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제주의 삼별초 추가

하늘타리. 2010. 11. 16. 22:21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바로 전날. 밤깊어 지리한 이 시간을
자판을 또닥거리며 지내볼까 합니다.

 

길어지면 긴 데로 짧아지면 짧은 데로 읽어주세요.


그래요.
역사가 이긴 자의 기록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이 비정상으로 흘러도 진실은 그 스스로의 목소리로 살아남는다는 것도
역사는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성계가 역성 혁명에 성공한후 500년동안 왕조가 유지되며 성군으로 묘사하였지만 

당시 이성계의 행동 즉, 위화도회군, 조민수와의 권력투쟁, 우왕, 창왕을 시해하고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했다가 삼척부근에서 시해한 것등에 대해 우리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고,
가장 성공적인 쿠테타라할수있는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대통령에 대해서도 역사의 공과를 따지는 것이며,

또다른 쿠테타인 12.12로 집권한 전두환, 노태우 등도 단죄할 수 있는 것일겁니다.

 

특히 고려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주로 참조하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사 열전은
조선 초기 세종대 부터 성종대 까지 꽤나 많은 시간에 걸쳐 편찬된 사서라서 그런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여러 관점에서의 글이 들어 있습니다.

 

일례로 무신정권의 핵심으로 4왕(신종·희종·강종·고종)을 옹립하고 3왕(명종·신종·희종)을 폐위한 최충헌에 대한 것도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전횡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민란을 진압하고, 기강을 확립하고, 풍속을 순화하며, 문운을 진흥하였다."라고 고려사열전에 긍정적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최충헌, 최이(고려사에는 최이, 열전에는 최충이라고 하지만 하여간 같은 사람입니다)의 총애를 받으면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한 이규보에 대해서도

문한을 주관하고 문운의 진흥에 공헌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전반적으로 고려전기는 그런 대로 긍정적으로 묘사한 반면

후반기에 대해서는 권간· 폐행 ·강적 등의 발호와 침략이 군주의 무능과 겹쳐서 제도가 붕괴되었다고 하여

왕과 신료들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기술이 됩니다.(그렇다고들 평가합니다)

 

그리고 특히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사대하는 명이 원을 부수고 탄생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인지 대몽항쟁에 대해서는 정규군인 경군, 승려, 그리고 노비 등 신분에 관계없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삼별초를 어떻게 평가하는 가는 차치하고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여몽전쟁기간을 30년으로 잡습니다.
여몽전쟁은 1231년 몽고의 칩입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1259년 태자가 입조하여 원세조(쿠빌라이칸)을 만난 때를 종료시기로 잡습니다.

 

1258년 절대항전을 주장했던 무신정권의 최고자 최의가 김준이 사주한 삼별초군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게다가 몽고군은 서북 지방을 거쳐 경기, 황해, 충청 지방을 제압할 뿐만 아니라 동북 지방으로 남진하여

1259년에는 인제 방면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피해는 극심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낀 끝에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군에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몽고군은 강화도 건너편 경기 지방에 공격을 집중하여 이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강화도를 고립시켰습니다.
몽고군이 의도한 데로 된 것이지요
몽고군의 2차 공격시 작전계획이 “고려의 國都는 海島에 介在하여 貢賦가 모두 主郡에서 나오니 主郡을 엄습하면 郡人이 반드시 궁색하여 항복할 것이다”였습니다.
고려는 드디어 1259년 3월 태자의 직접 조공을 조건으로 한 휴전에 합의하게 됩니다.

 

1259년 4월 약속대로 태자 전이 몽고로 출발합니다. 몽고까지 가는데 한 세달 걸린 것 같습니다.


6월, 고려에서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몽고와의 전쟁으로 보낸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7월에는 몽고 황제 헌종도 병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자 전은 개봉으로 가서 원세조 쿠빌라이 칸을 만납니다.

 

원세조가 입조한 고려세자를 만난 자리에서 크게 기뻐하며 한마디 합니다.

"고려는 만리밖의 나라로서 그 옛날 당태종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음에도 끝내 이를 굴복시키지 못하지 않았던가?
이제 바로 그 나라의 태자가 나를 만나러 왔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뜻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러시아나 중국도 휩쓸어 버린 원의 황제
수십개국이 항복을 하러 와서 땅에 엎드려도 쳐다도 보지 않던 세조가
입조한 고려태자를 맞으며 한 말입니다.
30년간의 긴세월동안 초강대국 몽고가 작은 나라 고려때문에 얼마나 속상해 했는가를 알려주는 말이지요.

하여간 이로써 양국 간의 전쟁은 종식되었습니다.

 

삼별초의 항쟁이니 난이니 하는 것은 11년 세월 뒤에 나옵니다.
이 기간동안....

삼별초는 개경으로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좌고우면하고 있는 김준을 임연의 조종에 의해 죽입니다.
강화도이외에 사는 백성들은 몽고의 관리의 통치를 받고 초근목피로 생을 이어가는데 그런 것에는 아랑곳 없이

나간다 못나간다 실갱이끝에 자기들 멋대로 임금을 폐위했다가 몽고의 협박에 다시 복위시킵니다.
그러다 임연도 죽고 그 아들 임유무를 어사중승 홍규의 조정을 받은 삼별초가 또 제거합니다.
결국 무신정권의 졸개 삼별초가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겁니다.


어떤 유혹과 회유를 받았었는지 모르지만 막상 우두머리들을 죽이고 나니 삼별초는 더 이상 비를 막아줄 우산이 없어집니다.

 

왕이 몽고군의 도움으로 개경으로 관리를 이끌고 나갑니다.
그리고 삼별초의 혁파를 명하지요.

 

이때 지배층 내부의 정쟁에서 패배한..아니 정쟁에서 패배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판단으로 자기주군을 세 번이나 죽이고(최의, 김준. 임유무)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국가보위가 아니고 정권보위에 동원되었던 삼별초 잔존세력(삼별초지유 배중손과 야별초지유 노영희)이

눈앞에 닥친 응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 1270년의 삼별초의 난입니다.

 

개도 자기에게 밥을 주는 주인에게는 덤비지 않습니다.
식탐대마왕 퍼그종인 저희 집 개도 길을 걷다가 먹을 것을 발견하여 입에 물었어도 않돼! 그러면 뱉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다른 어떤 때 다른 어떤 먹을 것을 줄 것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이야기로 저는 개고기를 안 먹습니다.
아주 어려서 기억인데....
그 당시는 먹을 것도 마땅하지 않은 시기라다 보니까 자기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먹는 게 흉이 아닐 때 입니다.
어느 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개천가에서 개고기를 먹으려 준비를 합니다.
개는 몽둥이로 때려잡아야 살이 쫄깃쫄깃하고 맛있어 진다며

어른 몇 명이 개패듯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게 개를 두드려 잡았습니다.
개가 축 늘어지자 죽었는가? 확인하려고 주인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축 늘어져 있던 개가 주인의 손이 다가오니까 죽을힘을 다해 그 손 쪽으로 머리를 돌려 손등을 핥습니다.


그 뒤의 일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때 그 장면이 너무나 크게 나를 잡아당겼기 때문이겠지요.

 

자기에게 밥을 주고 자기를 지켜주던 주인을 세 번이나 잡아먹은 승냥이들을 맡아줄 주인은 없습니다.
자기살길을 스스로 모색해야 합니다.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왕의 16촌쯤 되는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자기들끼리 좌우승선을 제수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목을 베어버리고 강화에 있던 관료의 처자들을 몽땅 인질로 붙잡고 모든 재물을 털고 모든 배를 끌어 모아 바라바리 실고 진도로 떠납니다.

 

1270년 8월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이 싸움에서 이긴 기록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등장합니다.
1270년 11월 김방경이 이끌고 온 여몽 연합군이 몇 척 되지도 않는 적은 배로 공격해오자 끌고 내려갔던 큰 배들을 이용, 진도 앞바다 울둘목에서 반격을 해서 이겼습니다.
이에 고무된 주변 고을에서 삼별초와 힘을 모아 몽고군을 물리치려 합니다.
여기서 이들은 과대망상에 빠집니다.
자기들만이 정통조정이라 하면서 주변마을에 군량미를 댈 것을 요구하고 그것에 불응하면 약탈을 합니다.
그러다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1271년 5월 삼별초군의 대다수가 주변지역으로 노략질 나가있을 때 진도에 상륙한 개경정부군과 몽고군에게 결국 대패를 당합니다.
승화후 온도 죽고 그 아들도 죽고 배중손도 죽고 뿔뿔이 흩어져 김통정등은 제주도로 가고 유존혁은 밀양 쪽으로 도망가다 김통정등이 제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로 합류합니다.
결국 삼별초가 주둔해 있던 진도와 삼별초와 호응했던 마을들은 쑥대밭이 됩니다.

 

제주에서는 ......않쓰렵니다.
삼별초의 제주상륙 그 자체가 또 다른 외세의 침입이었고
항파두성을 쌓을 때 먹을 것조차 제공하지 않으며 혹사시켜 인분을 먹어야만 했고...
원주민의 저항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탐라현을 공격하여 관리를 살륙한 기록이 있어도....
어쩔 수 없었겠지 하는 분들도 있고...
제주분들이 더 잘알테니.......

 

찬찬히 살펴보면....
여몽전쟁기간에 자랑스러운 항쟁기록이 많습니다.

 

08년도에 본 국사교과서 기억에 의하면....

고려 대몽항전 수행과정에서의 농민· 천민들의 역할에 주목하여

1231년 충주민의 항전, 1232년 처인성 부곡민의 항전 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삼별초의 투쟁은 고려의 대몽항전을 계승한 것이라고 애매하게 기술합니다.


백번을 양보해서 삼별초의 투쟁이 고려의 대몽항전을 계승한 것이라고 쳐도...

그렇다면 계승한 누구누구를 현양하기에 앞서 그 원전을 현양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연히 충주민의 항전과 처인성 부곡민의 항전을 현양해야 되지요.

 

그렇지만 현양하기에는 좀 찜찜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1231년 충주민의 항전
이게 완전히 기막힌 것입니다.
몽고의 1차 침입시의 일입니다.
광주산성을 공격해 초토화시킨 몽고군이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을 포위했습니다.
이 당시에 충주성에는 관군이 없이 별초군이 조직되어 있습니다.
(삼별초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지방마다 별초군이 있었습니다.
양민으로 구성된 별초와 관의 노비들로 구성된 노군별초, 잡역종사자로 구성된 잡류별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몽고군이 몰려온다고 하자 당시 충주부사 우종주와 군지휘관격인 유흥익 사이에 싸우자, 항복하자, 도망가자 등 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몽고가 공격을 개시하자 두 지휘관과 간부들 그리고 양민별초들은 전부 도망가 버리고 성내에는 노군과 잡류뿐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비와 잡류들이 자기들 스스로 지휘관을 뽑아 항전을 하여 세계 최고 몽고군을 몇 달간 붙잡아 두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도망가고 병졸끼리 남아서 이긴 전투라 역사의 앞에 세우긴 좀 그런가요?

 

1232년 처인성 부곡민의 항전입니다.
1232년 몽골의 장수 살리타(撒禮塔)가 정예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해 들어옵니다.
당시 살리타는 세게 최강대국 몽골군의 총사령관입니다.
파죽지세로 고려를 침공해 내려오던 살리타는 용인군 아곡리에 위치한 처인성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을 당합니다.
용인성을 함락시키고 주민을 모두 도륙한 그는 제대로 된 군사조차 남아있지 않은 처인성을 공격하다가  매복한 처인성 부곡민들의 기습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몽고군은 장수를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철수하고 맙니다.


처인성 안으로 피신한 부곡민들을 모아 매복 전투를 계획하고 적장 살리타를 사살한 인물은 김윤후입니다.

 

이 김윤후는 역사에 또 한번 등장합니다.


1253년, 몽골은 황족인 에쿠(也窟)가 직접 지휘하는 최정예병을 고려에 투입합니다.
이 때 길안내를 맡은 이는 반역자 홍부원과 이현입니다.
(홍부원은 그 유명한 홍다구의 아버지인가 할아버지입니다만 홍부원과 이현은 고려사 반역자전에 그 행적이 쓰여 있습니다.

고려사에는 몽고와 강화를 하기 전에 몽고와 협력한 이들은 모두 반역자전에 있습니다)
몽고군은 고려 정벌을 끝내겠다는 각오로 한 층 더 잔인하게 경산(京山), 동주(東州), 춘성(春城) 등의 성에 있던 고려인을 살륙하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까지 밀어 닥쳤습니다.

당시 충주에는 살리타를 사살한 처인성 승첩의 주인공,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있었습니다.

끝까지 항전하는 김윤후와 몽골군의 싸움은 70여일을 넘깁니다.
그 사이 성 안의 양식이 떨어지고 투항을 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비규환 속에서 김윤후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리고 소와 말을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김윤후의 결단에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쟁합니다. 결국 몽골군은 충주에서 퇴각하고야 맙니다.


당시 충주민들의 치열한 항전상은 이듬해 고려정부가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키고

산천신기(山天神祇)에 제사하는 기고문(祈告文)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 전년(고종 40년)에 적이 대거 침입하여 동족 번병(藩屛)의 수성(數城)이 며칠사이 모두 도단되메 적은 승승장구 예봉을 풀어 곧 군사를 거느리고 중원(忠州)으로 옮겨 빗발같은 시석(矢石)과 우뢰(雨雷)같은 전고(戰鼓)로 여러달 공격하니 남은 외로운 성이 거의 위태하였나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성이 함락되었다면 그 밖의 여러 성보(城堡)는 가볍게 석권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이도 월악대왕(月岳大王)께서 큰 위력을 나타내어 가만히 도와주시므로 이에 능히 수어(守御)하여 만세의 공을 이루었나이다. "

 

그리고 김윤후에 대해서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김윤후(신종~원종대)는 1232년(고종 19) 몽고가 침입하여 처인성(용인)을 공격할 때 적장 살리타이를 쏘아 죽여 몽고군을 본국으로 퇴각하게 하였다. 뒤에 다시 충주산성방호별감으로서 동성을 포위 공격하는 몽고군을 격퇴하고 감문위상장군에 승진하였으며, 이후 추밀원부사를 역임하고 수사공상서우복야로 치사했다."

 

그러다가 잊혀집니다.


원래 그는 백현원(白峴院)에 있던 승려입니다. 그는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승첩이후 산사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정부로부터 섭랑장(攝郞將)을 제수 받아 무반으로서 관도에 올랐습니다. 때문에 숭유억불기조의 조선에서 그를 흠향한다는 게 말이 않되었나 봅니다.

 

김윤후는 300년 뒤 의병운동의 상징으로 다시 부활합니다.
1592년,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 국토를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관군이 대패하고 관료들이 명나라 망명을 준비하던 때, 임진왜란 의병 운동의 선구자인 '조헌'은 의병 모집 격문에 한 선례를 들어 거국적인 민중 봉기를 이끌어냅니다.

김윤후는 화살 하나로 돼지를 맞혀 죽여 황성에서 몽병을 물리쳤으니 ......
金允侯一箭豕?退蒙兵於黃城              (조헌의 중봉집)

여기서 돼지로 묘사된 사람은 몽고군의 총사령관 살리타입니다.

 

격문을 하나 올렸으니 이번엔 찬문을 하나 올릴까요.


"오호라 외로운 성. 약한 군사로 천하의 사납고 강성한 오랑캐를 맞아 동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여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크다 할 수 있다."
서거정이 찬탄한 귀주성에서의 관군이야기입니다.
1231년 개전초 신의주일대를 초토화 시킨 몽고군이 몰려듭니다.
이곳은 고려 조정 정규군의 병마사 박서가 김경손, 정주, 김중온 등의 분도장군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40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이 이어집니다.
다섯 번의 총공세에도 귀주성을 함락하지 못한 몽고군은 귀주북쪽 본진으로 철수 합니다.
주력부대는 이미 황해도 동선령까지 남진하여 고려의 정규군인 경군과 치고 받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후방에 불안을 느낀 몽고군은 다시 청천강이북으로 철수 합니다.


이런 확실한 사례들을 현양해야 하는데

왜? 삼별초일까요?

 

처음 삼별초가 알려진 것이 1930년대의 일이었답니다.
당시는 그래도 반일의지가 강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비록 삼별초가 강화로 진도로 제주도로 돌았지만 끝까지 대몽항쟁을 하였다는 것이
당시 임시정부가 해외로 떠돌고 있는 상황과 맞아 떨어져서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상징조작으로 딱 맞아 떨어 졌을 겁니다.

 

그렇다 치고 갑자기 해방이후 남북한에서 삼별초를 왜 들고 나왔을 까요?

 

여기서 부터는 제 오버입니다....만...


내 학문을 알아주고 발전할 수 있는 데로 가겠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북행길에 올라 북한 사회과학원장에 까지 오른  김석형은

고려 대몽항쟁사의 전개를 3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 지배계급과의 협력에 의한 인민항전,

제2단계 인민들만에 의한 침략군에 대한 항전,

제3단계 인민들의 반외세 반봉건정권 투쟁으로서 구분하면서, 삼별초항전을 제3단계의 투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 후 김재홍은 이를 더욱 구체화시켜서 삼별초항전을 '인민들의 애국적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반외세 반봉건정부 투쟁으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북한에서 대몽항쟁사 서술의 기본관점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무슨소리냐며는
몽골에 복속한 개경정부는 더 이상 고려의 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고려정부와 상대해 싸운 삼별초야말로 위대한 영웅이라는 겁니다.
즉 그 당시 그들이 말하는 미국의 꼭두각시인 한국정부는 한국인의 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정부 및 정부군과 싸우는 빨치산이야 말로 인민들의 애국적 투쟁이고 반외세, 반봉건투쟁이라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중반에 민족 자주성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삼별초 위령탑을 건립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1978년 6둴 9일 제주에 와서 그 자신이 직접 썼다는 항몽순의비를 제막합니다.
고려의 무인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어떤 상징을 조작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누군가가 잘못 알려준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된 엉뚱한 역사조작일 뿐입니다.
이영권의 제주역사기행에 삼별초 군사들의 자주적인 기개가 박정희에 의해 농락당했다고 쓰여 있습니다만

이것도 사실과는 너무 다른 과분한 것입니다.

누구누구가 잘못 알고있는 덕에 승냥이들이 용감한 호랑이의 무리로 과대포장된 것입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이 참 우습다고 느껴집니다.

 

삼별초 사적지정은 누구의 지시이었던 간에
역사학의 태두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거든요.

그 결정내용을 밑에 올립니다.

 

"문화재 위원회 회의록
제 1 분과 제 7 차 회의 회의록
일 시 : 1972. 8. 9. 14 : 00
장 소 : 문화재관리국 회의실
참석위원 : 이선근, 조명기, 김원룡, 황수영, 정인국, 김유선, 추순우

명칭 : 항파두고성
소재지 :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
심의내용 : 위인선열조사위원회 심의대로 내성전체와 외성 100여 미터 및 성축망대를 사적
으로 지정한다.
지정사유 : 1270년 고려가 개경환도를 단행함에 항몽투쟁으로 궐기한 삼별초의 최후와 항
쟁지로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의 항파두고성의 내성과 외성을 지정하여 외침에 항
거한 자주적 정신과 구국적 의의를 길이 계승코자 사적으로 지정한다."

 

위의 기재된 분들의 신발 끈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식으로
이분들이 결정해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다니
정말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문득 제 중학교 때가 생각납니다.


저희 학교 문을 들어가면 아주 인자하신 분이 두팔을 벌려 등교하는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인촌 김성수의 동상입니다.
인터넷에 인물검색을 해보시면 아래와 같이 나올 겁니다.
"1891(고종 28)∼1955 정치가, 교육자, 언론인. 호는 인촌.
13세 때 사설영어학숙에 다니며 송진우, 백관우 등과 교유,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 1915년 귀국 후 교육에 뜻을 두고 중앙중학교를 인수, 교장에 취임했다. 1919년에는 경성방직을 창설하고 경제자립과 민족자본 육성에 힘쓰는 한편 1920년에는 민족정기의 수호를 위하여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제 2대 사장에 취임, 1931년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자 5천원의 위문금을 중국 영사관에 보내기도 하였다.
1932년 현재의 고려대학인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해방이 되자 미군정청 수석고문관을 지내고, 1950년 제 2대부통령에 취임했다.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민주국민당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 민주정치의 발전을 위해 힘쓰다가 병사하여 장례는 국민장으로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금의 낙원상가부근에서 버스에서 내려서 계동골목 맨 끝자락에 있던 학교로 가려면 골목 초입(지금의 현대건설 본사사옥자리)에 있는 휘문중학교 아이들과 함께 걷게 됩니다.
중앙아이들이 휘문아이들에게 야 너희들은 매관매직으로 임금에게 금송아지 상납한 민영휘가 부정 축재한 돈으로 세운 학교라며 하고 놀리고는 하였지요.


그 나이에 뭘 알았겠습니까?


학교선생들과 선배들이 우리는 민족선각자가 만든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다른 학교아이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세뇌를 시켰겠지요.

 

졸업 후에도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1989년인가요?


신문에서 충격스러운 사진을 보았습니다.
학내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고려대생들이 친일파 김성수를 기릴 수 없다며 본관 앞에 있는 인촌 김성수 동상에 검은 천을 씌우고 밧줄을 매달아 철거를 시도하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밑으로 당시 이철승 고려대교우회 고문 등 200여명의 백발이 성성한 교우회 선배들이 육탄으로 막으면서 재학생에게 민족지도자 김성수를 친일파로 모는 건 빨갱이 짓이다. 라고 나무랐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충격이었지요!


그때도 사실로 믿지 않았고 지금도 사실로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그렇더라고요……


"인촌은 39년 서울시의 라디오 강연에 출연하여 일제의 전시동원을 호소하였으며, 38년 6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 및 이사로 참여하고, 연맹 산하 비상시 생활개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39년 7월에는 황국신민화를 도모하기 위해 일본 내에 조직되었던 협화회의 재경성유지간담회에 참석, 발언하고 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43년 이 단체의 총무이사로 활동하였으며 41년 8월 일제의 전쟁동원에 협력하는 흥압국단의 결성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0월 임전보국단 감사로 활동 하였다. 43년 8월부터 학병제,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하였다."는 것이 전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자본육성을 위해 경성방직을 운영하였다는 인촌의 동생 김연수가 중추원참의로 4년 넘게 활동했고 만주국 명예총영사 등 일제의 주요 관직에 임명돼 활동했으며, 군부와 일제 관변단체에 어마어마한 액수를 수회에 걸쳐 헌납했다고 합니다.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고....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런들 저런들 어떻겠습니까만.....
알고자 하는 이는 이런 저런 견해 속에서 자기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게 어느 일방의 의견을 따라 가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싶어서...

쓰다보니…..

엄청 긴 글이 되었고
아직도 미진하네요.

필력이 부족해 중언부언한 것 같습니다.

 

스크롤의 압박과 둔필이 눈을 피곤케 하는 것을 견디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혹시 계시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