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함월산 기림사

하늘타리. 2011. 2. 1. 23:30

기림사.

 

석탈해왕 이야기 부터 해볼까요?
신라의 3대 왕성인 박·석·김 가운데 최초의 석씨 왕인 탈해왕에 대한 전설입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여 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 왕비가 임신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이는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보물과 함께 궤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답니다.
그 궤가 신라 땅에 와 닿았을 때 한 늙은 여자가 발견하여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가 길렀습니다.
궤가 바다에 떠내려올 때 까치들이 우짖어서 발견하였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떼어내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또한 궤를 풀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친 탈해는 A·D 8년 신라 제2대 임금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AD 57년 유리왕의 뒤를 이어 제4대 임금이 되었습니다.
태어난 곳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계림동 하서지촌 아진포’라 되어있는데,

조선 헌종 11년(1845) 그곳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여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였습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이고 그곳에서 탈해가 경주로 들어간 길이 지금의 4번국도가 될겁니다.


그길을 천축국승려 광유가 걸어갑니다.


이 도로를 따라오다 양북을 지나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달을 머금은 산, 함월산 기슭에 자리잡아 절을 창건합니다.

 


창건당시는 임정사(林井寺)라 했다합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 후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고 하네요.

사실 광유선사와 원효대사가 기림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언급은 후대에 덧붙여 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입니다.
기림사라는 절이름이 인도의 기원정사의 숲을 뜻하다보니 인도(천축국)에서 온 누군가가 창건한 것으로 각색되었고

 또한 원효의 경우 그가 정식으로 승려가 된 것이 648년으로

기림사라 이름 붙여졌다하는 선덕왕 12년인 643년에는 아직 절집에 살지 않습니다.

 

기림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입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681~692)이

신라 삼보 중 하나인 만파식적을 감은사 앞 바다에서 얻어서 경주로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쉬었는데

이 때 용에게 받은 옥대의 고리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용이 날아간 자리에 용연(龍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후 기림사에 관한 기록이 없다가 고려 후기에 가서 다시 나타납니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 조에 의하면 기림사 주지 각유(覺猷)의 행적이 나옵니다.
기림사 주지 각유가 맡았던 대선사라는 직책은 고려시대 선종계통의 가장 높은 계위였고

일연이 노숙이라고 존칭을 붙인데서 당시 그의 위격을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각유가 기림사의 주지를 맡았다는 점에서

고려후기 불교계에서 기림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하겠습니다. 

숭유억불정책하의 조선시대에도 기림사는

세종대(1418~1450) 해인사, 단속사, 견암사와 더불어 경상도의 4대사찰로 130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임진왜란시에는  경주지역의 승병과 의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합니다.

이후 기림사는 조선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31본산의 하나였습니다.

 

그런 대단한 절집을 다시 찾습니다.

 

표를 사고 들어와 임정교를 넘습니다.


기림사의 원사명 林井寺. 수풀속 우물이 있는 절이라는 이름만큼 기림사에는 오래된 약수가 많이 있습니다. .

다섯개의 우물중 한곳은 매몰되었고

나머지 네곳은 남아 있습니다.
혹시 보게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덕비와


사적비,


그리고 연혁안내판을 보고 

 


산문을 지나갑니다.

 

산문을 지나고 바로 그 옆 저수지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다섯 약수중 하나인 감로수가 있는 곳으로 가려 하는데 오지 말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마 이쪽으로 해서 저수지를 건너 선녀탕이나 용두연으로 가는 길을 폐쇄한 것 같습니다.
그냥 혹부리 할아버지 나무 한장 찍고 다시 천왕문으로 갑니다.

 


기림사 천왕문의 중건은 1987년에 이루어졌다합니다.

이 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 서, 남, 북에서 그들 권속과 살면서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며 불법을 수호하지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오른손에 삼지창, 왼손에 보탑을 들었고,
남방 증장천왕(曾長天王)은 왼손에 여의주를 들었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파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그런데....천왕문 사천왕의 생령좌.
오늘은 저 깔려있는 아귀축생이 갑자기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사천왕의 육중한 다리아래에 온몸이 짓밟혀 발버둥치는 아귀,축귀의 모습이 꽤나 고통스러워보이고

그 고통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가지 독을 부처의 절대위엄으로 조복하고자 하는 분노의 신장이 바로 사천왕이라는데

그렇다면 깔려있는 저 아귀의 모습이 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나자신이 너무 불쌍해 집니다.


뒤짚어 생각하면 저 축귀들도 그리 만들어지고 그리 태어났으니 그리된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모습은 억울하다는 외침아닐까요?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왼쪽으로 오탁수가 있습니다.
물맛이 좋아 까마귀도 마신다는 물입니다.
우물 주변에 사람이 많은데 그들 모두 생령좌로 보여 그 옆에 서있는 절집 안내판을 찍습니다.

 

담벽뒤로 보이는 범종루

 

진남루가 보입니다.

 


진남루에 대한 설명문

 

3층석탑, 대적광전, 그리고 약사전이 보입니다.

 


3층석탑


언제적 조성된건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 마당의 주인공입니다.

 

대적광전


대적광전 설명문

 

삼존불상


삼존불상 설명문

적(寂)은 번뇌를 멸한 고요한 진리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그 세계에서 나오는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설명문을 잠시 옮깁니다.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신불(三身佛)을 이루는데,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모양이 거의 같고 옷 주름까지도 비슷하다.
상체는 장대하나 무릎은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은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적절한 두께로 주름을 세겨넣은 옷자락 표현이 장대한 몸체에 잘 어울리는데,

왼쪽 무릎 위로 접어 올린 옷자락이 비로자나불만 살짝 한 겹 더 접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삼존불일 경우에는 좌우 부처들이 두 손을 서로 대칭되게 한쪽씩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은 둘 다 오른손을 들고있는 것이 색다르다.

삼신불의 교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불,순수하고 차별상이 없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형상화한 부처님이다.

일체의 존재는 그것의 나타남이다.

보신불(報身佛)
노사나불, 과거의 수행에 의한 공덕, 모든 미덕을 구비한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이다.

과거 세상에 모든 만행 선근공덕의 보답으로 갖추어지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화신불(化身佛)
중생을 교화 구제하려고 부처님 자신이 중생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나타난 것을 말한다.

현세에 인간의 모습으로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천백억 화신불이다.

 

삼신불(三身佛)은 세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부처님의 세 가지 관점을 묘사한 것이다.

 형상을 여윈 진리에서의 법신불과 만행공덕의 측면인 보신불과

실제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구현하시고 중생을 구제하신 교화의 관점인 화신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대적광전주련


世尊坐道場(세존좌도량)   세존께서는 도량에 앉아 계시고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청정한 대광명을 놓으시네  
比如千日出(비여천일출)   비교하건대 마치 천개의 해가 뜨는 것 같이
照曜大千界(조요대천계)   온세상을 밝게 비추네
諸法歸本來(제법귀본래)   모든법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常自麻滅相(상자마멸상)   항상 스스로 상을 멸해야하는 것을 ..

 

 

약사전

 


약사전설명문


약사여래불과 일광, 월광보살


약사전은 동방 만월 세계에서 중생 교화를 맡고 계신 약사 여래불을 모신 전각입니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 번민에서 구제하시는 부처님으로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합니다.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에 12대원(大願)을 발원했으며 중생의 병을 제거하며,

모든 감각기관을 완비시켜 해탈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을 각각 좌우 협시(脇侍)로서 약사삼존(藥師三尊)으로 삼으며,

권속에는 호법신(護法身)으로서의 12신장을 모십니다.

 

응진전입니다.

잠시 소개자료를 보겠습니다.
"오백나한상을 모신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장대석 1단의 얇은 기단 위에 화강석 주초를 놓고 전 후면에는 두리기둥을,

측면에는 각진기둥을 세웠는데 후면의 기둥은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바리를 하였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이다.
내부 살미의 형태는 주심포에다 교두점 차단과 양봉이 주간포에는 교두점 차단과 삼분도 요두(要頭)를 각각 얹었다.
가구는 5량가이며 대량과 종량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웠다.

천장은 빗반자를 치고 단청을 하였는데 천장 전체가 빗반자로 된 경우는 드물다.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문비 구성은 전면 각칸에 이분합(二分合)교살문을 달았다.
이러한 형태를 볼 때 관룡사 대웅전의 모양과 흡사한 조선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02년 4월 개분불사를 하는 중에 오백나한 복장에서 조성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이 나왔다.
여기에 보면 조성년도가 옹정7년(擁正七年)이다.
서기로는 1729년이고 우리나라 연호로는 영조5년이다.
불상조각에 참여하신 분은 금산사 스님 4분과 본사스님 3분이다."

불단 그 중앙에 석가삼존불을 봉안했고 좌우에 16나한상을 두어 석가불의 설법광경을 나타냈고 

그 주변으로 오백나한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좌정해 있습니다.

 

 오백아라한은 정확히 526분의 성자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10대 제자, 16성중(聖衆)과 500성중(聖衆)으로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 분들입니다.
부처님께 직접 부탁하기 어려우시면 이분들에게 기대어 보세요.
형처럼 선배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부처님께 잘 말씀드리고 잘도와주실겁니다.


삼층석탑뒤로 보이는 진남루


주련을 모아봤습니다.


遠觀山有色(원관산유색)  먼산은 아스라하고
近聽水無聲(근청수무성)  물소리 들릴듯말듯
春去花유在(춘거화유재)  봄은 가도 꽃은 피고        
人來鳥不驚(인래조불경)  새들도 사람을 두려워하네
頭頭皆顯露(두두개현로)  하나하나 진리를 나툼이요
物物体元平(물물체원평)  모두가 아름답게 어울림이라
如何言不會(여하언불회)  어찌 모른다하리
祗爲太分明(지위태분명)  너무나 분명한것을...


관음전입니다.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과 열 한 개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천(千)은 광대무변(廣大無邊)의 뜻을 나타내고 수없이 많은 중생의 고통소리를 보아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눈이 필요하고,

수많은 중생을 손을 내밀어 구제해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열 한 개의 얼굴을 한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은 아수라도에 있는 것을 구제하는 보살입니다.
맨 위의 불면(佛面)은 불과(佛果)를 표현한 것이고, 전후좌우 십면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10지(地)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중생의 11품류의 무명번뇌를 끊고 불과를 얻은 뜻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이물이 옛 화정수인가요? 명안수인가요 


화정수라면 이물을 마시면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명안수라면 밝은 눈을 가지게 된다는데

모두가 다 필요하니 다마시고도 싶었지만 또 탐낸다고 누군가 나무랄 것 같아 그냥 지나칩니다.
탐내지마라하면서 탐낼거리를 자꾸 만들어 내니 이세상 모든 말이 헛되고 다 헛됩니다.


 

멀리떨어져서 삼천불존을 봅니다.


한장의 사진에 전각을 다 넣으려고요.
삼천불이 모셔져 있으니 건물의 폭이 클수밖에요.
정면 7칸 측면 3칸, 108평이랍니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어디에서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상에서 유래된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 그래서 삼천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명부전입니다.


지장보살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석존이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출현 할 때까지 몸을 6도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입니다.
석장을 짚은 사문의 모습의 형상을 하고 계시며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고 나서 부처가 되겠다는 거대한 서원을 세운 대비대원(大悲大願)보살이십니다.

 

삼성각입니다.

 


나반존자(독성,獨聖),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세분을 한꺼번에 모셔 놓은 전각입니다.
나반존자는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깨달은 성자라고 합니다.

한국불교에서만 통용되는 분입니다.
칠성은 본디 중국에서 유입된 도교신앙의 신으로 한국에 들어와 토착화되었고

처음에는 약사 신앙과 결합되었다가 조선중기 이후 수명신의 본디 모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산신은 주로 호랑이와 같이 있으며 산을 주재하는 신이지요.

불교에 들어와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흡수되었다고 하는데

민속신앙을 흡수하는 차원에서 모시게 되었다는 말이 더 타당할겁니다.

 

삼성각주련입니다.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옛날 영산에서 부처님의 위촉으로
威振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이 강산의 중생제도하기 위해 위엄 떨치었네
萬里白雲靑嶂裡(만리백운청장리)   만리 뻗어있는 흰구름과 푸른산봉우리 뒤에서
雲車鶴駕任閑情(운차학가임한정)   학구름수레 타고 한가로이 지내시네

 

범종각입니다.


북, 종, 운판(雲版),목어(木魚)등 사물(四物)이 있습니다.


북은 걸어 다니는 축생을 위해 두드리고
종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칩니다.
아침 예불시에는 28번, 저녁 예불시에는 33번을 치는데

이 종소리를 들으면 지옥 옥졸들이 지옥 중생을 괴롭히다가 잠깐 쉰다고 하네요.
잠깐 아주 잠깐....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나무의 속을 파서 만들었으며 물 속에 사는 중생들을 위하여 두드리고 

운판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넓은 판인데, 날아다니는 중생들이 이 소리를 듣고 해탈하라고 친다고 합니다.

범종루 주련의 내용입니다.
願此鐘聲遍法界(원차종성변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모든 법계에 두루 퍼지소서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철위지옥의 모든 어두움도 다 밝아지소서
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삼도와 도산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을 바로 깨닫게 하여 주소서


또 한곳의 수각을 둘러보고 유물관으로 갑니다.

 

 

유물관 안내판

 유물관입구 목없는 불상


석제치미


설명을 옮깁니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총 길이 95cm 너비70cm 두께26.5cm 인데 능골, 종대, 날개 부분이 잘 남아 있는데

몸통에는 양각된 꽃무늬가 2점 남아있다.
이 치미는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

기와제품이 아닌 석제품은 이 유물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미는 용골 양끝에 올리는 용두 대신 옛날에 올렸던 것인데

이 크기로 보아 기림사 옛건물 규모가 상당히 웅장한 건물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

 

시왕탱화.

명부시왕은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명계(冥界)를 다스리는 열 분의 왕입니다.
인간의 숨이 끊어져 몸에서 벗어나 다른 몸을 받기 전까지의 기간인 중유(中有) 기간에

쌓인 죄에 따라 명부의 왕들에게 심판을 받는데 이때 등장하는 왕들이 시왕입니다.

 

진광대왕(秦廣大王), 초강대왕(初江大王)

송재대왕(宋宰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 


건칠불입니다.

 

건칠불은 옻칠을 입힌 종이 부처님을 말합니다.
보살상의 머리에는 상투를 올리고 그 위에 따로 만들어진 2단 구조의 보관을 썼는데,

관의 표면에는 아름다운 당초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설명에 의하면
"둥글고 풍만한얼굴에다 눈, 코, 입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보살의 특징있는 얼굴을 만들어 준다.
귀는 짧고 목에는 삼도가 없다.
자세는 왼손을 대좌에 짚고, 바른 다리는 대좌 아래로 내린 반가좌이다.
어깨는 좁지만 가슴은 당당한 편이며 ,천의는 양어깨를 내려와 대좌 아래까지 흐르고 상의자락 역시 다리에서 그냥 아래로 내려온다
보살상의 하대상면(下臺上面)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해 조선 연산군 14년(1501)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건칠불(乾漆佛)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탱화, 부처님 두상, 납석제불상, 막새기와등을 둘러 봅니다.

 

 

 

 

 

 

 

매월당영당입니다.

 

 

 원래 남산 용장골에 사당이 있었으나 훼철되어 고종15년(1878)에 기림사 담장밖에 세웠다가

1996년 절 담장안에 새로 사당을 지으면서 새로운 영정을 다시 봉안하였답니다.

 


기림사, 기원정사의 숲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물은 안마셨어도  차는 한잔 마시고 가야겠지요.

 

다실에 앉아 배계용의 백련차 한 잔이라는 시를 내가 나에게 들려줍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다담상을 둘러앉아
다가올 새해를 이야기하며
차를 마신다.

주인은 냉동실의 문을 열고
연대궁이 비져 나온 봉지 하나 낸다.
은박을 걷어내고
굳어서 튿어지는 연잎을 벗기고
비닐 봉지의 맺힌 매듭을 풀자
나타난 하얗게 언 얼굴
묵은해를 보내는 흰 연꽃 한 송이.

차주전자 두껑을 열고
한 잎, 두 잎
또 한 잎, 또 한 잎 ........
주인의 손끝에서 꽃잎이 낙화처럼
주전자 속으로 내려앉는다.
뜨겁던 지난 한해의 삶으로 끓인
물을 붓는다, 그리고 한참.

얼어서 등이 굽도록 힘겨웠던
한해의 시간들이 투명하게
찻잔으로 쏟아진다.
목구멍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차 한잔
되도록 천천히 삼키고 입맛을 다시자
목젖을 거슬러 활짝 피어나는 꽃잎 하나
백련차 향기는 그렇게 온다.

다가오는 새해도
백련차 연꽃 향기처럼
활짝 피는 꽃잎 타고 오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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