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과 7월 24일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알뜨르, 역사의 올레라는 주제로
‘알뜨르비행장에서 역사의 길을 묻다’ 답사를 다녀온 사진입니다.
답사 때 사진과 그 언젠가 찍었던 사진을 3편으로 나누어 정리합니다..
1편 일본군 군사시설입니다.
...
웃드르 : 마을 윗쪽 산간지방
알드르 또는 알뜨르 : 마을 아래 넒은 들
제주어의 일반적인 표현입니다만...
최근 알뜨르는 특정한 어느 지역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알뜨르가 속해 있는 상모리와 하모리는 모살개 마을이라는 갯것이 마을이 알모살개와 웃모살개로 나뉘고,
중모살개가 생겼다 알모살개와 합쳐지고,
웃모살개는 들메기 마을까지 포함하여 발전된 전형적인 어농복합마을입니다.
이 명칭들을 한자로 쓴 것이 상모슬포와 하모슬포입니다.
행정구역명이 상모슬리와 하모슬리이었다가 한 글자씩 버리고 상모리와 하모리가 됩니다.
마을이 커지면서 일제강점기중반인 1933년 인성리에 있던 대정면치소가 상모리로 옮겨옵니다.
아마도 1930년에 일본군 오오무라부대가 주둔하고
해군항공기지가 건설되는 등의 이유가 많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때부터 이 모슬포일대에 고난과 역경이 시작되지요.
1920년대 후반부터 군용비행장으로 알맞은 곳을 탐색하던 일본군 수뇌부는
상모리와 하모리의 아랫들 즉 알뜨르에 해군항공기지를 건설하려 계획을 합니다.
일군의 부대가 모슬포에 주둔하면서 알뜨르에 항공기지공사가 시작됩니다.
먼저 모슬포에 항공기지공사를 통제 감독하고
기지일대에 대한 경비와 지원을 하기위해 오오무라대좌가 이끄는 부대가 주둔합니다.
천막막사에 기거하면서 일대의 주민을 동원하여 건설한 오오무라부대막사 중 남아있는 한곳입니다.
이 부대가 들어서면서 부터 모슬포일대는 각종 지원부대와 시설로 가득 찬 군사요새지가 됩니다.
수 많던 병사 중 한 건물이 남아 힘겨워 하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내부의 모습.
옛 탄약고.
오오무라부대의 탄약고로 처음 지은 것입니다.
해방 후 육군제1훈련소 본부대의 탄약고로도 쓰였고
한 때는 대정농협 고구마저장고로 사용되었습니다.
옛 통신대 탄약고.
인근에 통신대 건물이 있었고 그 통신대에서 사용하던 탄약고라 합니다.
좌우 입구에 마을에서 쓰는 상여를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내부는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지붕위에 통신기기를 설치했던 콘크리트 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 주둔 당시에는 통신시설로 쓰이다
해방 후 한국군 통신대가 동북방에 위치하면서 그 부대의 탄약고로 쓰이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해군항공기지, 통상 말하는 알뜨르비행장으로 갑니다.
비행장 가는 길
비행장으로 가는 길 좌측 앞부분에 지하벙커와 관제탑의 잔재가 보입니다.
지하벙커로 갑니다.
콘크리트 구조체를 만들고 돌무더기를 쌓아 동산처럼 만들고 나무 등을 심어 위장하였습니다.
들어가 보지요.
그 옆 또 다른 구조물은 완전히 폐허화 되어 있습니다.
비행장의 핵심인 관제탑으로 쓰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시설의 잔해입니다.
누구는 이것은 급수대였고 그 옆에 무너진것이 관제탑이라고도 합니다만...
일제강점 초기에 일본군은 제주도에 소부대급 만을 주둔시키고 군사적으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만
1930년에 이곳에 20만평 규모의 해군 비행장을 건설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이곳 제주에 대한 군사적 인식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1937년 8월 일본군은 중국의 광둥·장저우 등을 대대적으로 폭격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전폭기들은 나가사끼현의 항공기지에서 출격했지만, 폭격을 마치고 귀환할 때는 이곳 알뜨르 비행장으로 돌아왔지요.
그 후, 일본군이 난징·상하이 등을 폭격해서 함락시키는 와중에는, 이 비행장이 폭격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0만평 규모로 시작된 비행장은 1945년 8월에 일제가 패망할 당시 80만평으로 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송악산쪽에서 찍은 비행장일대를 조감한 사진을 먼저 보시지요.
1938년 이곳에 있던 해군항공대가 중국 상하이 인근으로 옮겨가자
알뜨르 비행장은 잠자리비행기라고 불리는 아카톰보 비행기의 연습비행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활주로입니다.
기본적으로 활주로는 콘크리트로 만듭니다만
이곳은 긴 활주로의 특성을 이용 잔디활주로를 사용했습니다.
물론 항시 제초를 말끔히 하여 최상의 조건을 제공했을 것입니다만
비가 온 직후에는 미끌림을 방지하기 위해 psp판을 깔기도 했다 합니다.
격납고 시설입니다.
격납고는 비행기를 보관하거나 수리하는 용도로 당시 20개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19개가 제 모습을 유지한 채 원형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격납고는 폭 20m, 높이 4m, 깊이 10.5m 두께 1m정도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
공중 포격에 대비해서 지었던 만큼 아주 단단하게 지어서 해방후 주민들이 경지를 개간하기 위해 부시려해도 부셔지질 않아
일부는 농산물 창고로 이용되고 있고
이 중 10개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습니다.
활주로옆 방공호입니다.
비행장주변에는 이외에도 여러가지 시설물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만
방치속에 훼손되고 무너져 갑니다.
필요없다면 철거하고 주변정리를 하던가
보존의 필요성이 있으면 보존책을 강구해야 할 겁니다.
지금 남아있는 것들도 보존을 하려고 해서 보존된게 아니고
부스려했으나 부셔지지 않았거나
상당히 오랜기간 군사제한구역으로 묶여있어서 손을 못대었을 뿐입니다.
인근 오름 고지위에 비행장을 방어하기위해 설치한 고사포진지입니다.
안내판에는 셋알오름 고사포진지라 쓰여 있습니다.
설명에 의하면 1945년 무렵에 구축한 시설로 5기의 고사포진지 중 4기는 완성되고 1기는 미완성된 상태라 합니다.
안내판에 있는 당시의 고사포모습입니다.
고사포진지가 있는 오름 아래의 갱도진지입니다.
1~2톤정도의 트럭은 통행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갱도진지입니다.
꽤 긴 거리로 구축되어 있고 다섯 개 정도의 출입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만
최근에 정비를 할 때 붕괴를 방지할 목적인지 내부에 빔을 세워 차량통행은 힘들겠고 출구도 2개만 서로 연결시켜놓았습니다.
이 갱도진지는 비행장과 그 부속시설과는 구축연도와 그 용도가 사뭇 다릅니다.
비행장을 만들 때의 일본군 수뇌부는 욱일승천의 기세였을 겁니다만
이 갱도를 구축할 당시에는 죽음을 앞둔 사뭇 숙연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1941년에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다음 한때는 승승장구했습니다만
1944년에 이르러서는 패색이 짙어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잠수함과 공습기가 일본 본토 가까이 접근하면서 일본군을 위협했고,
1944년 7월에는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사이판이 미군에 함락되었습니다.
결국 최후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일본군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 가능한 경로를 크게 두 방향으로 예측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이판과 괌을 기지로 일본 동남부 간토평야로 상륙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필리핀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제주도를 점령한 후 규슈에 상륙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략적 판단을 근간으로 하여 세부적인 방어작전을 수립하는 데 이것이 7개로 나뉘는 결전작전입니다.
1945년 2월 일본의 방위총사령관은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최후의 결전작전계획을 수립합니다.
작전개시시점을 1945년 6월경으로 하여 총 7호로 구분하였지요.
그 중 '결1호 작전'은 홋카이도(北海道), 지시마(天道) 방면을, '결2호 작전'은 토후쿠(東北) 일본방면을,
'결3호 작전'은 간토(關東) 방면을, '결4호 작전'은 토카이(東海) 방면을,
'결5호 작전'은 츄부(中部) 일본 방면을, '결6호 작전'은 규슈(九州) 방면을,
'결7호 작전'은 제주도 방면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1945년 2월 ㅂ터 3월 25일 까지의 치열한 유황도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패배합니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 지고 있다는 거지요.
결국 각각의 결호 작전이 해당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방면군에게 시달되면서
한반도를 관할하던 일본군 제17방면군에게도 결7호 작전 준비요강이 하달되었습니다.
시달된 요강에 따라 결7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에 주둔하던 거의 모든 일본군이 제주도로 집결합니다.
1945년 1월에 1000여 명에 불과했던 제주도의 일본군 병력이 4월이 되자 3만600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제주도로 들어왔던 일본군 부대는 제58군입니다.
제58군에 예속된 주력부대는 제96사단과 제111사단 등 3개 사단이었고,
사령부를 포함해, 예하 전신부대·공병대·병참병원·비행장경비대 등 14개 부대였습니다.
제주도로 집결한 일본군은 도내 전역에 배치되어 요새구축과 전투준비에 들어갑니다.
제주도 주민들도 비행장 건설, 군용도로 건설 등에 전부 동원되었지요.
이시기에 제주도 오름과 해안 100개소에 각종 진지를 포함한 요새들이 구축되었습니다.
현재 발견된 진지동굴이 제주 전역에 700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곳 셋알오름 갱도진지도 그 중 하나이지요.
1차 병력집결에도 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일본 군부는 관동군 예하부대였던 제121사단을 제주에 추가로 배치했습니다.
제121사단은 병력 1만4700명 규모로, 기관포와 로켓포 등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였습니다.
그 와중에 6월 25일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자 조선 본토에 남아 있던 일본군 부대들을 추가로 제주도로 불러들입니다.
종전 시까지 일본군 7만5천여 병력이 제주도에 배치되었습니다.
마주보이는 송악산을 직선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는 서북사면에 일렬횡대형으로 파여 있는 많은 동굴진지가 있습니다.
제가 센 것은 여덟 개인데 아마 더 있을 수 도 있습니다.
송악산 정상부를 지나
동쪽 절벽을 조심조심 내려갑니다.
저승물있는 바로위 송악산 외륜 동굴진지입니다.
안내문에는 22개의 입구가 있고 길이가 1km가 넘는다 합니다.
송악산 북쪽 해변에는 또 다른 성격의 동굴진지가 있습니다.
미군함정을 공격하기 위한 폭탄을 실은 소형보트를 숨기기 위해 만든 시설입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동굴로 구축된 두개의 전투지원시설입니다.
송악산 북쪽의 해안가 입니다.
지금은 대장금촬영지로 유명해진 곳.
이곳 해안에도 15개의 동굴진지가 남아 있습니다.
15개소가 있다하여 일오동굴이라 하지만 처음 만들 때는 20개소 정도 이었다 합니다.
입구가 매몰되어 없어진 것이지요.
입구의 높이, 폭은 3∼4m 이고 길이는 20여m이며 상호 연결 된 동굴도 있습니다.
일본군이 미군 함정을 격침시키려고 자살 특공용 소형선박을 숨겨놓기 위해 판 굴입니다.
바다의 가미가제는 카이텐과 진요우 두종류가 있습니다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이러한 자살특공용 소형선박기지는 이곳을 비롯해 서모봉, 수월봉, 일출봉, 황우지해안 총 5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금멀리 단산으로 갑니다.
모슬포는 벋어나지만 그곳까지는 대정읍 지역이니까요.
단산에 있는 7곳의 동굴진지중 한곳입니다.
방향을 반대로 틀어 알뜨르비행장에서 모슬포를 연결하는 옛길을 따라 갑니다.
옛길 옆에 보이는 신사참배 동산과 그 앞 도롱곶 방공호
대부대가 주둔하려면 충분한 물이 제공되어야지요.
양수시설로 갑니다.
모슬포 주변에 주둔한 일본군은 식수가 부족하자
당시 서부지역 최대의 용출수지역인 일과2리, 속칭 서림골에 군용양수장을 건설하고 굽수원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급수원 보호를 위해 1~2개 분대규모를 경비부대로 운용하였습니다.
해방 후 미군이 관리하다 현재 공군이 관리하고 있으며 인근에 대형정수장이 있습니다.
광복군에게는 천추의 한이라지만
제주도민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전쟁은 최후결전이 없이 조기종결되었습니다.
원폭투하라는 일본군이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전이 되었습니다만 일본군은 계속 제주도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해방 후 몇달이 지나서 제주도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무장해제에 들어갑니다.
일본군의 무기 일체는 회수하여 인근 바다에 투기하였고
각종장비와 탄약은 알뜨르 비행장에 집결시켜 차례차례 폭파합니다.
마지막으로 탄약을 섯알오름 탄약고에 쌓아놓고 폭파할 때는
비행장으로 진입하는 콘크리트도로가 다 균열되고
모슬포 중심가 적산가옥들이 다 흔들릴 정도의 큰 폭발로
커다란 구덩이가 두 곳 파집니다.
이제 슬픔은 끝난 듯 했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동족에 의해 계속됩니다...
Gustav Mahler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or : Bruno Wa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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