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달에 문화유산답사회 정기탐사로 다녀온 항파두리..
습관적으로 사진기를 꾹꾹 눌렀지만
다시 볼 생각이 없었는데...
몇년전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강화도 어디의 사진이 있네요.
이걸 왜 찍었지?
습관이겠죠.
두가지 글귀가 마음에 걸려요....
호국정신. 그리고 원정길.
원정길이 아니고 패주길이라는 것은 다 아실거고
그럼 호국정신?
진도사진도 있네요.
배중손의 동상
왕온의 묘
복원한 용장산성
용장산
제주도 사진도 정리할까요?
그 전에 삼별초의 성격을 규명해보려 합니다.
완전히 내 주관대로의 규명이지요.
삼별초
삼별초란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 등 세 개의 별초군을 합쳐 부르는 이름입니다.
고려사에 쓰여 있는 말을 옮기면
"나라 안에 도적이 많으므로 최우가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면서 폭도들을 막게 하고,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뒤에 도적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 막도록 했는데,
그에 따라 야별초 군사가 많아졌으므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한 몽고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신의군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입니다.
도적은 어느나라에도 있고 어느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조직해서 도적을 막아야 할 정도라면 그 나라 그시기는 이미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당시 상황을 기술한 책자에는 초적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즉 도적이 아니고 지배층에 저항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의 저항을 막기위해 조직된 군사가 바로 삼별초의 실체인 것 입니다.
그 것도 정규군이 아니고 최우가 조직한 사병집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규군과는 녹봉체계도 다르고 조직체계도 다르게 운용되면서 그들의 정적을 제거하는데도 이용이 되었지요.
결국 최씨정권자체도 문신 유경이 무너뜨렸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최씨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무신 김준이 삼별초를 조종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듯 삼별초는 국가나 민중의 보호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없었던 조직입니다.
1231년(고종 18) 이런 저런 이유로 몽고가 고려를 침략합니다.
이때 고려인들은 총력을 기울여 맞서 싸웁니다.
전반적인 열세 속에서도 구주(평북 구성), 자주(평남 순천)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충
주에서는 성을 지킴으로써 몽고군이 더 이상 남하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승리는 관군과 삼별초가 이끈 것이 아니라 그들이 초적이라하여 억압하고 핍박하던 이들의 승리였습니다.
몽고군이 당황하여 일단 철수 한 후 고려에서는 항전과 강화의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됩니다.
관료들은 대부분 강화를 주장합니다만 최우의 무리들은 항전을 주장합니다.
왜냐 강화를 하게되면 최우의 무리가 더 이상 정권을 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최우가 다수의 반대를 억누르고 천도를 결행합니다.
몽고의 침략에 맞서 싸운 수많은 고려인들을 사지에 버려둔채로 왕을 볼모로 잡아 자기들만 안전한 곳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 까요?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처지에 놓인 백성들은 각지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힘겹게 벌여야만 하였습니다.
고려는 일반 백성들이 수십 년 동안 몽고와의 싸움을 해 왔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1254년의 경우, 한 해 동안 몽고군에 잡혀간 사람이 무려 206,800여 명이고, 살륙당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왜 셀수가 없냐고요?
그 당시 몽고군 전투수칙이 수레바퀴보다 더 키가 큰 자가 반항하면 그자리에서 살륙하라 이었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항전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몽고에 투항하는 사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1253년 이후 점차 많아집니다.
일반백성이 수없이 죽어넘어 집니다만 고려 조정은 강화도만 안전하면 된다하고 그곳만 삼별초를 이용 철통같이 지킵니다.
더욱이 강화도의 정부는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평상시와 같이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내지 않는 지방에는 삼별초를 보내 강제로 걷어오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1256년에는 정부의 무자비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몽고군이 이르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전쟁중임에도 전라도 일대에서는 백제부흥을 위한 반란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전쟁의 피해가 커지고 백성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강화론이 차츰 힘을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대로 최씨정권이 내분으로 약화되어 강화론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최씨정권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강화론자를 대표하던 문신 유경이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강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때 동원된 군대는 최씨정권 말기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준이 지휘하는 삼별초였습니다.
삼별초는 또 김준을 제거합니다.
이번에는 임연의 조종에 의해서지요.
임연은 강화를 추진하는 임금을 폐위시킵니다.
하지만 몽고가 군대를 보내어 강화를 추진하는 임금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으면 강화도 전역을 피바다를 만들겠다고 하자 원종을 복위시킵니다.
이제는 왕의 군대도 아닙니다.
이미 처음부터 국민의 군대가 아니었고 이제는 왕의 군대도 아닙니다.
원종은 몽고군의 호위를 받으며 몽고에 갑니다.
그곳에서 강화조건을 결정하고 몽고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개경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무인정권과 삼별초에게 개경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이제는 기댈 곳이 없어진 삼별초는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개경으로 돌아간 고려 정부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웁니다.
이것이 삼별초의 난입니다.
그리고 더이상 버티기가 힘든 강화에서 진도로 빠져 나옵니다.
따라오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목을 베는 등 무력과 협박으로 강화도 안의 재물과 곡식, 사람을 휩쓸어 배에 싣고 진도로 향하였는데,
이때 천여 척의 배가 꼬리를 물고 내려 갔다고 합니다.
이제는 군대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에 동원되었던 무장조직이 이제는 그들만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조직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나마 진도에서 까지는 형식적으로나마 왕을 옹립하였으므로 진도정부라고까지는 불러 줄 수 있지만
진도에서 패주하여 제주도에서의 행적은 국민과 국가를 위한 것이 없습니다.
좋게 말해서 웅거하였을 뿐이지요.
그러다 어느정도 정비가 된 후 고려의 남해안을 다니면서 조공선을 약탈하는 등
그렇지 않아도 피폐한 민중의 삶을 더욱 질곡에 빠뜨렸으며
그 이전까지는 그런데로 오손도손 살아가던 제주인들의 삶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몽고 백년지배의 단초를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군대라 하는 무력집단은 국가안보가 그 목적이 아니라면 그 정당성이 없습니다.
민중을 적으로 삼아 탄압하는 무력집단은 국가의 군대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민중의 봉기에 편승하여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다는 것은 더욱 더 용인되어서는 않됩니다.
대몽항쟁은 고려의 일반 백성이 한 것입니다.
국왕과 정부가 백성을 버려두고 강화도로 들어갈 때 몽고군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던 백성들...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처지에 놓인 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
이러한 항전을 바탕으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몽고와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고
이 백성들 덕분에 몽고는 고려에 완화된 복속조건을 제시했던 것 입니다.
현양은 이들 백성들의 저항의 흔적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물론 강화, 진도, 제주 그외 밀양이나 거창등의 옛 흔적은 발굴을 해야겠지요.
미우나 고우나, 슬픈일이던 기쁜일이던 있었던 사실이니까요.
특히 제주에서 삼별초가 쌓았던 성. 그 자체는 고려식으로 계획했겠지만 기술 또는 자재의 문제로 제주식이 가미되었을 것이고
각종 도자기나 집기류등 그것이 약탈이던 생산이던 그 당시의 사용품일테니 귀하게 여겨야 겠지만...
그에 대한 과장과 왜곡은 삼가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몇장의 참고사진과
(2008년도 봄 500미터 상공에서 찍었다는 항파두리성 유적확인지점)
(복원직후의 외성 일부)
(구시물)
(구시물 발굴사진)
(장수물)
(살맞은 돌)
그날의 사진중
서귀포 넘어가기전... 몇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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