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연구소에서 준비한 4.3과 길. 그 두 번째로 애월읍 지역을 갑니다.
하가리입니다.
마을중앙에 있는 연화못을 한바퀴 돌면서 4.3답사에 앞선 숨고르기를 합니다.
애월초등학교 더럭분교입니다.
당시에는 하가국민학교입니다.
1948년 12월 17일 외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9연대소속 부대가 하가리에 와서 주민들을 하가국민학교로 집결시킵니다.
체포자명단을 호명해 20여명을 뽑아 외도지서로 끌고 갔다합니다.
이 가운데 5명은 돌아오지 못하고 1949년 3월 외도지서 서쪽 밭에서 시신을 수습해 왔다고 합니다.
1949년 2월에는 무장대가 학교를 습격합니다.
학교에 머물러 있는 군인들을 습격했을 것이라고 합니다만 이 때 군인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습니다.
이 습격으로 학교건물은 모두 불에 타 버렸습니다.
토벌대는 후에 당시 교감이 무장대와 내통하였다하여 총살했다 합니다.
소실된 학교건물은 주민들에 의해 1950년 6월 복구되었으며 1954년에 더럭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학생수가 적어 분교장으로 운용됩니다.
응원경찰주둔소
당시 향사로 사용했던 곳으로 현재 창고로 쓰입니다.
1948년 11월에 발생한 육시우영사건이후 주변에 성을 쌓고 경찰 5~6명이 주둔하다가
1949년 가을부터는 응원경찰 20여명이 주둔하였다합니다.
마을 17세 이상 35세 이하 남녀가 각각 1개 소대씩 편성되어 동네보초 등을 섰다고 합니다.
1949년 3월 송두진 구타사망사고가 발생합니다.
육시우영사건이 발생한 우영.
1948년 11월 13일 새벽 원동마을로 향하던 9연대 군인들이 이곳을 지나다
제삿집에 있던 사람들과 그 근처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내어 그 중 27명을 공개적으로 집단학살한 사건입니다.
당시 정순아라는 분의 집 제사였다는데 새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의심한 군인들이
그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근처의 집들을 불태우며 주민들을 끌어냈고 집 앞 밭 속칭 육시우영에서 공개 처형했다합니다.
마을 골목길 팽나무에게 그 날의 일을 물어보려 했지만 고개를 돌립니다.
선홍빛 붉은 꽃에게 물어보랍니다.
신엄리지경으로 내려갑니다.
자운당부근을 지납니다.
사람마다 말이 조금씩 다른데 이 두곳중 한곳이 옛 자운당자리라고 합니다.
자운당은 도내 여러 군데 있지요.
멀리 중문지경에도 있고 가까이 광령1리에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중문과 이곳 자운당은 4.3때 참화를 입은 곳이고... 모두 폐당되었네요.
광령1리 자운당은 아직도 당궐이 다닌다 합니다.
이곳 자운당에 얽힌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이 마을에 안세록이라는 사람이 살았답니다.
풍채가 수려하며 학식이 뛰어났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향교에서 용무를 마치고 말을 타고 집으로 오던 도중 자운당 앞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친정에 가는 길인데 피곤하니 말을 태워달라고 하였답니다.
안세록은 그 여인이 여우인 것을 알고 앞에 타라고 하고는 자기 집에까지 와서
기르는 개 두 마리를 풀어 그녀를 물게 하여 여우를 잡았다는 설화입니다.
설화속의 여우는 흔히 아름다운 여자로 둔갑해서 지나는 사람들을 홀립니다.
여우를 여성으로 묘사하는 것은,
체구가 작은 여우의 조심스럽고 영리한 행동이 여성의 이미지와 닮았다는 연상에서 기인하는 듯 합니다.
이 설화 속에서도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지나는 남자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여우의 변신임을 눈치 챈 안세록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겁니다.
무슨 헤꼬지를 한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어떤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개에게 물어 뜯겨 죽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그게 그렇게 자랑할 만한 행동이었을까요.
인근 금능의 여우는 죽어도 할 말이 없지만 이곳의 여우에게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었을까?
걸어 내려오며 이런 저런 생각...
자운당 4거리입니다.
납읍리주민등의 집단학살이 일어난 곳입니다.
1948년 12월 28일 새벽 애월로 소개되어 간 납읍주민들을 애월지서로 모두 모이라 한 뒤 30여명을 호명합니다.
소위 납읍리 자위대원명부라는 문서였는데 토벌대는 이들을 차량에 싣고 제주시 방면으로 가다가
이곳 자운당 밭에서 총살합니다.
같은 날 애월읍 지역 내 하귀리, 유수암리, 상귀리, 고성리 주민 70명도 이곳에서 집단 학살되었습니다.
사건발생 6개월 후 시신수습을 하였으며 당시 수습된 시신은 72구라 합니다.
방두리왓
1948년 11월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진 뒤 애월지서 중엄파견대에 갇혔던 사람들이 희생된 곳입니다.
1948년 11월 11일 무장대가 애월지서 중엄파견대와 마을 우익인사 집 네 곳을 습격합니다.
대부분 피신하였으나 당시 애월면 대청단장 김여만의 가족은 무참히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 다음 날인 11월 12일 경찰은 중산간일대에서 잡혀와 수용되어 있던 신엄리, 수산리, 유슈암리 주민등 50~60명을
지서앞 밭인 방두리왓에 세워놓고 총살했다 합니다.
애월지서 중엄파견소 옛터.
4.3이전부터 운용되었던 곳입니다만 4.3발생 후 구엄에 무장대 습격이 잦아지자 신엄, 구엄, 용흥 지역청년들이
지서협조원으로 편성되어 보초를 섰습니다.
신엄리 대청은 총 30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48년 말 이들중 30여명이 특공대로 재편되어 토벌대 작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중엄리표지석앞을 지나..
구엄리로 갑니다.
해방직후 마을유지 문영백씨의 영향으로 우익활동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청년들이 대거 지서보조원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경찰에 투신하는 사람도 많았다 합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 구엄리청년들이 많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타 지역 활동가들이 구엄리사람을 집단 구타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장대들이 자주 습격했으며 1948년 12월 19일 에는 무장대가 대대적으로 습격하여
가옥 30여 채가 소실되고 주민 20여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어르신 한분....
뭐하러 다니나?
4.3답사중입니다.
한참을 나를 바라보더니 ....
요새 분위기가 무장대를 측은히 여기는 듯하고
토벌대에 의한 희생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무장대에 당한 한은 누구한테 풀어야 하느냐고 물으시네요.
솔직히 저는 모릅니다.
구엄초등학교
1939년에 구엄공립심성소학교로 개교했습니다.
1948년 12월 19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교사 6채 모두 불에 타고 선생 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구엄리사무소로 가는 길입니다.
가정집에 차린 절인데
천제사라는 절집이름과 그 밑에 선녀법사라는 말이 너무 않 어울려서 한 장 꾹
문이 활짝 열려진 집 앞을 지나면서 무슨 나무 열매인지 모르나 예뻐 보여서 또 한 장 꾹
구엄리사무소 앞입니다.
신라 말 또는 고려중엽에 설촌되었다는 엄장이 마을입니다.
지금의 구엄포구부근 500여 평의 평평한 암반에서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여 소득이 인근 마을보다 높았습니다.
지금은 수박, 양배추 그리고 특용식물들을 많이 재배하고 있기도 하지만
전체가구의 절반이상이 제주시로 출퇴근하고 동네에서는 잠만 잡니다.
고 경감 문익도 순직지지
애월경찰서 차석으로 근무시 1948년 12월 19일 무장대가 구엄리를 습격하자
지원차 출동했다가 자운당부근에서 매복하고 있던 무장대에게 희생당했습니다.
이 비석은 당시 제주경찰서장이 일주도로변에 세웠으나 도로확장공사로 이곳 구엄리 사무소로 이전해 왔습니다.
네 번째 비석이 구장이었던 문영백의 공덕비입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간 구장을 한 분인데 마을에 신망이 많았다 하나
무장대로부터는 배척1순위였습니다.
1948년 12월 무장대의 습격으로 가족 모두를 잃으셨습니다.
구엄리 본향 모감빌레 송씨할망당앞을 지납니다.
신목앞에 시멘트로 당집을 짓고 제단을 만들면서도
제단 뒤로 널찍하게 창문을 내어 신목 세 그루가 모두 보이도록 되어 있는 특색 있는 당입니다.
목사 장인식 과 윤구동의 선정비.
정말 글에 쓰여 있는 만큼 휼민선정, 애민청덕했었으리라 믿고 지나갑니다.
길 건너편으로 수산봉이 보입니다.
정상에 물이 있었다 해서 물미, 수산봉인데...물이 있었을 만한 자리에 전경부대가 있어 확인하질 못합니다.
그래도 최근에는 오름 산책로를 만드는데 부대 옆으로라도 지나가라고 곁을 내주었습니다.
수산리충혼묘지입니다.
4.3사건 및 한국전쟁 당시 조국과 향토를 방위하다가 숨져간
애월읍 출신 순직경찰 및 전몰장병 영령들의 얼을 추모하고
넋을 새기기 위하여 새운 곳입니다.
그 이후 각종의 이유로 순직한 군경과 일반인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09년 2월 28일 경남 통영앞 해상에서 동료선원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 들었다
목숨을 잃고 의사상자로 선정된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출신의 선원 양석원씨가 모셔지기도 했습니다.
곰솔과 수산저수지
천연기념물 441호로 지정되어 있는 마을의 상징수입니다.
안내판의 글을 그대로 옮기면
"나무의 크기는 수고 12.5m,둘레 5.8m이다.
지상 2m 높이에서 원줄기가 잘린 흔적이 있고
그곳에서 4개의 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400여 년 전 수산리가 생길 때 뜰 안에 심었으나 집이 없어진 뒤
강씨 선조가 관리하였다고 전해진다.
수산리 주민들은 이 곰솔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라 믿고 잘 보호하여 왔으며
눈이 내리면 흡사 백곰(白熊)같다하여 곰솔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곰닮아서가 아니고 나무껍질이 검어서 곰솔이지요.
해송은 바닷바람 때문인지 껍질이 검습니다.
그래서 검솔이라고 했고 검솔이 곰솔로 변하여 어떤 모습으로 자라든 해송은 우리말로 곰솔이라 합니다.
곰 모양 소나무든 검은 껍질 소나무든 잘 자라주기만 하면 고맙지요.
수산저수지는 면적이 12만 평방미터에 9.3미터 높이의 제방이 420미터나 되는
제주도에서는 두 번째 큰 저수지입니다.
만수면적으로는 제일크다하지요.
저수지 남쪽 하천인 답단이내에서 물이 유입되도록 공사를 하였는데
지금은 도로개설로 하천의 물길이 막혀 도로밑 소규모유수관을 통해서만 물이 흘러 들어와서
물이 풍부하지도, 맑지도 못합니다.
이물이 다시 토관을 통하여 일주도로변 미나리 밭으로 넘어갑니다.
1980년대 말 이 주변을 위락시설과 유료낙시터로 개발하여 보트장, 야외풀장, 식당 등을 설치하여
낚시꾼과 관광객을 유치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네요.
식당은 다시 문을 열었다고 현수막을 걸어놨는데 잘되길 바래요.
지금도 낚시꾼은 많이 찾아옵니다.
남쪽 돌출부분이 포인트인데 요새는 무엇이 많이 잡히나요?
전에는 쓸데없는 블루길이 많이 잡혀서 도로 던져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수산봉을 한번 더 보고 수산저수지 남쪽을 지나갑니다.
이곳은 수산리 하동이 있던 곳입니다만 저수지조성사업으로 마을이 없어졌지요.
4,3당시 수산리는 본동이라 할 상동 120여호, 하동 60여호, 당동 40여호, 예원섯동네 30여호 해서 250여호의 제법 큰 마을이었습니다만
1948년 5월 6일 수 산리대동청년단장 고하종이 무장대에 의해 살해된 이후 토벌대와 무장대가 번갈아 마을을 괴롭힙니다.
1948년 11월 5일 에는 토벌대에 의해 12명이 애월지서중엄파견소로 연행되어 갔고
11월 11일 무장대의 애월지서중엄파견소습격 다음날 경찰에 의한 방두리왓 학살시 함께 학살됩니다.
당동마을. 올레와 마을 안 모습...
당동성입니다.
1949년 마을을 재건하면서 본동과 당동에서 별도의 마을성을 쌓았습니다.
유수암과 장전에서 소개되어 온 주민들과 함께 쌓았던 성의 남아있는 흔적입니다.
수산저수지 동쪽을 연해 걸어갑니다
가재기 동산으로 갑니다.
길옆 애기능금과 재배하는 꽃들을 보며 길을 넓힐 때 가족묘지가 없어지자
화장 후 묘비를 다시 정비한 묘역 옆을 지나 외소나무 옆 어떤 묘지로 갑니다.
자그마한 애기무덤과 같이 있는 어떤 무덤.
차마 무덤은 못 찍고 멀리 한라산만을 봅니다.
하귀리 학원동 비학동산으로 갑니다.
1948년 12월 초 경찰은 무장대와 연관이 있다고 하는 개수동청년 10여명의 이름을 거명하며 자수하라는 통보를 보냅니다.
경찰을 믿을 수 없었던 마을 주민들이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결론이 나질 않자 그 중 한 명이 먼저 출두하였습니다.
경찰은 자수의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자수한 1명을 총살시키고 개수동에 대한 소탕명령을 내립니다.
1948년 12월 10일 경찰은 개수동을 급습하여 이곳 비해기동산(비학동산)에 주민과 소개민을 모아놓고 그 중 36명을 학살합니다.
주민들을 소집시킬 때 나오지 않고 꾸물거렸다는 이유로 늦게 나온 여인을 붙잡아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살해합니다.
불행히도 그 여인은 아이를 배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아이와 함께 아까 다녀온 외소나무 밑 그 무덤에 누워계십니다.
다시 한번 뿌예진 눈으로 멀리 보이는 외소나무를 바라봅니다.
그 팽나무는 지금의 마을 회관자리에 있었는데 마을회관을 다시 지을 때 베었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을 증언 해주고 계신 하귀리발전협의회 공동대표 고창선 님.
당시에 쌓았다고 하는 마을성입니다.
마을을 나오면서 아무 의미 없이 수산봉을 바라봅니다.
마을을 나갈 무렵 나타나는 개물.
들어올 때는 입구가 되겠지요.
마을의 귀한 물이라 해서 덮개를 덮어 사용했다 하여 덮개물이라고 하는데
유식한 분이 덮을 개(蓋) 물 수(水)를 서서 개수라 하였고
여기서 마을이름이 연유하여 개수동이 되었습니다만
4.3이후 비학동산의 이름을 따서 학원동으로 바꾸었다 합니다.
답동교를 건너 답동을 지나고 번대동을 지나서...
상귀리로 갑니다.
상귀리는 고려 원종 12년(1271)에 삼별초에 의해 소개되어 온 마을이랍니다.
지금의 항바두리성이 있는 곳에 살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성을 짓겠다고 소개시키는 바람에 내려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귀일현의 일부로 조선 광해군(1608)시 제주판관 김치(金緻) 재임시 방리 설정하면서 하귀리와 상귀리로 분리되었다 하며
말테왓동네 또는 마전동이라고 하는 동카름, 신산동, 소앵동, 광석동, 부처물동 등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굼지오름 코앞에 왔습니다.
그 이전 어느 땐가에 바굼지오름 밑 지금 남화사라는 개인절이 있는 곳 앞에서부터 동쪽과 남쪽 너른 터에 큰 절이 있었다 하는데
어느 날 폭풍우와 큰비에 절앞 병풍천이 넘치면서 동마루 쪽에서 쏟아져 내려온 큰물이 빠져나갈 길을 막아
절이 모두 부서지고 흙으로 덮여버렸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부터 비가 와서 병풍천이 넘치면 어디선가 계속 놋쇠대야에 물 받는 소리가 계속 나기에
인근 마을사람들이 와서 파보니 불상이 하나 나오고 그 밑으로 단물이 펑펑 샘솟았다 합니다.
이 불상은 지금 바굼지 동쪽기슭 현재의 월영사에 모셔져 있는데 통일신라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통의 이름도 부처물이요, 동네이름도 부처물동이 되었고
풍족한 식수에 힘입어 10여호가 오순도순 살다가
12월 12일 미수동을 습격한 토벌대가 12명을 잡아와서 이곳에서 학살합니다.
그리고 부처물 사람 4명을 학살하고 주민을 모두 소개시킵니다.
그 뒤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월영사는 1936년 전라북도 완주군 위봉사의 포교당으로 건립되었다가
1945년 귀이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4.3때 마을주민이 소개되면서 모든 전각이 불태워집니다.
1962년 현재의 사찰을 세우고 월영사라 이름한 태고종 소속 사찰입니다.
팬션들로 가득한 동마루고개를 넘어가면서 팬션 입구에 작은 연못, 물레방아 한 컷 꾹
하귀리 영모원입니다.
하귀리민들이 하귀리발전협의회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와 4.3희생자, 4.3및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희생된 호국영령을 함께 모시기로 하고
3년쭌비끝에 2003년 5월 제막식을 가진 곳입니다.
위령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위국절사 영현비'와 '호국열사 충의비'가있으며
오른쪽에는 '4·3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고, 개별 비석 앞에는 제단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을 출신 모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화해와 상생'차원에서 중앙에 있는 위령단에만 분향함으로써
모든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출 수 있도록 한 것이라 합니다.
4.3당시 군경희생자와 4.3희생자를 함께 모셔 화해와 상생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분들도 있고
불편한 동거를 거북해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관의 지원 없이 주민들 스스로 만들어낸 추모의 장입니다.
각 비석뒷면에 일제 강점기 때부터 4·3에이르기까지 희생된 370여명의 이 마을 출신 인사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영모원 4.3희생자 위령비의 전면에 쓰여진 추모시를 옮깁니다.
“4·3의 삭풍에 흩날린 꽃잎들이여”
여기-
죄 없이 사라져간
이웃사람들의 넋을 달래는
비를 세운다.
사상도 갈등도 모르던
숫접은 이웃들
모진 바람에 어쩌다 꺾이어
낙화되기 반세기
따뜻한 이웃의 체온으로
다시 돌아가
옛날처럼 살고픈
화합의 표상 앞에
너와 나 손 마주잡고
미쁜 마을 만들기를 다짐하노니
떠도는 원혼들이시여
돌아와
고향의 언덕에 안기소서.
4·3위령비의 뒷면 비문입니다.
여기와 고개 숙이라.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여기 와서 옷깃을 여미라.
죽은 이는 죽은 대로,
살아남은 이는 살아 있는 대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허공에 발 디디고 살아오기 어언 50여 년.
아버지보다 오래 살고 어머니보다 나이 들어서야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
오래고 아픈 상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함께 살아남은 자의 도리로 그 위에 한 삽 고운 흙을 뿌리려 한다.
그 자리에서 피가 멎고 딱지가 앉아 뽀얀 새살마저 살아날 날을 기다리려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 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충의비 뒷면을 보면서 오늘의 답사를 마칩니다.
Shalom, chave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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