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선생 생가터.
포항 오천 문충리입니다.
기림사를 지나 오천으로 들어오는 길가에 포은정몽주선생 생가터 가는 길 표지가 있습니다.
어 언제 만들었지 예전에는 없었는데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 표지를 따라 들어갔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무 표식이 없습니다.
어찌어찌 길을 헤메이다 희미한 옛기억으로 문충국민학교 뒤 아무도 다니지 않은 눈쌓인 길을 걸어갑니다.
저기 무슨 안내판이 보입니다.
포은 정몽주선생 生家祉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어렸을때 말을 타고 노는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게시판옆의 제법 큰 돌이 포은선생이 말타기놀이를 할 때 디딤돌역할을 한 바위라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당시에는 건물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돌과 벽돌을 섞어 쌓은 기단의 흔적비슷한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그런데....아무것도 없습니다.
게시판을 자세히 읽어봅니다.
"옛부터 전해내려오고 있는 포은선생 생가터.
그리고 탄생설화에서도생가터에서 해를 마시고 포은선생이 탄생하였다 한다.
주위에 상마암,기초석,토기조각등이 발견되었다한다.
포은선생의 숭고한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마을지명을 문충동,
사시던 골짜기를 문충곡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른다."
그리고 영천과 오천 모두 고향이라고 하신 공이 쓰신 제성역야우라는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今夜諸城驛 胡爲思舊居 오늘밤 제성역에 머무르면서 조용히 고향을 생각하노라
遠遊春盡後 獨臥雨來初 멀리 타향을 다니다 봄이 다 지난 뒤에 홀로 누워 있노라니 밖에는 비 내리네
永野田宜稻 烏川食有魚 영천 앞들에는 벼농사 풍년 들고 오천 바닷가에 물고기 잡히는데
我能兼二者 但未賦歸歟 내 어찌 이 둘을 가지고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 하는고
(게시판과는 조금 달리 해석해서 적었습니다)
포은 정몽주의 출생지가 최초로 기록된 것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2권 경상도 영천군조 인물편에 '고려 정몽주:고을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나오지요.
그리고 포은의 문집 '교서관본'(校書館本)에는 '지원3년 정축(1377년) 12월 무자일에 선생이 영천군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서애 류성룡이 지은 '연보고이'(年譜攷異)에도 '지원3년 정축 12월 무자일에 선생께서 영천군의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고요...
그리고 많은 기록에 영천시 임고면이 포은 선생의 출생지라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이곳 인근에도 오천서원이 있지만
영천시 임고면에도 번듯한 임고서원이 있읍니다.
아래 사진 세장은 영천에 있는 서원과 유허비의 사진입니다.
율곡이이를 생각해 봅니다.
율곡이이는 서울 수송동사람입니다만
사임당신씨가 강릉 친정에 가서 이이를 낳아 어린시절을 보내었으니
그 출생지를 강릉이라 합니다만 강릉사람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포은선생도 그 어머니가 친정인 영천에 가서 낳아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면
출신지는 오천, 출생지는 영천 이게 맞는말 아닐까요?
만고충신 정몽주에 관한 일이다보니 저마다 끌어가려 합니다.
정몽주선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보물 1110호 仁祖己巳摹本鄭夢周影幀 (국립 경주박물관 보관)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고려 말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입니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묘현면 능원리에 있습니다.
충절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역사인물중 가장 미스테리한 분입니다.
정몽주는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고 합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였습니다.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쓰러져가는고려의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신흥 세력인 이성계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 하였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만....
단심가(丹心歌)의 임 향한 일편단심의 "임"은 누구인가? 무엇인가?를 진짜 모르겠습니다.
정몽주는 공민왕시절부터 벼슬을 한 사람이지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감행하며,
두 차례나 고려의 왕을 바구었을 때 때 정몽주는 무엇을 하였을까요?
위화도회군에서 정몽주가 어떤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곧 대제학(大提學)에 오르는 것을 보면 이성계를 지지하였던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최영(崔榮)장군과 우왕(禑王)을 제거하는 경우에는 이성계와 동지였습니다.
우왕을 제거하고 창왕(彰王)을 내세운 후,
1년 만에 다시 彰王을 제거하고 공양왕을 내세우는 일에도 정몽주는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이성계일파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고 한 장본인이 바로 정몽주입니다.
공양왕을 포섭하여 조준등 이성계 세력을 감금하거나 유배를 보냅니다.
이때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방원이 개성을 탈출하여 이성계와 함께 막강한 사병을 이끌고 개성으로 돌아왔고
이에 포은은 이성계의 부상 정도를 확인하러 이성계의 집에 들렀다가
이방원을 만나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를 남기게 됩니다.
이방원은 “우리가 뜻을 같이한 동지인데 뜻을 모아 같이 권력을 나누자 " 고 하자,
이미 공양왕을 포섭하여 모든 권력을 쥔 상태에있던 포은이 이방원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이방원은 수하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몽주의 "임"은 고려의 왕은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더욱이 고려왕조를 위한 충성심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정치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정치노선이 무었이었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를 죽인 자에 의해 만고충신으로 거듭납니다.
어찌해석해야 하는지..
역사를 공부하는게 아니고 역사를 읽는 입장에서는 이단계에서 그만 넘어가는게 좋겠지요.
내려오는 길에 폐가를 만납니다.
곧 철거될 듯 싶은데 유리문에 덧바른 창호지에 한시가 가득 쓰여 있습니다.
정몽주로 00번지 문충국민학교 비석에 1970년대 학교보건장 확장에 기여가 많으신분이 쓰여 있는데
영일군교육장보다 더먼저 쓰여 있는 동해지구 통제관이라는 직책은 무엇을 하던 사람일까 궁금해 하다가
자리를 옮깁니다
오천서원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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