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굴암
경주에서 4번 국도를 이용 감포방향으로 가다보면
기림사가는 길에 골굴암이 있습니다.
이제는 골굴사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여법한 산문까지 갖추어 놓고 여러 채의 요사까지 많이 지어져 있습니다.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위치하여 마애아미타불을 뵙고 마음을 추스리려는 분들이
어렵게 어렵게 찾아 오시던 곳인데
언젠가 부터 선무도 프로그램을 운용하여
지금은,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팀플스테이로 유명한 절이 되었습니다.
몇년전에 비해서
참 많이 변했네요.
이 오른쪽은 길 자체가 없었는데..
선무도 대학, 화랑사관학교라는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너무 생경해서 사진조차 찍지 않고 왼쪽으로 바로 몸을 돌립니다.
그래요.
세상은 돌고 돕니다.
한때 이 골굴사는 함월산 불교 유적지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여
불국사보다도 200년 먼저 세워진 곳이라 합니다.
조선시대 정시한이라는 분의 토함산 산중일기에 의하면
여러 채의 목조와가로 연결된 회랑이 있고 단청을 한 석굴사원의 모습은 한 폭의 병풍처럼 아름답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언젠가부터 쇠락한 암자이었지요.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그 후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온것을
해방전후 박씨성을 쓰는 한가족이 거주하면서 주변을 정리하고 사설사암을 운영하며 태고종에 등록하였습니다.
1989년도에 개인에게 매매된 것을 기림사 주지를 역임한 설적운 스님이 1990년도에 다시 매입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11교구 골굴사로 등록한 1990년 이후부터 다시 융흥하기 시작합니다.
세상도 변하고 모든 것도 변하였지만....
마애아미타부처님은 그 자리에 계십니다.
1977년 내가 처음 이 절집을 찾은 시점에서부터 생각해보면 나는 얼마나 변하였을까요?
갑자기 우울해 집니다....
기념품판매점 옆에 붙어 있는 처음처럼의 글귀 끝부분
"처음처럼
새날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공허한 말입니다.
포대화상과 동이보살을 보면서 마음을 추스리고
부처님계신곳으로 올라갑니다.
경사진 도로를 따라 오르다 잠시 멈춥니다.
노약자는 이곳에서 잠시 쉬랍니다.
예 그리 하지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대적광전이 보입니다.
숨을 고르고 대적광전과
마애아미타부처님 계신곳을 바라봅니다.
대적광전과 마애아미타부처님 계신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입니다.
이 설명문은 대적광전을 만들기 전에 설치한 것 같습니다.
계단을 바로 오르지 않고 오른 쪽 금강약수로 갑니다.
지금의 골굴사는 지하수를 이용합니다.
석회암 지층으로 150M의 지하 암반수는 맑고 청정하며 온천수처럼 매끄럽다합니다.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오직 이곳 한곳,
마애불상을 중심으로 암반의 정중앙 하단에 위치하여 조금씩 스며 나와 고이는 작은 옹달샘인 이 금강약수에서만 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누가 이물을 마실까요?
사람이 오고가는 흔적이 없습니다.
다시 마애아미타부처님을 바라봅니다.
문화재 정보에 나온 글을 잠시 옮겨봅니다.
"[골굴암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304)
골굴암(骨窟庵)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는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서 석굴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사원인 것이다.
이 곳 함월산의 골굴암 석굴에는 수 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骨窟石窟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전실(木造前室)이 묘사되어 있고,
숙종 12년(1686)에 우담 정시한이 쓴 山中日記에 의하면,
이 석굴들의 앞면을 목조기와집으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하여 화려한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 듯 하였으며,
법당전이니 설법굴이니 하는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굴은 법당굴 뿐인데 굴 앞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표정은 알길이 없다.
법당굴 말고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마애불상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셔지고 있다.
지금은 철재 보호각을 설치해 놓긴 했지만 어쩐지 보기에 흉한 꼴이다.
골굴암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함월산의 반대편에 천생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였으니 골굴암은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 같다.
원효대사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크기의 조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三國遺事에 보인다.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골굴암이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칠성단입니다.
18나한이 모셔져 있는 나한굴입니다.
약사굴입니다.
또다시 문화재 정보를 옮깁니다.
"골굴암 마애여래 좌상
골굴암이 있는 함월산의 석회 암벽에 정동남향의 여래조상을 양각하였다.
이곳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의 행적이 이어졌음을 지금도 남아 있는 부윤의 이름과 인명의 낙서 등으로 알 수 있다.
전체높이는 4m로 소발의 머리위에 육계가 큼직하고 상호는 원만하며 미소가
잔잔히 배어 나온다. 또한 백호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어깨부터 얼굴의 뒤쪽 암벽을 많이 깎아 내어 본존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무릎부분부터는 바위면에 음각만하여 자연에 조화롭게 했다.
양어깨를 덮어 물결모양으로 무릎아래까지 덮었고 가슴에는 승기지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흘러 있다.
의문은 음각으로 처리하였는데 약간 투박하다.
손의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른손은 풍화로 떨어져 나가 볼 수 없다.
왼쪽 손은 모지와 인지를 잡고 있다.
대좌는 구름문양위의 연화좌에 좌불 하도록 되어 있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모가 심하여 가운데 일부분만 구름 문양임이 확인 되고 있다.
광배는 암벽을 다듬어 음각으로
하였으며, 머리 주변에는 단판연화문이 조각되고 밖앗으로 유려한 화염문이 거신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의 석질은 모래가 많이 섞인 석회암이어서 비바람에 많이 파손되어 있으며 양어깨와 무릎 쪽이 특히 심하다.
몇 년의 보호 작업 끝에 1988년 비를 맞지 않도록 둥근 돔형의 천정을 만들고 암면에 화학처리를 하였다.
이 여래좌상은 통일신라전성기인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눈을 감고 계십니다.
변해가는 모습과 주변의 번잡함에 아랑곳 하지 않으심의 뜻인지..
눈을 감으면 보이고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다는 관보현보살행법경의 말은
우리가 부처님을 간절히 보고자 할 때 해당되는 것 아니었나요.
아래에 업드려 올려다 보아도
부처님과 눈맞춤할 수 없음이 오늘은 정말 아쉽습니다.
몸을 돌려 관음굴쪽으로 갑니다.
관음굴 지붕위 토굴에 동자승이 잠들어 있는 모습의 사진이 덩그러니 있습니다.
갑자기 오세암이 생각납니다.
그런 류의 슬픈 이야기일까요?
마애불과 관음굴 사이에 위치한 돌문
지나서..
뒤돌아보고..
관음굴
골굴사의 12처 석굴중에서 가장 넓은 굴법당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십니다.
옛날에는 벽면에 마애불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정동향을 향해 열려 있는 굴의 입구는 조선중기의 화가 겸재 정선의 골굴석굴도에 그려진 것처럼 전실로 조성 되어 있습니다.
지장굴입니다.
신중단
산신당. 그리고 여궁
대적광전안에 모셔진 삼존불
원효의 좌상?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놀랍니다.
커다란 음악소리가 나오면서 방송이 이어집니다.
잠시 후 오후 3시부터 이곳 대적광전 앞에서 선무도 공연이 있으니 모이랍니다.
오륜탑있는 곳으로 올라가 돌아봅니다.
대적광전 앞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해의 폭이 적어서 인지 신라화랑들에게 전수된 심신수련법이라는 선무도와 승군의 무예가 무슨 상관관계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설상 그것이 승군의 무예였다 한들 선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체력을 단련하는데 그런 무예가 필요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선무도로 인한 경제적 효과로 이 절집이 중흥되었고,
참선만 하는 승려들은 흔히 신체적인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고, 건강을 해치면 참선도 소용이 없기에
운동은 가장 필요한 종목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소개되고 기사화되는 그 모든 것이 무술에 관한 것 뿐인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평일에도 11시, 3시 하루 두 번이나 시범을 보이고 저녁에는 또 수련을 한다하면
이곳 스님들은 언제 공부하고 정진하나요.
마음을 정리하려 오륜탑을 돕니다.
비석에 써있는 글을 옮깁니다.
오륜탑은 청정법신 여래불을 상징하는 만다라로써 모든 덕과 지혜를 갖추었음을 뜻하여 오지륜이라고 한다.
불교의 수행법인 밀교에서 <지, 수, 화, 풍, 공>의 오단의 형상은 물질계인 4대와 정신계인 공의 조화를 의미하며
중생의 육신과 오대를 대응시켜 자기 몸 안의 오처에 오관을 관하여 육신이 곧 법신임을 체득케 한다.
1500년 전 인도로부터 불법을 전래한 골굴사의 창건주 광유성인을 받들어 이 탑을 조성하며 태국에서 모셔온 불사리 3과를 봉안하였다."
함월산 골굴사주지 설적운.
육신이 법신이니 선무도를 해야 되나 봅니다.
산사의 예불소리가 아닌 무술시연배경음악을 들으면서 걸어내려오다 보니
무었때문에 여기를 왔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마구잡이로 산과 들을 뚫고 가고 있는 포항-울산간 고속국도 공사로 부근 산마루가 깎여져가고 구멍나고 있듯이
내 추억의 한구텅이도 깎여져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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