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길. 세 번째... 북촌가는 길.
작가 현기영이 고향 노형동에서의 기억과 북촌학살사건을 조합해 써내려간 소설 순이삼촌.
잊혀지기를 강요당해왔던 4.3의 비극적 역사를 사회적으로 인식시키고
제주에 그런 불행한 역사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예, 지금은 북촌에 계시는 순이삼춘을 만나러 갑니다.
김경훈의 시. 순이삼촌을 찾아서입니다.
무수한 생명을 키울 그 생명의 대지에
수레멸망악심꽃 흩뿌려졌네.
잡초처럼 무성한 떼죽음이 있었네.
살은 썩어 흙이 되고
피는 흘러 물이 되고
열두신뻬 마디마디 흩어졌네.
살아, 이승에서
죽은 자들의 목숨을 대신 연명하였네.
그건 죽음의 연속이었네
삶의 기적이 아니었네.
이제 나 죽어, 나누려네.
살 오를 꽃
뻬 오를 꽃
피 오를 꽃 나누려네.
그 생명을 살릴 생명의 땅에서
좋은 신체 좋은 얼굴 되살리려네.
뼈를 맞추고 살을 붙여 피가 돌게 하여
죽은 자들의 생명의 시간을 되돌리려네.
4.3연구소에서 준 답사자료 손에 들고...
민중가수 최상돈의 안내로 4.3의 흔적과 그 흔적이 놓여진 역사와 생활속을 걷습니다.
'뼈를 맞추고 살을 붙여 피가 돌게 하여 죽은 자들의 생명의 시간을 되돌리려' 그 길을 걷습니다.
최상돈 씨의 안내라 그런지
자료에 실린 위의 시를 쓰신 김경훈씨가 길 중간에 언뜻 보이더군요.
신촌 초등학교에서 출발합니다.
매계 이한우 유적비.
제주의 절경 가운데 10곳을 골라 瀛洲十景이라 이름붙이고
詩를 읊은 신촌이 낳은 문호이십니다.
孤松
雪裏秀孤松回着象芳質
凜然君子容笑?不知冬
외로운 소나무
눈 속 굳굳히 한 소나무
늠름하여 군자의 용모러라
뭇 꽃들 향기론 자태 돌아보나니
겨울도 모르는 그들 우습기만 하네.
조규창이 살던 곳으로 추정되는 옛집으로 왔습니다.
안내판은 번듯한데 폐가가 다 되어 있네요.
주변에 친척들이 산다하는데 관리는 않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가옥을 보러온게 아니고..
소위 말하는 48년 2월의 신촌회의가 있던 곳 아닐까 해서 찾아왔답니다.
당시 무장투쟁에 대해서
제주도당 지도부내에서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히 맞섰다 합니다.
이 신촌회의에서 정세판단과 대응책에 관한 열띤 토론이 벌어 졌고
결국 명분론과 위기설을 앞세운 김달삼등의 강경파가 조직을 장악하게 되었다지요.
김달삼이 스스로 군사총책을 맡겠다고 하여
사건 발발 10일전에 날짜를 결정 통보하여 4월 3일 무장봉기가 결정되었답니다.
조규창씨 댁을 나와 스러져 가는 집옆 올래를 걸어 신촌 포구로 나옵니다.
마을의 상징 큰물성창입니다.
신촌은 큰물주변 곳곳에서 용천수가 나옵니다.
큰물을 중심으로 동카름, 서카름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연자물, 빌레못, 당머루, 농낭굴, 상두거리, 백주가름 몰물 등
정겨운 마을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주민의 숙원사업이라고 하는 큰물주변 2차 주거환경개선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덕구의 생가 터.
예전에는 그래도 한 담장 안에 두 동의 살림집이 남아있었는데...
모두 허물고 건물을 새로 짓고 길을 새로 내고 있습니다.
그 옆 돈물
바닷물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맑은 물만 펑펑 솟아나오는 단물이라 하여
돈물이라 불리우며 귀한 대접을 받던 곳인데 아마도 도로개설로 매몰될 듯 합니다.
신촌리 동동네 일뤠낭 거리 일뤠당입니다.
일뤠낭거리 일뤳도, 고동지영감, 정동지영감 이렇게 세분이
어선과 해녀를 관장하고 계시던 곳인데
마을이 커지면서 제단앞 제장을 줄여서 굉장히 비좁게 계십니다.
바닥에 있는 사각형이 제단이고 그 뒤에 것은 석궤입니다.
석궤속에 미륵이라 할 신석이 있습니다.
석궤옆에 명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누군가는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통뮬로 가는 길...통행불가...
멜 말리는 모습
우영..신촌초등학교 생태텃밭이라는데 우영치고는 엄청 큽니다.
대섬으로 갑니다.
철새들의 안식처 역할을 하는 철새도래지 습지라 합니다만
오·폐수 유입과 각종 쓰레기 등으로 생명력을 잃고 있는 곳이지요.
작년 연말에 어느 부동산에서
"대섬 일대 유원지가 해제되었습니다.
그 동안 건축 행위가 불가능 했었는데 이제 부터는 개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주변 일대에 부동산 구입하세요.
펜션이나 민박을 지어 운영하면 대박 납니다."라고 온 동네 광고하던데
여름에는 인근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못할 정도로 악취가 난다하여
아무도 투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예전보다 철새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면서
예전에는 조개도 잡을 만큼 깨끗했던 곳이 이제는 가까이 가기도 싫은 곳이 됐다"고 하고
"초겨울이라서 악취가 덜 한 것"이라며
"여름이면 악취를 비롯해 파리, 모기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재작년에는 갈대도 많이 자랐는데 이제는 거의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오늘은 물도 맑고 갈대도 제법 자라있습니다.
갈대숲을 지나면
누구는 일제강점기말이라 하고
누구는 60년대에 조성했다고 하는 조그만 방조제가 있습니다.
염전을 했을까요? 양어장을 했을 까요?
그 앞에 원담.
거욱대옆 설명문을 보고 주변풍광을 즐기시지요.
그런데 제주시 동부지역 해안, 그러니까 하도까지는 원담이라 않하고 갯담이라 불렀는데
여기는 원담(적담)이라고 쓰여 있네요.
그래도 경치가 좋으니까 패쓰!!
아닐 수도 있는데 산을 썼던 곳에 이장 후 채소밭을 가꾼 것 같습니다..
조천 수룩물
엉물
새물
제주자리물
올레라 하기에는 너무 짧지만 인상 깊은 골목길
회화나무
육지 양반들이 최고의 길상목으로 손꼽은 나무 입니다.
육지에서는 최근 가로수 정원수로 많이 심는데 제주에서는 보기가 힘든 나무지요.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잡귀가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 가문이 번창하고 큰 인물이 난다고 하여
예전에는 권세가 없으면 심지 못하도록 한 나무 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재판관이 송사를 들을 때 반드시 회화나무를 들고 재판에 임했다고 합니다.
회화나무에 진실을 가려주는 힘이 있다고 믿은 거지요.
이 자리 회화나무도 어느 날 입을 열어 진실을 말해주리라 믿습니다.
도 지정 민속자료로 지정된 조천 황씨 종손가옥입니다.
이 가옥은 안거리, 밖거리, 목거리, 대문채, 부속채 등 6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14인 중 김용찬 의 생가터
조천오일장터
조천지서.
지서옆 밭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되었던 학생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조천지서와 모슬포지서, 그리고 서청경찰대에서 각 1명씩
3월 6일, 14일 그리고 3월 말에 발생합니다.
이 중 조천지서에서는 조천중학원 2학년학생이 유치된 지 이틀 만에 숨졌고
검시결과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밝혀지자
고문경찰 5명 모두 구속되어 3~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지만
이미 제주사회의 민심은 동요되었습니다.
무장대는 4월 3일 새벽 2시경 도내 24개 지서가운데
삼양, 함덕, 세화, 신엄, 앵월, 외도, 조천, 한림, 화북, 남원, 대정, 성산지서 등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습니다.
조천지서는 약 한달 전인 3월 6일 고문치사 사건으로
경찰 대부분이 교체된 상태였는데
4월 3일 무장대의 공격을 받았을 때 사전에 발견하여 공포탄을 발사하므로
무장대가 퇴각하여 한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무장대의 재습격시 1명의 무장대원이 사망하고
2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당했다 합니다.
조천 중학원터.
제주 다른 지역의 중학원과 마찬가지로
지역주민들과 출향인사의 출연으로 1946년 3월에 개교했습니다.
이덕구도 이 학교 사회, 체육을 담당했었고
선생들이 대부분 일본등지에서 공부하던 사람이었는데
좌익단체에 알게 모르게 관련되어 있었다. 합니다.
47년 3.1절 시위이후 좌파적 분위기에 휩쓸린 학생들이
대부분 민애청의 조직원이 되었고
이 때문에 입산하는 사례가 속출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48년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4월 19일 신촌리투표소가 피습되어 불에 타고
5월 3일 조천리 선거관리위원들이 일괄사퇴하고
북촌리는 선거당일 투표소가 불에 타서 모든 투표용지가 파손되는 등
조천면 14개 모든 투표소가 제 기능을 못했습니다.
결국 선거를 거부한 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천면장이 연행되어 가기도 했고
투표당일에는 투표방해혐의로 심문을 받던 중 주민이 탈출하다 경비대에 의해 죽고 맙니다.
결국 5.10선거후 교사와 학생 대부분이 피신하였고
조천중학원은 폐쇄됩니다.
조천야학당.
항일운동가 김시용 선생 등이 1925년 6월에 설립한 조천야학당은
마을의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등을 가르치면서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고,
일제에 항거하는 의식을 심어주었던 노동야학이 있던 곳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야학당이 있었던 옛 조천 성당터 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지상 2층 연면적 350㎡ 규모로 신축하였습니다.
아쉬운 것은
인근에 김시숙이 개설한 여성야학소가 있었답니다.
화북교 교사였던 김문준이 교재를 가져다주고
광주고보학생이었던 김시황과 김시성, 숙명여고보학생이었던 김칠순등이
방학이면 내려와 가르치는 여성 야학소가 있어서
불구의 몸으로 귀향한 김명식이 자주방문하고
고순흠이 일본에서 올 때마다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다는 데
그곳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조천관입니다.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하신 분 중 황진식의 생가터
비석거리입니다
교통수단을 해로(海路)에만 의존할 당시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포구가
이곳 조천입니다.
제주 목사나 판관 등 지방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부임 또는 이임하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치적과 석별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비석을 건립하였는데
현재 7기의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혹시 개별비석의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예전 블로깅한 것을 참고하세요.
조천리 향사가 있던 곳
예전에 이곳에서 만나 향사터임을 말해주시던 어르신이
일제강점기 통용되던 일본어 속담이라며 들려준 말이 떠오릅니다.
아다마노 조텡, 구치노 가이게츠, 우데노 다이세이, 하라노 주붕, 긴따마노 간린,오메코노 규샤
(頭朝天, 口涯月, 腕大靜, 腹中文, 男根翰林, 玉門舊左)라는 얘기가 있듯이
조천 사람들의 총명함이 제주 제일이다라고 하셨지요..
이런 저런 해석이 있지만 조천사람은 머리가 좋고 애월사람은 언변이 뛰어나고,
대정사람은 완력이 좋고, 중문사람은 뱃심이 좋다는 평가 아닐까요?
집단수용소 옛터
1948년 11월 하순 이후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면서 주민들이 피난 옵니다.
하지만 청년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야산 동굴진지 등에 은신합니다.
그러한 은신 등의 이유로 빠진 사람이 있는 가족은
도피자가족으로 함덕, 조천리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조천리 수용소는 당시 정미소로 쓰였던 건물인데 수용인원은 200명이 넘었다 하고.
이중 90여명이 1월 13일과 2월 1일에 30명, 60명씩 조천지서 옆 밭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합니다.
양진사
약천사의 오늘을 있게 한 회주 혜인스님이 70년대 양진사 선원에서
선원장으로 제방 납자들을 가르치셨던 곳입니다.
이 부근이 옛 관음사 터라고 하기도 하고
이 반대편이라기도 하고
여기가 아니고 고관사가 있는 곳이 옛 관음사터라기도 합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8, 제주목 불우조에는 在朝天館浦라 하여
관음사가 조천관 포구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원진의 耽羅志에서도 在朝天浦上이라 하여 조천포 위에 관음사가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후 1954년 淡水契의 증보탐라지에는 朝天面朝天浦上에在하니 今廢라고 하여
폐사 상태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앞 왼쪽비석이 마을 우물개발에 공이 많으셨던 김숙사의 공덕비
그 옆 사진가운데부분이 흘물(펄물)
오른쪽 끝으로 보이는 옛 해녀탈의실
연북정입니다.
조선시대의 정자로 제주도유형문화재 제 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연북정은 客舍로, 원래 朝天城 밖에 있었다고 하나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1590년(선조 23)에 李沃 절제사가 성을 동북쪽을 물려 쌓고
그 위에 옮겨 세워 '쌍벽정(雙碧亭)이라 하였다합니다.
雙碧은 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1599년(선조 32)에는 成允文목사가 그 건물을 중수하고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하였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인데,
보수 당시 "룡가경이십오년경진 이월십오일 진시입주상량 호(龍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辰時入柱上樑 虎)"라 한 銘文이 발견되어
1820년(순조 20)에 마지막으로 보수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정자가 경찰관주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합니다.
조천진성벽옆 금당지터
옛 중국 진시황때 서불이 진시황에게
삼신산에서 나는 불로초를 캐어 복용하면 영생할 수 있다고 말 합니다.
진시황이 즉시 그 약초를 구해올 것을 명하였겠지요.
서불은 곤륜산의 천년 묵은 고목을 베어 배를 건조하고
동남동녀 오백명을 거느려 출발하였다네요.
황해를 거쳐 제주에 다다른 서불은 이곳 포구에 배를 대고 한라산에 올라
신선의 열매라는 시로미를 채취하였다 합니다.
불로초를 채취한 그는 진시황에게 돌아가지 않고 서귀포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네요.
이곳을 떠나기전 당시 금당이 있어 금당포라고 하는 포구 암석위에 조천이라 새겼다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 이곳 포구이름을 조천이라 한다합니다.
조천이라는 지명에 대한 다른 글도 있습니다.
郭期壽의 쌍벽정 중창기에 따르면 朝天館은 바다 어귀에 있는데,
육지에 나가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는 곳이다.
朝天이라 이름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족은 돈지와 큰물
1950년의 어느 날 족은 돈지 앞에 밀물 따라 들어왔다가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고래가 있었답니다.
마을 사람이 합심하여 잡아 나눠먹었다지요.
그리고 고래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어
배를 타면서 기름에 쩔었던 옷을 이곳 물통에서 마음껏,
깨끗이 빨았다 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저렇게 옛 모습을 바꾸어 놓아서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삼첩구봉의 삼양동 원당봉을 봅니다.
연딧동산으로 갑니다.
연대가 있어 연딧동산이라 불리우지요.
조천진에 소속된 연대입니다.
1975년에 복원되었으며 연대에서 동쪽으로는 신흥리 해안,
서쪽으로는 원당봉 해안까지 바라다 볼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서쪽으로 별도연대(직선거리 6.7㎞),
동쪽으로 왜포연대(직선거리 1.8㎞)와 교신하였다고 합니다.
저 멀리 항일기념관 추념탑이 보입니다.
조천읍 충혼묘지입니다.
제주도내 각 마을의 충혼묘지는
1953년 4월말 대정충혼묘지를 시작으로 하여 5월초 안덕…
그 다음 어디 또 어디 이렇게 53년도와 54년도에 건립됩니다.
1962년부터 충혼 또는 충혼비라고 쓴 비석을 세우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양중해선생의 진혼가가 새겨진 충혼탑을 세웁니다.
각 마을 충혼묘지는 주로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병사를 모셨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4.3당시 사망자 특히 경찰과 민보단 인사들의 비석을
한 곁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이곳 충혼묘지 충혼비석옆에
1948년 11월 9연대와의 교대기간 중 무장대의 공격으로 사망한
2연대병사 24명을 추도하며 1949년 7월에 세운 비석이 있습니다.
어디엔가 세워져 있다가 이곳 충혼묘지가 세워진 후 이전되어 왔을 겁니다.
그 것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 사건이후로 제주도를 떠나기 직전인 9연대와
새로 들어온 2연대의
무자비한 보복살륙이 이루어집니다.
왼쪽이 한국전쟁발발이후 사망한 군경의 묘역이고
오른쪽에는 4.3기간 중 사망한 경찰과 민보단원의 비석이 모여있습니다.
충혼묘지를 나와 오른쪽에 망사석이 한기 서있습니다.
뒷면 글자가 흐릿한데 혹시 무자년이나 기축년은 아니겠지요..
신흥리복지회관입니다.
김정길회관이라 명명되어 있고
김순자여사의 공덕비가 커다랗게 세워져 있습니다.
신흥리는
조천과 함덕사이 물가를 따라 길게 뻗어 있습니다.
땅이 좁고 물가에 포구가 있어 잇개 즉 왜포라 하였고
옛개라고도 불리워져 고포라고도 합니다.
조선조 이래 잇개사람들은 조천과의 분동을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쓸 필요가 없을 것이고
마을유지들이 1910년 이래 재판소를 다녀오길 48번 끝에
1914년 1월 22일 분향되어 신흥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신흥리 어른들은 독립이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그 기념비가 맨 왼쪽에 있습니다.
마을발전에 도움주신분들에 대한 송덕비와 기념비
그중 아사 김재만 기념비
捐出巨額 큰 금액을 출연하시니
人所不能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苦民方新 고생하던 주민과 마을이 새로워지고
殘村乃興 쇠락한 마을이 비로소 흥하게 되었다.
惠及一鄕 온 마을이 그 혜택을 입으니
籍頌厥德 칭송함을 기록하고 덕을 새겨
美事令名 좋은 일, 훌륭한 명성
萬歲不息 오랫동안 남아있으리라.
이분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이 많은데
마을 발전을 위해 거액을 쾌척하셨고 그것으로 인해 쇠잔한 마을이 부흥하게 되었답니다.
만에 하나 그 돈 중 일부로 민보단에서 무장대에 습격에 대비해 총을 샀다고 하더라도
이분을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흥분교장에서 점심을 먹으며 최상돈의 노래를 듣습니다.
4,3때 선무공작대로 다니셨다는 분의 노래도 듣고요.
함덕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
길가 돌담사이로 조그마한 틈이나 있고 계단이 있습니다.
삼수당이라고도 하는 함덕리본향 알카름 서물당입니다.
알카름 본향당이라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예전에는 꽤 큰당이었다. 합니다.
미륵돌을 묻고 그 위에 제단을 설치했습니다.
이곳에 계시다는 신의 이름만 적으려도 한참 걸릴 겁니다.
알카름 서물한집, 죽도남빌레 일뤠한집, 뒷당동산 일뤠한집, 알질우의 요드레한집, 금서황하늘, 함덕역개열싀거리삼천뱅매 등
여섯 분이 계신데
너무 좁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함덕 앞갯물
자나온 당이름에서 아시겠지만 이 갯가에 물통이 세곳 있었답니다.
앞갯물, 섯갯물 또는 서물, 샛갯물 또는 중물이라고 불렀다는데
그 중 앞갯물입니다.
서우봉. 오름 표지석에는 서모봉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바다에서 물소가 뭍으로 올라오는 모습이라
물소 서자를 써서 서우봉이라 했다는 말이 있고
무슨 소리냐 제주에 물소가 어디 있냐?
이 봉우리는 북촌지경인데 북촌에서 보면
서쪽 방향에 있다하여 서모봉이다라고도 합니다.
또 누구는 남쪽에 있는 주봉의 이름이 서모봉인데
이것을 망동산(서산망)과 합쳐 부를때는 서우봉이라 한다고 합니다.
어떤 모양으로 보이세요?
함덕 연합청년회앞 공터
함덕출신 애국선열 기념비
주로 적광 한영섭 기념비사건으로 고생하신 분들입니다.
의사 한백흥, 송정옥 기념비
1948년 12월 마을을 수색하던 함덕주둔 토벌대에 의해
마을주변에 숨어있던 6명의 청년이 붙잡힙니다.
토벌대가 이들을 즉결처분하겠다. 합니다.
이때 마을이장이었던 분과 마을유지분이 나서서
신원을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들도 내통자라며 함께 학살하였답니다.
그 두 분을 기려 세운 기념비입니다.
함덕지서가 있었던 곳
함덕국민학교 옛터
토벌대 1개 대대 규모가 주둔했던 곳입니다.
토벌대 수색작전도중 붙잡힌 조천, 구좌등지의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수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일주도로변으로 정문이 있었으며,
교사 본관은 남쪽을 향해 있었다 합니다.
본관에서 혐의자 수용과 취조 등 대부분의 업무가 이뤄졌다하고
본관 뒤편이 수용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합니다.
대대본부에 끌려간 주민들은 엄청난 고문을 받고
해수욕장 인근의 골연못, 관됫모살, 진동산 등의 모래판과
서우봉 생이봉오지, 몬주기알, 상장머체 등에서 죽어갔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형식적인 재판조차도 없는 즉결처분이었다. 합니다.
또 운동장 왼쪽의 교사 별관은 부대원들의 숙소로 활용되었으며,
교장 관사는 함덕지서가 1948년 5월 13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전소되자
이곳으로 이동해 경찰들이 주둔하기도 했다합니다.
마음을 안정시킬 겸 정토사에 들어갔습니다.
한때 강림사라고 하는 꽤 큰절이 있던 곳이라 합니다.
삼존불에 인사드리고
제주도 절집으로는 드물게 범종과 함께 법고, 운판, 목어를 갖춘 범종루가 있습니다.
승려 한석화가 일제강점기에 창건했다 하고
사찰로서의 기반이 잡힌 시기는 현재의 대웅전을 세운 1970년이라 합니다.
江臨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탐라지, 金尙憲의 남사록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강림사가 창건된 것은 1600년대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남사록의 元 창건설과 관련하여 1300년대로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폐찰 시기는 이형상 목사 도내 순시(1703년) 이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사장으로 갑니다.
큰사슴 백사장이라고도 불리운 곳입니다만
너무 많은 소란에 큰사슴은 놀라 도망가 버렸을 겁니다.
그래서 인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고려말에는 삼별초를 토벌하러 왔던 여몽연합군이 이곳으로 상륙하였다 하고
4.3당시에는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자행됐던 곳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진모살동산
도기 굽던 곳 앞을 지나
서우봉 망동산을 올랐습니다.
망동산오름 정상에서 동쪽을 봅니다.
풍력발전기들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행원리가 보이고 김녕 입산봉과 고살미가 보입니다.
그 흔적은 없으나 이곳에 원당봉과 입산봉을 연결시켜주는 봉수대가 있었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물개의 모습을 닮았다고 獺嶼島라고도 하는 다려도.
등대와 정자가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입니다만.....
이 봉우리처럼 생채기로 갈기갈기 찢긴 곳도 많지 않을 겁니다.
북쪽 기슭에는 8~9곳에 달하는 일제강점말기 구축한 진지동굴로 몸통이 깎였고.
등성이 좌우 몬주기알과 생이봉오지 등에서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산 전체가 멍이 들어 주변 바다조차도 푸르딩딩합니다.
북촌리 학살지
제주 4.3연구소에서 발간한 제주 4.3유적 1권 중에서 해당내용을 옮깁니다..
1949년 1월 17일 함덕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100여명 단위로 끌려 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븐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 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 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녀자 등 일부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당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이 지금의 너분숭이 소공원이다.
그날 학살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김석보씨는 “어머니와 내가 그날 저녁 함덕으로 가기 전에 세 동생의 시신을 너븐숭이에서 발견했다.
어머니는 뒷날 이곳에 와서 동생들의 시신을 너븐숭이 구석에 임시 매장했다.
지금도 그때 묻은 자리에 그대로 동생들은 묻혀있다.”고 말했다.
또 1948년 6월 22일 북촌포구 경관 피습사건 용의자로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강서수(남, 03년 77세) 씨는 “이듬해 3월경에 석방되어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보니 너븐숭이 어느 밭에 그대로 방치된 채 들짐승, 까마귀 등이 시신을 뜯어먹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고 증언했다.
그의 3형제 모두가 형무소로 끌려갔을 뿐 아니라 할아버지가 외지에서 북촌에 들어온 관계로 친척도 없었기 때문이다.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 있어서 ‘너븐숭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애기무덤 20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4·3 당시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4·3 이전부터도 어린애기가 병에 걸려 죽으면 묻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 소나무와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무덤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2001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부지가 정리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금 현재 이곳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고 그 옆 밭과 길 건너에도 몇 기의 애기무덤이 있다.
그중 적어도 3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이곳의 모든 무덤들이 4·3 희생자의 무덤은 아니지만 당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잔디나 변변한 장식도 없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참혹하고 무모한 학살을 알려주기에는 더 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
뉘어진 석비에 새겨진 양 영길 시인의 '애기돌무덤에서'라는 시도 옮깁니다.
한라 영산이 푸르게
푸르게 지켜보는 조천읍 북촌마을
4.3 사태의 군인 한 두 명 다쳤다고
마을사람 모두 불러 모아 무차별 난사했던
총부리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너븐숭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아직 눈도 떠 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
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았을까
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
흙 한 줌 뿌릴 시간조차 뺏아 갔을까
돌무덤 속에 곱게 삭아 내렸을
그 어린 영혼
구천을 떠도는 어린영혼 앞에
두 손을 모은다
용서를 빈다
제발 이 살아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빌고
또 빈다.
산책로를 따라 순이삼춘 문학비앞으로 왔습니다.
마을사람이 죽어있던 너븐숭이 학살터와 순이삼춘의 옴팡밭을 재구성한 곳입니다.
송이 위로 비석이 뒹굴고 있습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가 하면 내동댕이쳐 있기도 합니다.
벌겋게 땅을 물들인 피바다위에 사체가 놓여 있던 그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랍니다.
순이 삼춘은 옴팡밭에서 웅크린 채 죽어 있습니다.
원전의 일부를 옮깁니다....
더운 여름날 당신은 그 고구마 밭에 아기구덕을 지고 가 김을 매었다.
옴팡진 밭이라 바람이 넘나들지 않았다.
고구마 잎줄기는 후줄근하게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대낮,
사위는 언제나 조용했다.
두 오누이가 묻힌 봉분의 뗏장이 더위 먹어 독한 풀냄새를 내뿜었다.
돌담 그늘에는 구덕에 아기가 자고 있었다.
당신은 아기구덕에 까마귀가 날아들까 봐 힐끗힐끗 눈을 주면서 김을 매었다.
이랑을 타고 아기구덕에서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이랑을 타고 돌아오곤 했다.
호미 끝에 때때로 흰 잔뼈가 튕겨 나오고 녹슨 납탄환이 부딪쳤다.
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총소리의 환청(幻聽)은 자주 일어났다.
눈에 띄는 대로 주워냈건만 잔뼈와 납탄환은 삼십년 동안 끊임없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을 밭담 밖의 자갈더미 속에다 묻었다.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忍苦)의 삼십년, 삼십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삼촌은 그렇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
상생과 평화를 이야기 합니다.
먼저 화해가 되어야겠지요.
화해에 앞서서 인정을 해야하고 용서가 되어야 할텐데..
둘 다 요원할 것 같습니다 .
막막한 마음으로
전시관으로 갑니다.
강요배의 그림앞에서...
오늘의 걸음을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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