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4.3과 길 - 제 1편 남원읍 의귀리.

하늘타리. 2010. 11. 9. 08:03


며칠전 중앙정부 행안부장관이 이곳 제주를 방문했습니다.
도지사와 여러가지 대화를 했겠지요.
그리고 도지사는 중앙정부에 여러분야, 여러가지 요청을 합니다.
절차상 하게 되어 있는 거니까요.


여러 이야기 중 하나 4.3에 대해 도지사가 말하길

이명박 정부 출범한 이후 4.3중앙위원회가 한번도 개최되지 않는 등

4.3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져서 도민정서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면서

4.3의 아픔을 치유해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국가추념일로 지정될 수 있도록 적극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지요.

 

요청을 들은 장관.

립서비스로라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노력하겠다 등등의 대답을 할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원론적인 말로 대답을 마칩니다.
제주4.3은 도민 모두가 피해자였고 희생자였다며 상처가 쉽게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의와 진정성을 가지고 4.3의 해결을 위해 접근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국가추념일 지정은 다른 지역의 유사 사건들이 있어 형평성의 차원이 있기 때문에...검토해야 한다면서 말을 아낍니다.


그럼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요...

 

 

4.3연구소에서 4.3과 길을 열었습니다.

그 첫번째 날인 11월 7일. 의귀와 수망지역을 걸었습니다.
의귀·수망지역은 무장대와 군부대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4.3희생자 집단 묘역인 ‘현의합장묘’와 ‘숭령이골’, 토벌대 주둔지인 ‘민악주둔소터’가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의귀리입니다.

 
역사기록에는 고려 충렬왕 이후부터 마을이 등장하지만

2003년 5월에 이일대에서 삼양동식 적갈색 토지편과 석재편 등 신석기유적이 발견된데서 알수있듯 유서깊은 마을이고
조신시대에는 말의 고장이라 불릴만큼 말사육이 번창했고

감귤의 주산지이며,

1925년까지는 남원면의 전신 서중면 면치소의 소재지였을 정도로 일대의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해방후 혼란의 와중에서도, 4.3발발 초기에도 평온한 마을이었습니다.


선거를 거부하고 산으로 올라간 청년 몇이 있었고

 좌익단체활동을 하던 김아무개의 부친이 경찰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기도 했지만 

5.10선거도 도내 몇몇지역과 달리 큰 충돌없이 치루어 졌습니다. 

그런데.. 

무장대의 서귀포 습격 며칠후인 1948년 11월 7일.
평온한 의귀리에 무장대가 들이닥칩니다,
느닷없는 방화와 학살로 주민들을 내몹니다.
이런 토벌대의 행동은 4.3기간중 의귀리에서 맨처음 나타난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요?


하여간 이유도 모르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해변으로, 산으로, 숲속의 궤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고
미쳐 피난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토벌대와 무장대에 쫒겨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의귀초등학교입니다.


1948년 12월 군부대가 주둔합니다.
학교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하고

주위에는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어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합니다.
무장대의 세력이 굉장하다는 사전지식을 가지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들은 매일같이 주변 수색에 나섰고
이과정에서 주변에 궤나 숲에서 은신하고 있던 사람들이 꽤 많이 붙잡혀 와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에 귀순한 사람들과 같이 학교창고에 수용되었습니다.


1949년 1월 12일 무장대가 군부대를 습격합니다.
교전결과 군인 4명이 사망하였으며 무장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사상자를 버려둔채 다시 산으로 도주합니다.
바로 그 날  학교창고에 있던 사람들 모두 끌려나와 총살을 당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학교 교정 한곁의 나무.
너무 무서워서 두몸뚱이를 꼭 껴안고 자랍니다.


학교를 나와 교전지옛터로 가는길..

 어느집 돌담안에 천사의 나팔이 피어있습니다.


꽃이 땅으로 향해 피어있지요.
줄기와 꽃 모양 그리고 잎사귀마저 똑같고 다만 꽃이 하늘로 향하는 꽃이 있습니다.

더 아름답겠지요?

흰독말풀입니다.


큼직하고 탐스러운 겉모습과는 달리 독성이 아주 강한 꽃입니다.
이 천사의나팔꽃과 흰독말풀은 같은 형제입니다.
모두 세상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아름다움속에 감추고 있습니다.

 

갑자기 계시록에 나오는 천사의 나팔이 생각나네요.
억눌린 자들의 통곡과 절규, 

억압자들의 악행에 대한 기억과 항의로서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천사의 일곱 나팔.

그중 마지막 세나팔이 불어진다 합니다.


첫번째 화를 부르는 다섯번째 나팔에 의해 악을 행하는 자가 괴롭혀지고
두번째 화를 부르는 여섯번째 나팔에 의해 악을 행하는 자의 1/3이 죽고
세번째 화를 부르는 일곱번째 나팔에 의해 악을 행하는 자 모두를 멸망하여 심판한다 하셨는데.......


지금 어느단계의 나팔이 불어지려하나요?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와 심판을 알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짐승의 세력에 속하지 말고 그 기만의 세력에서 나오라는 계시를 들으세요.


하지만 이계시를 들을자들의 귀와 마음이 닫혀 있으니 다 부질없는 일이지요.


이 돌담뒤가 무장대와 군의 교전지점이랍니다.


무장대의 군부대 습격시 군인의 총에 맞아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널부러져 1년간 있었답니다.
1950년도 의귀리가 재건되면서 이곳의 시신들은 마을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숭령이골로 옮기어 졌습니다.


이 올레길을 따라가다 막힌 자리.

 

지금의 감귤밭이 있는 곳이 현의합장묘역에 계신 희생자들이 학살된 곳입니다.


1949년 1월 10일과 1월 12일 이자리에서 수십명의 주민이 총살을 당합니다.
1월 10일에 죽임을 당한 사람은 토벌대의 주변 수색중 잡혀와 수용되어 있던 젊은이들이고
1월 12일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창고에 수용되어있다 그날 새벽의 무장대 습격직후 끌려나온 사람들입니다.

이곳에 흙만 씌워진채 방치되어 있던 시신중 일부는

1950년 마을재건중 유족들이 훔치듯 찾아갔고

남아있던 시신들은 구 현의합장묘역에 집단매장되었습니다.

 

현의합장묘가 있던 곳입니다.

 

 


의귀국민학교 동녘밭에서 총살당한후 남겨져 있던 시신들이 3개의 봉분에 집단매장되었던 곳입니다.
이곳에 매장된 시신이 얼마인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곳에 가족이 매장되었다고 생각하는 유족들이 모여 3개 무덤에 묻힌 자들의 후손들은 같은 친척이라는 뜻으로 '삼묘동친회'를 조직,

음력 4월 8일과 7월 7일에 차례를 지내고 벌초를 해오다가 83년에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고 영혼들의 의로움을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습니다.

 

옛 비석의 내용입니다.
'아! 여기에 의로운 영혼들이 고의 잠드시도다.

36년간에 걸친 일제통치의 질곡에서 해방된 조국산천,

그러나 사상대립과 좌우 충돌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

1948년 4월 3일 4.3 사건은 본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처참한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조상전래의 내고장을 지키다 산화하신 아 가륵한 그대 이름들이여...

이제 후손들이  이 비를 세우고 유덕 기리며 명복을 비옵니다.

고이 잠드소서.

1983년 합장묘 후손 일동'


2003년 9월 유해발굴 및 추도식을 하고 수망리지경 새로운 묘역으로 안장했습니다.
지금은 세곳의 봉분이 있었던 자리에 돌멩이 몇 개를 놓아 흔적을 표시하였고

옛 비석은 새묘역으로 옮기었고 현의합장영령유허비를 세웠습니다.

 


당시 현의합장묘 유해발굴은 

물증보존의 중요성과 4·3의 비극성을 결정적으로 증거할 유골을

최소한의 과학적 조치없이 소멸해 버린 점에서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제주4·3관련 첫 본격적인 발굴의 의미가 있음은 물론
버려져 집단으로 매장된 부모의 시신을 잘 수습해서 이장한 것인데....
도와준것도 없는 사람들이 왜 딴소리를 하나 모르겠습니다.

 .

새로조성한 현의합장묘로 갑니다.

 

현의합장묘로 가는 길 중. 왼쪽으로 몸을 틀기 직전 돌담이 쌓여진 곳 위에 비닐하우스들이 있습니다.


저 곳 또한 군부대 주둔후 첫번째 주변 수색에서 붙잡힌 사람 중 의심스럽다 생각한 젊은이 몇명을 총살했다고도 하는 곳입니다.


가는길에 선데기소와 김만일묘가 있습니다.

 

선데기소.
혼자 잡목을 헤치고 들어왔습니다.

 

 의귀천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세곳의 소 중 한곳입니다.
이 세곳의 소는 발견하여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지었죠
현씨 성을 따면 ‘선데기소’, 박씨는 ‘박데기소’, 오씨면 ‘오개물’ 등등으로요.
하지만 지금은 전혀 관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김만일묘

 

 

 


전설에 의하면 제주에는 6대 음택(묘자리)과 6대 양택(집터 및 마을자리)이 명당 가운데 으뜸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6대 음택은 제1 사라(한라산 사라오름), 제2 의항(蟻項, 한라산 개미오름), 제3 영실(靈室),

제4 해두명(亥頭明, 한라산 서북쪽), 제5 반디기왓(반득전·蟠得田, 남원읍 수망리 민오름 서남쪽),

제6 반화왓(蟠花田. 또는 서독만·西犢萬, 한림읍 누운오름 서쪽)을 일컫고요.....
6대 양택은 제1 구아낭(狗兒囊, 제주시 연동 도청 남쪽), 제2 여호내(남원읍 신흥2리 ),

제3 사반(蛇盤, 안덕면 창천리), 제4 한다니(漢橋, 한림읍 신흥리), 제5 옷귀(衣貴, 남원읍 의귀리),

제6 어도(於道, 애월읍 봉성리)를 말합니다.
6대 음택 가운데 제5 반디기왓과 6대 양택에서 제5 옷귀의 전설은

경주김씨 입도조 김검용(金儉龍)의 7세손인 김만일(金萬鎰·1550∼1632) 집안과 직결됩니다..
김만일의 조부가 선친을 잃고 장사를 지내기 전이었을 때...

마침 중국에서 제주의 명혈들을 끊으러 온 호종단(또는 고종달)을 만나 선친 묘자리와 집터를 구하게 된다는 게 전설의 대강인데

어떻게 제주의 좋은 맥은 다 끊고 물자리까지 막아놓은 호종단이 이곳 김씨가문에만 좋은 일을 했는지 궁금합니다만

그럴 일이 있겠지요.


조상의 음덕덕분인지

후손 김만일은 뛰어난 목축능력으로 말을 1만 필까지 기르며

임진왜란 등 국가가 위급할 때 모두 1000필이 넘는 말을 보내 국난극복에 기여했다고 합니다.
그 자손 또한 대대로 감목관의 지위를 누립니다.

그외의 이야기는 안내판을 통해 알아보시지요.

 

 

현의합장묘역입니다.


현의합장묘 4.3유족회는 2003년 9월 예전에 있던 집단매장지의 봉분을 파묘해 유해발굴을 했습니다.
이 날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서쪽 봉분 17구, 가운데 봉분 8구, 동쪽 봉분 14구 등

총 39구(남자 15구, 여자 7구, 청소년 추정 2구 포함한 성별 미상 17구)의 유해가 50여점의 유물과 함께 확인되넜다 합니다.


통곡과 오열속에 발굴된 유골들을 봉분별로 화장하여, 지세 좋고 양지바른 이 곳,

수망리·신산모루 지경에 새 묘역을 마련해 고운 잔디 입혀 2003년 9월 20일 안장하였습니다.

 

  

 주변이 잘 관리되고 있어 유족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집니다.

 

위령비 

 

 뒷면 비문 중 일부를 옮깁니다.

 

...허공 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간다는데

무시로 도지는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정한 세월이여.

살암시난 살아져라. 위안 삼아 버틴 세월이여!

앙상한 어욱밭 방엣불 질러 죽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워 없애진 못하는 법 아닙니까.

봄이면 희망처럼 삐죽이 새순 돋지 않던가요...

 

옛 비석과 내력비

 

  

 

 

전시관 내부.

  

 

 

 

 

 

 

 

 


현의합장묘를 나와 의귀리 공동목장 입구를 통과하여

민악주둔소터라고도 하는 영군모루주둔소터로 갑니다.

 

누리장나무

 

용담

 

공동목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북쪽에 샘물이 있습니다.


이마처럼 튀어나왔다고 하여 이맹이물 또는 물나는 이맹이라 한다는데
사진을 잘못찍었는지 물통의 물이 않보입니다.

 

 수량이 원채 적어서 목감만이 이용했다 하네요.

 

 

민오름이 점점 더 다가옵니다.

 

 

나무 오미자

 

거린오름.

 

 

잠시 쉬었다 가지요.

 

 


다시 주변을 둘레둘레 살피며 길을 갑니다.

 

 

 

 

물영아리입니다.

 

마을공동목장내 봉천수

 

 

그 주변에서 운동중인 소떼

 

 

물영아리를 한번더 보고

 

고개를 돌리니 영군모루입니다.

산불조심 깃발이 있는 이부근이 1948년 12월 부터 1949년 1월까지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했던 군부대가

전방초소로 활용하였던 곳이랍니다.

 

그 후에도 경찰주둔소로 오래동안 사용되었다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주둔소옛터에서 주변을 돌아봅니다.

 

 

 

 여기 이자리에서 그 당시 주변을 보고 있었을 병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 병사또한 제정신은 아니었을 겁니다.
나름의 두려움으로 넋이 나가 있었을 겁니다.

 

저 멀리 넉시오름이 보입니다.

용담이 이렇게 몸을 곶추 세운건 보기가 힘든데... 


영군모루에서 내려오다 들른 영궤입니다.

 


민오름 둘레길 끝부분 냇가에 위치한 이 영궤는 4.3당시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합니다만

영군모루 주둔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데다가

그 당시 주변에 나무도 별로 없었을 텐데 입구가 탁트인 이곳에서 오래 있지는 못했을 겁니다.

 

나무와 그 뿌리의 형상이 묘합니다.

 

영군모루를 뒤돌아 보고

 
한참을 걸려서 숭령이골로 왔습니다.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절부터 올리고 가라는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지난 2004년 5월14일,

지리산 실상사 주지였던 제주 출신 도법스님을 단장으로 한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이 곳에서 천도제를 올리고 벌초를 한 후 조그만 방사탑을 쌓으며 세운 안내판의 글이지요.

  


이곳은 의귀국민학교를 습격할 당시 사망한  무장대의 주검들이

전투장소이자 사망장소인 의귀국민학교옆 우영밭에서 1년이상 방치되어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져 집단매장된 곳입니다.


당시 구덩이 2개를 파고는 버리다시피 매장한 상태 그대로입니다만 

4·3연구소, 놀이패 한라산, 통일청년회 회원들과 현의합장묘 양봉천 회장 등에 의해 매해 벌초가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답사를 마치고 일상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한동안 또 잊고 생활할 겁니다만...

 

자꾸 생각납니다.
아까 현의합장묘역전시관에서 본 영상물에서 양봉천 회장이 묘역을 이장할때 울먹이며 하던말...

만행을 저지른 이들이 그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더라도 ....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렵니다....

 

기도합니다.
이 땅의 아픈 역사가 치유되고, 상처받은 이들이 위로받게 해달라고.....

 

Tchaikovsky
Symphony No. 6 in B minor, Op. 74 "Pathetique
2. Allegro Con Grazia
Berliner Philharmoniker
Herbert von Karajan, c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