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 중심부로 들어가기 직전,
대정고등학교 앞 너른 터 한 편에 육, 해, 공군을 상징하는 세 개의 탑과 함께 평화의 터라고 쓰인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없는 곳에서 사랑이 강조되고
평화롭지 않은 곳에서 평화가 강조됩니다.
그 만큼 갈구한다는 것일 겁니다.
타는 목마름을 같이 느끼며 다가가 봅니다.
평화의 터.
이곳은 근세이후 가장 평화롭지 않은 터입니다.
1926년에 오오무라 부대가 알뜨르의 해군항공기지 건설 감독 및 각종 지원을 위해 바로 이 자리에 들어선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직후 그리고 한국전 내내 통곡과 눈물의 강이 흐른 곳입니다.
지금도 길 건너편에는 군부대가 주둔해 있고
뒷산 정상에서는 군 레이더 기지가 사방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길 건너편 일본군 오오무라부대의 병사 중 남아있는 한 건물로 갑니다.
8.15해방 후 이곳 부대 병사의 대부분이 비게 됩니다.
주민들이 미군정당국에 요청합니다. 학교시설로 할양해 달라고요.
시설 중 8개의 막사를 인도받아 개축공사를 통해 대정중학교를 개교합니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는 전라도에서 분리되어 별개의 도가 됩니다.
그리고 1946년 조선경비대를 창설한 미군정의 1도 1연대 계획에 의해 1946년 11월 16일
일본군출신 장창국을 초대 연대장으로 하여 이곳 대정중학교 옆 옛 일본군부대막사에서 9연대가 창설됩니다.
당시 제주지역에서는 경비대는 정식군대가 아니라 경찰의 보조기관이다.라는 소문이 넓게 퍼져 있어서 모병이 어려웠다 합니다.
다른 지역에서 창설된 연대들은 현지의 청년들을 기간으로 하여 창설하였지만
제주도에서는 최초 지원하는 인원이 없어 광주의 4연대로부터 지원받은 기간요원 49명을 근간으로 부대를 창설하였습니다.
이듬해부터 도 일주행군을 하면서 40명, 70명, 80명을 모병하여 1948년 봄에야 1개 대대 정도의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 합니다.
어떤 악연에서인지 9연대는 제주에서 창설되었으면서도 이곳 주민과의 사이는 좋았다 볼 수 없습니다.
초대연대장인 장창국이 1984년에 쓴 육사졸업생이라는 책자에 보면
현지에 부임한 후 첫 참석한 연회에서 경비대가 무슨 군인이야? 미국의 용병이지라는 말을 들었다.
과연 좌익세가 세구나하는 것을 실감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9연대는 이후 이치엽, 김익렬, 박진경의 순으로 지휘관이 이어지다가
1948년 6월 연대장 박진경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게 되고 11연대에 배속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박진경 암살사건은 군의 본격적인 개입과 진압을 부릅니다.
미군이 특히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군의 진압은 강도를 더해 갑니다.
송요찬이 지휘하던 1948년 11월 토벌작전을 시작하게 되고 12월 29일 2연대와 교체하게 됩니다.
산 너머 산 첩첩산중입니다.
빅진경 연대장은 창군 후 첫번째 육군장으로 장례를 치루고
박진경을 죽였다 하는 문상길중위, 신선호하사는 총살형을 당합니다.
(자료사진 : 박진경대령의 육군장 모습)
문상길중위는 사형을 언도받은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였으니
두분은 다시 만났을 겁니다.
이 박진경의 추도비는 제주방송국경내에 세워졌었고
동상은 지금도 구구곡 충혼묘지입구에 서있는데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극과 극을 달립니다.
채명신장군은 3개월만 박진경 연대장이 살아서 부대를 지휘했더라면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학살의 주범이라 합니다.
연대장 취임사에 대해서도
오승국은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했다 하고
서갑성은 1백 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했다 합니다.
9영대는 1948년 말 2연대와 교체되어 제주를 떠납니다.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가 옮겨와서 모슬포부대라는 이름으로 주둔합니다.
주민을 안정시키고 군의관으로 하여금 무의촌을 순회 진료하며,
도민의 도로보수공사를 돕는 등 도민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에 노력하였고,
제주도의 많은 청년들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게 하여 그들을 훈련시켜
해병 신병 3,4기생들 3000여명으로 1개 연대와 독립 5대대로 편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등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만
이들도 악연을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제주경찰국에 내려온 지시에 따라 좌익 활동 혐의로 예비 검속된 사람들중 C,D급 218명을 경찰로 부터 넘겨받아
7월과 8월 두 차례 걸쳐 섯알오름옆 구덩이에서 집단 총살을 하여야 했습니다.
1950년 9월 해병대는 전장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대구와 부산에 있던 훈련소가 통합되어 이전해오면서 육군 제1훈련소가 됩니다.
<자료사진 : 제1훈련소 정문앞 병사들
강병대라는 부대이름이 쓰여진 현판이 보입니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 밀리기 시작해 정부가 대구와 부산으로 밀려났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뭍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 신병 훈련소를 세웠던 것이지요.
<자료사진 : 당시 훈련소 막사>
시설은 참으로 형편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 훈련소가 생기기 전까지 힌국군의 신병보충방식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해당부대별 지휘관이 판단하여
현지에서 병력을 모아 훈련시켜 신규병력을 충원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대별로 충원이나 보충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미군의 제안에 따라 중앙통제하에 모병하고
군에서 직할하는 훈련소에서 훈련된 병사를 시의적절하게 전선으로 배치하는 체제를 갖춘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소명칭도 강한 병사를 양성한다는 뜻에서 강병대라 지었습니다.
<강병대교회사진 : 1차 신병배출기념 체육대회>
계획된 양성기간은 16주였습니다만 .....
전황(戰況)이 다급해지면 속성으로 신규 병력을 훈련시켜 전선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강병대교회 사진 : 1955년 12월 이준식소장 송별>
하여간 이곳에서 약 50만 명의 병사를 배출한 후 논산으로 이전하는 1955년까지
이 훈련소를 지원하는 병참, 보급, 공병, 통신, 의료 및 방첩부대 등으로 인해 모슬포는 또다시 군사요새가 됩니다.
길을 떠나 보지요.
두어 걸음 걷다가 멈춥니다.
워커운동장.
제1훈련소 연병장이었습니다.
낙동강전선사수에 성공 한반도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워커 유엔총사령관의 제1훈련소 방문 기념으로 워커운동장으로 불렀는데
아직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두어 걸음 떼다 또 멈춥니다.
맥나브기지입니다. 통상 맥냅기지라고 하지요.
제2대 육군제1훈련소장으로 취임한 장도영 소장은 훈련소에 속해 있던 이곳에 미 군사고문단의 주둔 기지를 설치했습니다.
장도영 훈련소장이 미군기지 이름을 당시 수석고문관인 맥나브 대령의 이름을 빌어 ‘맥나브村’이라 명명,
1953년 6월1일 제막식을 열었다고 합니다.
훈련소가 55년에 이전한 후에도 58년까지 맥나브 대령의 지휘 아래 KAMG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가
58~73년까지 본격적으로 레이더를 설치,
영국 공군기까지 사용할 만큼 군기지 활용이 많았고,
근무병력도 150명까지 증가됐었다합니다.
이후 레이더 기지는 모슬봉 정상에 최신 시스템으로 이전되었습니다.
그 후 이기지는 미8군 소속으로,
미8군 특히 미2사단 군인들이 교대로 찾아와 산방산에서 유격훈련을 실시할 때 베이스 겸 휴양시설로 사용하다가
90년대 중반 유격훈련 프로그램이 중단된 이후 미군 휴양소로 사용하였습니다.
현재는 한국공군부대가 있다고 합니다.
강병대교회입니다.
1952년 5월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당시 훈련소장이었던 장도영소장이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훈련병들의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교회를 건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병대에 의해 제주현무암으로 지어졌습니다.
수요일에는 천주교미사를 드렸고 군인들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과 피난민들에게도 신앙의 공간을 제공하여 팍팍한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건립시부터 강병대유치원을 운영하여 지역주민과 피난민들의 아이들을 훈련소장병들이 가르쳤으며
이후 샛별유치원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육군이 철수한 후 공군부대의 기지교회로 변모되었습니다만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은 계속되어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야간신우고등공민학교가 운영되어 200여명이 배움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도에서도, 서귀포시에서도, 대정읍에서도, 국방부에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군사유적지를 복원한다고 말을 하는데
사실 현재 남아있는 유적 중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강병대교회가 유일합니다만
군 시설이다 보니 언제 헐어버리고 다른 것 짓겠다하면 말릴 수가 없겠지요.
지금은 부대담당군목이 부임하여 왔는지 모르지만
한때는 담당목사가 없어 관리가 부실해지고 방치되면서
지역주민 성도는 하나둘 떠나버려 지금은 부대 장병들만의 신앙공간입니다.
강병대교회 역사전시관입니다.
성전내부
교회동산 한 곁에 비석이 하나있습니다.
다가가 보았더니 모슬포 마을 발전을 위해 거액을 쾌척하신 듯한 분의 송덕비입니다.
대정초등학교로 갑니다.
1987년 9월에 세워진 공군사관학교 훈적비가 있습니다.
공군사관학교는 6·25전쟁 때 1951년 2월1일부터 4월23일까지 80여 일 동안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장교후보생 등 1000명을 교육했습니다.
공군사관학교는95년 9월 대정초교와 자매결연,
매년 졸업식에서 공사교장상과 장학금을 시상하고 있다고 하고
지난 개교 100주년 기념 6학년 수학여행 때는 군 수송기를 지원하고 공사를 견학시킨 바도 있다합니다.
한국전쟁당시 몸이 아픈 군인과 피난민이 찾을 수 있던 유일한 곳 육군 98병원이 있던 대정여고 쪽으로 갑니다.
처음에는 제1훈련소 훈련병의 건강과 위생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되었습니다만
차츰 기능이 확대되어 지역 내 주민과 피난민들의 건강까지 책임지던 곳입니다.
입구 정문이 있던 자리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한쪽에 부셔진 잔해만이 쌓여있습니다.
08년도까지는 이곳에 옛 정문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도 관심갖는 이 없고 흉물스러이 서서 밭을 관리하는데 걸리적거릴 뿐이었죠.
그래서 철거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때에야 이사람 저사람 한마디씩... 몰상식한 땅주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웃기는 일입니다.
<98육군병원 정문 : 08년도 사진 >
옛길을 따라 걸어가니 무슨 비석의 뒷면이 보입니다.
조국위해 몸 바친 제영위의 공적은 길이 조국위에 비치오리 제98육군병원장병일동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정면에는 의무병과표시를 음각한 위에 소령, 하사, 일병의 이름이 나란히 있는 충혼비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한 2년 지난 훈련소병사만을 대상으로 진료하던 1955년 10월 날짜로 세워져 있습니다..
대정여고에 있는 98육군병원 병동으로 쓰이던 건물입니다.
98육군병원은 당시 제주의 최고진료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통합병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종합학교 출신 소위가 겪은 6·25라는 수기를 보면 전쟁 중 부상을 당해 사단 이동병원으로 옮겼지만 위험해서 수술을 못한다고 했고,
다시 대구 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수술이 불가하다하여
제주도 98육군병원에 와서야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하여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병원이 주둔할 당시에는 약 50여동이 있었는데
57년도에 전주지역으로 병원이 이전한 후 비어 있다가
1964년 대정여고가 개교하면서 구 건물들은 다 헐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한 동이 남아 현재 가사실습실 등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알뜨르 비행장으로 갑니다.
외곽에 중공군포로의 수용소 건물의 잔해가 남아 잇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에서 중공군포로도 급증합니다.
거제도와 부산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수용했지만 그곳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제주에 20포로수용소가 들어섭니다.
본소를 산이수동에 두고 제주시 용담동 공항자리와 알뜨르 비행장 주변 몇 곳에 수용소를 지어 분산 수용합니다.
이 수용소는 멜캐옆에 있다하여 통상 멜캐수용소라 했다는데 주로 걸매물옆 슾지, 지금의 천주교회자리 매립에 동원되었다 합니다.
이곳까지 끌려와 잡역에 동원되다가 저녁이 되어 돌아와 이 건물 안에서 껌껌한 창밖을 바라보던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전쟁이 끝난 후 건물이 비었고 밭담에 해당되는 자리의 벽을 남기고는 밭을 경작하는 사람에 의해 허물어집니다.
29사단 창설기념비입니다.
부대는 지금 없어졌고 비석만 이곳 녹남못옆에 서있습니다.
태권도 사단이라고 유명하고
이 부대 사단장으로 취임한 최홍희가 장병들의 기초체력 단련과 호국무술로서 태권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때는 태권도라는 명칭이 없었지요.
당수도등의 이름으로 불리어 지다가
훗날 1군단 창설식에서 최홍희가 창설한 오도관 사범 남태희중위가 이승만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보이게 되지요.
남태희가 기왓장 13장을 겹쳐 놓고 일격에 박살내는 것을 보고 이대통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시범이 끝나자 이대통령은 최홍희를 돌아보며 "저게 예로부터 전해 오던 우리 태껸이야 태껸! 앞으로 전군에 보급시켜야겠어."했다합니다.
여기서부터 우여곡절은 있지만 태권도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고
태권도가 전파되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최홍희씨는 훗날 박정희대통령과의 불화로 캐나다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그 후 ITF를 창설하셨고 국내는 김운용이 주도하는 WTF가 주도하였지만 국제적으로는 꽤 영향력 있는 단체로 키웠습니다.
수구초심이라 고령이 되신 다음 한국으로의 복귀를 희망하셨으나
북한에 태권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인한 정부당국의 야멸찬 거절로
그래도 내민족의 땅이라는 북한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초대 사단장의 일생만큼이나 이 창설기념비의 일생도 참 기구합니다.
1980년에 현지점 남서쪽에 세워져 있던 기념비가
어느날 부수어져 밭 한구텅이에 매몰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잊혀져 가다 ...
2000년 어느날 정부에서 태권도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발표를 합니다.
대정읍협의회에서 태권도공원후보지로 신청을 하면서
이지역이 태권도의 발상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잔해가 쌓인 일대를 발굴합니다.
주먹 부분이 분리되어 있고, 삼각기둥 모양의 탑신도 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으며
글자도 일부 훼손된 상태의 잔해를 모두 모아 캐나다에 거주하는 최 장군을 찾아가서 글씨를 다시 받아
훼손되기는 했지만 원래 탑신을 그대로 끼워 맞춰서 2002년에 복원합니다.
각계의 성금을 지원받아 유치활동을 하였지만 결국 태권도공원은 전북 무주지역으로 결정되었지요.
충혼묘지.
하모리 월롱동산에 자리 잡은 충혼탑과 묘지는 1953년 4월 30일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제1훈련소 공병대에 의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사망한 지역출신 영현들을 모시기 위해
지역단위로 세워지기 시작한 충혼묘지는
훗날 지역내 이곳저곳 산재한 애국동지기념비 등 각종 위령비와
4.3 관련비석들이 유가족 등의 요청과 지역개발을 이유로 이전되어 와 있습니다.
최근에 공식적으로 모셔진 인사로는 2006년 모슬포방어축제중 사망한 당시 대정읍장과 실종된 해성호선장이 있습니다.
충혼탑 가는 길은 끊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충혼탑을 가려면 밭을 가로질러야 합니다.
당시 제1훈련소부부대장이었던 김종평준장의 헌시가 있습니다만
밭을 질러 이 탑에 갈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육군 일등상사 박순진 순국기념비.
한국전쟁 중 전쟁터로 나간 모슬포의 청년은 대정중학교 학생 140여명을 포함 350여명입니다.
이중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유명을 달리하여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당시에는 충혼묘지 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그 부모들이 애간장이 끊어지는 슬픔 속에서 개별적인 묘지를 마련합니다.
이곳의 박순진일등상사는 하모리출신입니다.
비석에 의하면 학생으로 입대한 것은 아니고
초기 군창설때 입대하였습니다.
1951년 전사하였고 부친이 그 다음해 당시 육군 98병원인근에 순국비를 세웠습니다.
이런 유형의 순국, 충혼비들이 이곳저곳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고 대부분 지역별 충혼묘지로 이설되었습니다만
개인부지에 있는 것들은 요청이 없는 경우 이설되지 않았습니다.
대승사.
이절은 김태웅스님이라는 분이 서울에 계시다 피난 중에 제주로 내려와 세운 법화종소속 사찰이라 합니다.
국방유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지만
98육군병원에서 사망하여 화장을 한 무연고 병사들의 유골이 안치되었던 절이라하여 포함시켰습니다.
한때는 무연고유골이 230기이상 안치되었었다 합니다만 이것은 조금 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은 전장도 아니고 훈련소와 후송병원이 있는 지역일 뿐인데...
무연고유골이 230이라면 연고 있는 유골은 도대체 몇기란 말일까요?
답답한 마음에 절집 담을 타고 내려오는 능소화에게 따져 묻습니다만
이아이도 무얼 아나요?
블로깅을 위한 글을 쓰면서 이렇게 먹먹한 적은 처음입니다.
모살개의 모진 모래바람이 맵고 매운 마늘밭을 휘감고 도는 곳.
모래바람 때문인지 마늘냄새 때문인지 역사 속에 눈물이 더 많은 곳.
언젠가는 그 악연의 고리가 끊길 것이라는 기대아래 군사유적정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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