의 소생 방번과 방석이 죽자
이방원을 원망하며 고향 함흥으로 가 칩거합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正宗에 이어 왕위에 오른 太宗 이방원은 그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이제 왕권강화에 나섭니다.
그는 자신의 그릇이 큰것을 과시할겸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충성심을 신하들에게 강조하기 위해
이제 아무런 위협도 되지않는 죽은 정몽주를 충절의 대명사라는 미명으로 복권시키기로 합니다.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에 이장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곳 용인에 묘역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를 기념하여 이곳 용인에서는
용인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포은선생기일전후에 포은문화제를 열어 포은선생천장행렬등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포은선생 묘역을 둘러보시지요.
홍살문을 지나서..
묘역을 올려다 봅니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쌍유혈이라는 건데...
왼쪽이 정몽주선생의 묘역이고 오른쪽이 이석형의 묘역입니다.
정몽주신도비각
신도비
1699년(숙종 25년)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이 비문을 썼고, 글은 송시열이 지었으며, 전액은 김수항이 썼습니다
정몽주의 묘역.
석물이 이렇게 어지럽지 않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장명등을 세우고 기존에 있던 문인석옆에 새로 문인석을 추가로 세웠습니다.
묘비입니다.
묘역 좌측에 서향으로 있습니다.
조선조에 세운 비석이었음에도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라고 새긴것은
공께서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라 합니다만...
묘비에는 사망당시 직함을 써야하고 사망당시 포은에게는 고려조 직함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묘표앞에서 보니 새로이 세워진 문인석과 예전부터 있던 문인석사이로
손주사위 이석형의 묘역이 보입니다.
이석형에 대한 공식적 자료를 옮깁니다.
조선 태종 15년(1415년) - 성종 8년(1477년)
조선 세조 때의 명신으로 자는 백옥(伯玉)이며 호는 저헌(樗軒)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李茂)다.
이무는 중국 당나라의 중랑장(中郞將)으로 신라 무열왕 7년 소정방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그는 황해도 해주 근처인 연안에 터를 잡아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연안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진 이석형은 조선초 연안이씨의 번성을 가져온 중흥조다.
그는 세종23년 문과에 장원한 이후로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를 섬긴명신이었다.
문종 1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고,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면서 정인지 등과 고려사(高麗史), 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홍경손과 함께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편찬하였다.
세조 즉위 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에 올랐다.
팔도체찰사(八道體察使)로 나가 지방의 호패법 시행을 감찰하였고,
세조가 죽은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지중추부사(知中 樞府事)를 거쳐 예종 1년 정일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성종 1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고 다음해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이석형의 묘역입니다
이석형의 묘비
이석형의 묘에서 보이는 정몽주의 묘역
천묘할때인 1406년에서 몇년이 지난 1415년에 저헌 이석형은 태어납니다.
후에 포은의 증손녀와 부부가 되었습니다
포은의 증손녀인 저헌의 부인 정씨부인이 친정으로 와서 첫아이를 낳고 바로 돌아가시니까
이석형의 장인인 포은의 손주가 이를 불쌍히 여겨
포은 선생묘 인근에 미리 준비하였던 자신의 묘자리를 내어주고
후에 이석형과 정씨부인을 합묘하게 되어
이때부터 연안이씨 문중의 묘가 들어서게 된것입니다만...
계유정난때의 이석형의 자세가 불분명하고
그후 세조의 총애아래 승승장구하였다하여
혹자들이 포은선생묘역에 연안이씨 문중의 묘가 들어서는데에 대해
이런저런말을 합니다만...
포은 선생의 묘보다는 저헌 선생의 묘가 더 큰 혈(穴)임에는 틀림없다합니다.
심하게는
포은의 묘는 이석형묘의 백호에 해당될 뿐이다 라고 하는 풍수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포은의 후손보다는 저헌의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였지요.
광산 김씨(光山金氏), 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함께
조선의 삼대 명문중의 하나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며
이 연안 이씨가 빛을 발하게 하는 주역이 바로 이석형의 후손들입니다.
한문학의 대가이며 선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이명한(李明漢)이 인조 때 대제학을 했고
손자 이일상(李一相)이 효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하는 등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하였습니다.
또 이석형의 5대손 이귀(李貴)는 인조반정의 공을 세워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여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 되었고
그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이후(李厚)는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는 영조 때 영의정,
이복원(李福源)과 그의 아들 이만수(李晩秀)는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내 2대가 연속 대제학을 하였고
이복원의 큰아들 이시수(李時秀)는 영의정을 지내는 등 연안 이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총 250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했고
정승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각각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으로 위세를 떨쳤습니다.
반면에 포은의 후손들은 현종 때 우의정에 오른 9대손 정유성(鄭維城)과 판서 2명이 있었을 뿐
크게 벼슬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비각공원을 조성, 질서정연하게 시립한 연안이씨의 위세를 보고
묘역 하단에 있다가 연안이씨 비각공원으로 옮겨 흐뭇하게 자리잡은 이석형의 신도비각을 봅니다.
Aaron CoplandAppalachian Spring suite
Atlanta Symphony Orchestra
Louis Lane, c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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