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포항 오천 원리 오천서원

하늘타리. 2011. 2. 6. 12:48

오천서원


오천서원을 찾으러 오천읍 원동에 왔습니다.

 

지금의 원동, 오천읍 원리라는 이름에는 두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서원이 있어서 원리라 했다는 말이 있고
고을원이 있어서 원리라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마을을 둘러서 있는 인덕산에 옛 현성이 있었다 합니다.
예전에 한번 찾아본다고 헤메어 봤으나 그 흔적도 찾을수 없었습니다.
토성이었을테니 비전문가입장에서 무엇을 볼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옛날 아주 옛날에는 바다물이 이앞 항사천까지 올라와 있었답니다.
그래서 운제산에서 뻗어져 내린 이 산줄기에 성를 쌓았고

그 성안쪽으로 고을이 있어 원님이 다스렸다 하는데

그 당시 중심지가 바로 이곳 원리였답니다.

 

이곳 오천지역 특히 원리지역은

그 유래를 부족국가시대인 진한 12국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야 합니다.
이곳은 오늘의 오천, 연일, 대송, 동해 지역을 다스리던 진한 12국중의 하나인 勤耆國이라는 소읍국의 수도였습니다.

오천의 "烏"자는 태양속에 살고있다는 세발 달린 까마귀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지역을 신라아달라왕시기에는 迎日縣, 경덕왕때는 烏川縣으로,

고려초에는 延日縣이라 불리우는등 해와 관계가 있는 지명으로 불리워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정씨의 본관을 이야기할때 迎日 정씨, 延日 정씨, 烏川 정씨등으로 혼재해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현의 중심부가 내륙쪽으로 이동하여 마을이 피폐해지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은 공단지대의 변두리가 되다보니 이 사실을 아는이가 극히 드물뿐더러

20여년전 옛현성을 찾아본다고 일대를 헤메이면서 이지역을 오래살았다는 어른들에게 여쭈었다가

헛소리한다하여 거동수상자로 몰린적이 있습니다.


이부근 주민들은 최근 이일대에 구획정리를 하려고 개발중에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 및 유물이 발견되자 도리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원리라 불리었고 오천서원이 있습니다.

 

오천서원은 1588년(선조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습명(鄭襲明; ? ∼1151)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 25년인 1592년 소실되었다가 광해군4년 1612년에 다시 지어지고

그다음해 1613년에 烏川서원으로 賜額되었으며,
1740년(영조 16)에는 정사도(鄭思道;1318∼1379)와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을 推享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毁撤되었으며,1975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조선조 현종연간에 지금 이곳 원리로 이건되었다하니 서원이 없었을 때도 이곳 이름은 원리였던 것 같습니다 .

 

오천서원가는길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소나무숲 정자를 보고 길을 잘못들었네요.

 

다시 빠꾸

경사진 골목길을 올라가길 몇분여, 저기 서원이 보입니다.

 

 

안내판 

 

글씨가 않보일듯하여 들이대어 한번더 

 

동재와 오천재가 보입니다.

 

재실인 오천재입니다.

 

오천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강당입니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곳 답게
강당안에 각종 현판과 중수기가 걸려 있습니다. 

 

여재문을 지나 

 

사당인 충정묘입니다..

 

충정묘에는 정습명을 主壁으로 좌우에 정몽주, 정사도, 정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경북서원지를 참고하여 제향인물중 정습명만을 설명합니다.

鄭襲明

 "~ 1151년(의종 5년). 고려 중기 문신으로 號는 형양(滎陽),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향공(鄕貢)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보임되었고,

그 뒤 기거주(起居注),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1140년(인종 18년) 최충(崔沖),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거부당하였다.
1146년(인종 24년) 예부시랑에 승진하여 태자(太子 : 의종)에게 강서(講書)하였고,

그 뒤 승선, 한림학사,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등을 지냈다.
의종 즉위 후 선왕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거침없이 간(諫)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고,

김존중(金存中) 등에게 비방을 받자 자결하였다.
문명(文名)이 있어 <<석죽화>> 등 3편의 시와 표전(表箋)이 <<동문선>>에 전한다."

 

다른 분에 대해서는 한번 찾아보시는 것도 즐거울 것 입니다...

 

정몽주선생유허비각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