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슬포입니다.
모슬포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흔적들을 살펴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곳은 많은것이 달라집니다.
산업활동면에서 먼저 살펴보면 옹기, 전분공장, 통조림공장 등이 생깁니다.
당면공장인 대정흥업, 통조림공장인 대해식품 , 모슬포 중심상점이던 협창상회 등이 생겨나고
부둣가 좌우로 뻗은 신작로는 물류의 집산지로 어구, 철물, 빵, 잡화 등을 판매하는 상점이 들어서지요.
한국전쟁기에는 피난민촌이 형성됩니다.
대정지역에 온 피난민은 17만 5천여명에 이르렀다합니다.
신영물과 부둣가를 중심으로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고 하지요.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도 떠나고 군인들도 떠난 빈자리를 찾아봅니다.
모슬포지역 인물들 중
가파도 출신 교육자이자 항일운동가 김성숙, 향토사학자 김태능 등이 자란곳을 둘러봅니다.
4.3 관련 오대진 과 이승진(김달삼) 등도 이지역 출신이지요.
김웅철 대정고등학교 교사의 자료를 기본으로 어려운 시절 속으로 들어 갑니다.
모슬포 신영로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모습이냐고요?.
예 6월 26일 오늘의 모습입니다. 간판을 제외하고는요…
시가지정비를 위한 도로확장으로 주변에 위치한 적산가옥을 포함한 모든 건물들이 철거될 예정이랍니다.
철거되기전에 어떤 드라마를 촬영한다 합니다.
그래서 예전 간판들을 만들어 달아놨다 하네요.
전화번호를 보니 시대배경이 70년대쯤 되겠습니다.
없어지기 전에 한번 쭉 둘러보시지요.
일제강점기에 어구, 철물, 빵, 잡화등을 판매하던 상점이 즐비하던 신영로 한 가운데 있는 일본식 상점건물입니다.
이 적산건물은 모슬포 지역에 두채밖에 없던 매우 규모있는 상점이었습니다.
1층은 상점, 2층은 사무실 겸 창고로 사용했습니다.
4.3 때는 2층에 특무대가 주둔하기도 하였습니다.
옆문이 열려있어 2층을 올라가 봅니다.
최근 살았던 가족의 흔적 특히 어린 여학생의 고뇌어린 표현이 마음을 짠하게 합니다.
새로 만든 오일장으로 연결되는 길로 내려갑니다.
일제강점기에 가파도 출신 김성윤 이 설립한 전복, 소라등을 가공하는 통조림공장인 대해식품의 옛터입니다.
이께스라고 하는 이동식 고기집을 이용하여 활어나 패류를 보존양식하는 기법을 활용하여
오늘날의 가두리양식의 효과를 나타내어 통조림생산으로는 당시 도내에서 1,2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합니다.
통조림공장 운영과정에서 나오는 패감을 이용하여 단추를 만드는 공장을 부속으로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후에 김성윤은 한흥산업이라는 전분공장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전분공장이야기가 나왔으니 일제강점기에 제주도 최초로 세워진 전분공장인 대정흥업을 찾아 멀리 갔다올까요?
대정면장을 지낸 김대유가 1939년 창업한 것으로 조선총독부관보에 기재되어 있답니다.
사무실은 하모리에 있었지만 제조공장은 지금의 일과 2리에 있서 서림공장이라고도 하였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고구마전분가공업을 계속하여 인근 주민들이 돈을 벌게 해주었던 공장은 지금은 그 굴뚝만 남아 있습니다.
그 옆 서림 수원지는 일대주민들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는 모슬포 주둔 일본군사들에게,.
한국전쟁시에는 제1훈련소훈련병들에게 생명수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다시 모슬포로 돌아와서
모슬포 오일시장이 있던 곳으로 갑니다,
모슬포 오일시장은 여기저기로 많이 옮겨졌었습니다만 1920년대 후반 최초로 들어선 곳은 지금의 제7일 안식일교회앞 이자리라 합니다.
그 때는 여기가 공터라 이런 골목이 없었다 하네요.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몰리자 속칭 예지물과 섯산이물 사이에 공터로 옮겨 더 큰 규모의 장이 열렸다가
현 송악도서관쪽으로 이설되었다가
현재는 섯산이물옆으로 돌아와 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피난시절에는 하모중심부, 지금의 삼성생명자리에 매일장이 생깁니다.
그것이 옮겨진 곳이 현재 모슬포 중앙시장입니다.
지금 그랑프리라는 간판있는 건물입구자리가 한국전쟁시에는 맛나당이라는 빵집이었다 합니다.
한국전쟁으로 장리석화백이 정훈부에 소집되어 훈련소에 근무할 때 그 부인이 운영했었다 합니다.
당시 이중섭 이 정훈부에 같이 근무하는 조카 이영진 도 만날 겸 자주 이곳을 찾아와 장리석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네요.
협창상회터
일제강점기부터 모슬포 전역의 물산집하와 물류 및 유통 상공업의 중심상점이었던 곳으로
주인 김임길은 오오무라병사에 대정중학교를 개교할 때 개보수의 모든 비용을 부담히였습니다.
한국 전쟁중 가게 안집에 고당 조만식선생의 따님인 조선부여사의 일가족이 피난살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정읍민관터
일제강점기에 읍민관으로 쓰이던 건물입니다.
많은 행사들이 열렸었겠지요.
정마트옆 뒤편 건물 주차장까지 두동의 창고가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이곳이 4.3때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칠월칠석 미명 무렵 섯알오름으로 이송되기전까지 수용되었던 곳입니다.
오대진 의 집터와 그 서쪽 김달삼이 해주공산당대회에 보고할 투쟁일지를 적었다는 이공우의 집
그리고 제주 최고의 향토사가 이자 항일운동가인 김태능의 집터입니다.
김태능은 숙부가 세운 가파도 신유의숙의 교사로 봉직하기도 했으나 주로 제주 향토사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연구실적을 남기었다 합니다.
김대유면장집입니다.
수원고등농림출신임에도 면장을 자원, 마을 향약을 만들고
일본 도사(島司) 앞에서 잡곡밥에 멸치젓 도시락을 먹으면서 대정사람들의 생활상을 전달해 공출량과 군사시설 출역을 줄였다 합니다.
집이 번듯하고 정원에 수목과 화초가 다양하여 한국전쟁때는 제주지구위수사령관을 겸한 제1훈련소장의 관사로 사용되었습니다.
고수선의 집입니다.
경성여고보재학중 최정숙 강평국 등과 함께 항일활동으로 존경받는 인사라 합니다.
후일 고수선 은 의료인으로 사회사업 및 육영사업가로 헌신했습니다.
이곳은 그의 어머니가 영주여관을 운영하던 자리입니다.
모슬포금융조합 및 사택이 있던 곳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주요 면소재지에는 금융조합이 설립되어 은행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당시 절충식건축양식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대정초등학교입니다.
1908년 10월 19일 대정읍 안성리에 사립 한일 학교로 개교한 뒤,
1931년 현재 상모리로 이전해 지금까지 졸업생 1만5458명을 배출한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입니다.
대정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마련된 기념비와 '대정교 100년사'에서 학교설립자를 '이재교' 선생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재교가 아닌 강형규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설립자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대정역사문화연구회 등은 "이번 대정교 100주년을 맞아, 학교 설립자를 이재교 로 잘못 적시했다"면서
"대정교를 설립한 사람은 이재교가 아니라 강형규 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대정교 관계자는 이에 대해 "문건마다 다르게 나와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1년 넘게 「원대정군지」(영인본), 「원대정군지」(한글판) 등 많은 자료를 뒤져 대정교 설립자가 이재교라는 것을 잠정결론 내렸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논란이 있더라도 이 학교가 이지역 교육의 중심이 었다라는 것은 부정되지 않을 것이며
추후라도 면밀한 검토뒤에 밝혀지리라 생각됩니다..
교정 한곁에 있는 민족해방기념비입니다.
광복후 제주도는 각종 이념단체들의 난립과 이념대립,
군정과 단정에 대한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던 가운데 4.3사건까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젊은이들이 나라를 구하려고 전선으로 나갑니다.
이곳 대정국민학교 졸업생들은 자신의 운명을 예측못한 상황에서
미쳐 세우지 못한 대한민국민족해방기념비를 세우기로 하여 성금을 내놓고 전장으로 향합니다.
선배들의 그모습을 지켜보던 후배들도 동참 1950년 7월에 민족해방기념비를 세웁니다.
학교후문부근에 있는 어느 훈도와 교장선생님을 기념하는 비입니다.
군예대터.
육군제1훈련소가 창설된 후어 훈련병을 포함한 상주 10만 군인들을 위한 군예대가 창설되었습니다.
당시 군예대장은 가요작사자로 유명한 유호였고
박시춘과 콤비를 이루어 만든 삼다도소식, 전우여 잘자라 등 많은 진중가요와 군가들이 만들어 진 곳이기도 합니다.
모슬포극장터
협창상회등이 세운 물류창고를 전쟁시 불어나는 피남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개보수한 곳입니다.
피난민은 물론 지역주민들응 위로하고자 악극단공연, 무성영화의 상영 그리고 지역 중고교의 문화제들이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현대여관터
1946년 제주신보에 경축광고를 낼만큼 모슬포에서는 가장 큰 여관이었다 합니다.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있습니다.
장춘여관터
모슬포중심가의 숙박업소였습니다.
여주인의 이름이 이장춘이어서 장춘여관이라고 이름하였다합니다.
이 여관의 바깥주인은 제주 4.3사건때 조남수목사등과 함께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고 하는 후에 면장을 지낸 당시 민보단장 김남원 입니다.
현재 성창수산이라는 수산업 점포로 바뀌어 있습니다.
사잇길을 걸어 신영물로 갑니다.
조선시대에는 모슬진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던 곳이고 한국전쟁중에도 모슬포 총 17만 5천에 이르는 주민과 피난민 그리고 군인의 주요급수원이 었습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호안공사등의 영향으로 용출량이 급격히 감소되었습니다.
부근에 오좌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왜구(倭寇)들이 제주도 연근해에 나타나 침탈하기 시작했는데,
고종 24년 8월에는 가파도에 가막(假幕)을 지어 왜어선6척이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모슬포에 상륙하여 민가의 돼지와 닭, 또는 부녀자들을 약탈하여 갔지요.
신영물은 모슬포 주민이 거의 이용하여 식수 뿐 아니라, 빨래도 하는 곳으로 부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인데
일본 어민들은 물을 길어간다는 핑계로 부녀자들을 능욕하곤 하였답니다.
이에 이만송(李晩松)과 이흥복(李興福), 정종무(鄭宗武), 이성만(李成萬), 이성일(李成鎰) 등 다섯 젊은이가 보다 못하여 일어나
그들과 싸우다가 이만송의 머리가 잘리는 등의 참변을 당하여야 했습다.
사건이 조정에 알려지자 사망한 이만송의 아들 이평원(李平元)과 함께 싸웠던 네 사람에게 좌수(座首) 벼슬을 하사하니
이것이 '오좌수(五座首)'가 된 내력입니다.
불쌍한 이야기지요.
위비는 광복 64주년기념으로 현 위치에 새로 세웠습니다.
원 비석은 이 사진처럼 신영물바로 옆에 있었는데 소설가 오성찬 이 글을 짓고 김태윤 이 글씨를 썼습니다.
모슬포 내항에 가면 공덕비가 하나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남단 대정읍 가파리 해협을 흔드는 거친 파도소리.
아~ 저 소리들! 가파리에서 거친 파도에 시달리면서 살아온 그의 삶에의 숨결이리라."로 시작되는 공덕비의 내용은
동력선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멸치 잡는 방식(분기초망)과 자리돔 잡는 방식(들망)을 개발해
이곳 어민들에게 획기적으로 어획고를 올리는데 공헌한 수발(水發) 김묘생(金卯生)를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비석을 더 보러 갈까요.
짐개동산입니다.
4.3사건 위령비와 목사 조남순, 면장 김남원 그리고 경찰서정 문형순 의 공덕비가 서 있습니다.
언젠가 길게 블로깅한 적이 있어서 이자리에서는 생략합니다.
또다른 비석을 찾아갑니다.
충혼묘지 입구에 있는 모슬포개발의 대원로인 허창현 의 공적비입니다.
운진항입구에도 허창현 선생의 공덕비가 있습니다.
그분의 혜안에 의해 개발되고 있는 운진항입니다만
좋은 것이 있으면 않좋은 것도 있듯이 운진항 방파제축조로 인한 조류의 변화로
옛 맬캐포구 지금의 하모해수욕장의 모래는 계속 유실되어 해수욕장으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모슬포경찰서터
신영물앞에 있던 모슬포경찰서는 한국전쟁으로 피난민까지 합쳐 인구가 17만 5천까지 불어나자
현 대정파출소와 서부소방서 대정지서가 있는 약 750평의 대지로 옮겨 한림에서 중문까지를 관할하였습니다.
지금은 성산경찰서와 함께 서귀포경찰서로 통합되었습니다.
모슬포우체국
1912년 2월 모슬포우편소가 생겼고 1941년 우편국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부두입구에 위치해 있다가 1970년대 말 현재의 위치로 전화분국과 같이 이전해 왔습니다.
거욱대가 있는 곳을 극대왓이라고 합니다.
예전엔 여기서 상모리와 하모리가 구분되었다 합니다.
옛 모슬포 교회
모슬포교회에서 운영하던 의숙터
모슬포교회에서 갈라진 모슬포제일교회
먼 길 걸어 알뜨르. 역사의 올레 - 알뜨르비행장에서 역사의 길을 묻다를 끝냅니다.
이제 부터는.....
사진을 따라 한번 걸어보시지요.
100억이 들었다는 매립지도 보시고
옛 건물과, 어쩌면 곧 없어질 곳도 가보시고
옛 포구도 보시고
횟집특화거리로도 들어가 보세요....
Sinigaglia - Romance for horn & string quartet Op.3
Branimir Slokar trombone
Paul Angerer cond.
Southwest German Chamber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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