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호 마을을 답사기록에 첫머리로 올립니다.
옛 이름으로 말하면 다위 웃동네이지요.
동사무소 설촌 유래에 의하면 "지금부터 430여 년 전 문취응이 이곳에 이주하여와 현재 11대째 살고 있으며
'다호' 마을은 인심이 좋아 살기 좋은 부락이라는 뜻에서 '다위'라 불렸으나
화재를 자주 만나자 현재 마을 이름은 '다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만
제주문화원설명에 의하면 다위, 다외마을로 불리다가 다외마을의 한자표기인 多好마을로 변형된 것이라 합니다.
도두동에 속해 있습니다.
1962년 이후 도두동은 도들봉아래 도두리와 다호마을, 몰레물마을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다가 비행장확장공사로 다호마을과 몰레물 마을이 반반씩 없어져서 다호사람 반은 신성부락을 이루었고
몰레물마을 사람 반은 제성부락으로 이전했고 남아있는 몰레물 섯동네 흘캐는 새몰래물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제성부락은 연동으로 흡수되어 현재 도두동은 도두리 동,중,서부락, 다호마을, 신성마을, 신사수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촉대정입니다.
1996년도에 마을 전설을 베이스로 해서 만든 정자인데 마을사람의 일체감조성을 위해서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 지역의 원이름은 종이빌레 쇳대굽이라 합니다.
마을 서쪽 네거리에 평평한 너럭바위가 널려있는 공터 종이빌레속 한 지형이 촛대의 밑둥처럼 생겼다하여 그렇게 불려져 왔던 곳입니다.
그곳에 70년대에 마을회관을 지었고 그 가운데 공터에 96년에 정자를 지은거지요.
그 정자지을때 까지는 그래도 한 90호 정도가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 30가구정도 살고 있다하네요.
참 살기 어려운 마을입니다.
제주에서 제일 발전했다는 연동 옆에서 도시의 섬처럼 고립되어있지요.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1981년 다호마을 일대 사유지에 대해 제주공항 확장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 공항시설지구로 결정했습니다.
3만평쯤 될 겁니다. 이곳이 아직도 묶여 있고 앞으로도 계속 묶여 있을 겁니다.
2015년에 신공항건설 여부를 결정할 때나 매입여부를 결정하겠다 하면서 재산권행사를 못하게 합니다.
더욱이 최근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와 제주공항 고가도로 및 주차장 확장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공사로 인한 소음피해와 풍진에 따른 먼지발생, 차량통행 소음 등으로 주민들의 불편은 가중되고 있습니다.
또 항공기가 밤 11시 까지 운항되면서 항공기소음 민원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호마을사람들은 피해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진정서와 호소문을 제출했지만 마이동풍...
지난 4월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 현장에서 집회를 열고 "공항 확장 공사로 인해 생활권과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더 어려워지기만 할 뿐입니다.
예전에는 마을에 물통이 없어 몰래물까지 물 뜨러 다녔어야 하고
지금의 공항로동쪽 긴언덕때문에 성밖마을이라 하대당하고
일제말기에는 정드르 비행장 확장공사에 동원되고
해방 후에는 토지뺏기고 재산권 묶이고..
웃으며 지나갈 동네가 아니었고 아픈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마을인데 너무 소홀히 지나친 것 같습니다.
용운동(흥운동)은
슬픔을 이겨낸 마을이지요.
새정드르라는 이름에서 아시겠지만 일제시대에 정드르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터전을 잃고 이전해 왔습니다.
그것도 마음대로 옮겨 간 것이 아니고 비행장옆으로 집단이주되어 비행장건설에 동원되었습니다.
속이 터지고 미치는 거지요.
새로운 기운을 얻기 위해 마을이름을 짓습니다.
마을의 가운데 지점이 제주민란때 이재수가 이끌던 서진군이 황새왓에서 동진군과 합류하기 전에 진을 치고 있던 진터왓임을 감안해
龍興起雲에서 글자를 따서 용운동(제주문화원 자료. 표지석에는 흥운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열 집에 하나씩만 사내가 있다 할 정도로 남자어른들이 세상을 뜹니다.
아무보상도 없이 집단이주된 울화가 쌓인 데다 비행장건설의 심한 노역
그리고 새로이 지역일대를 개간하여 삶터를 만드느라고 쌓인 질병으로 일찍 떠나시는 겁니다.
진터왓옆 솔개가 많이 날아드는 소로기동산에 포제단을 만들어 제를 들이고 가장 높은 곳에 경로당을 만듭니다.
소로기동산의 기운이 세어 밟아주어야 한다는 풍수를 따른 건데
억지로라도 어르신들이 높은 곳에 있는 경로당으로 거동을 하시다보니 몸이 많이 좋아져서인지
그 때부터 돌아가시는 분의 숫자가 다른 마을 평균으로 돌아왔다 합니다.
용천기운했는지 고 정휴님이 운영했다는 기름공장을 필두로 하여 번창을 시작 지금은 용담2동에서 가장 큰 마을입니다.
옹기묘남쪽 사거리에서 월성마을서쪽으로 차 두대가 겨우 비켜가는 가는 길이 구한질
즉 제주목에서 대정가던 옛 큰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가다가 명신부락 못 미쳐 오른쪽 소공원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객주집이 있었답니다.
지금도 비어 있는 공터이기도 하고 그 앞에 90년도 꽃길조성 최우수단체비도 있고
오래된 나무들도 있으니 객주집을 하나 재현해 두면 괞찮을것 같습니다.
답사시작을 어영연딧당에서 해서 용문동 포제단을 거쳐 왔습니다.
그리고 당당당하면서 몇군데 당과 포제단을 몇 곳 거쳤는데..
몰아서 기술합니다.
어영연대 서쪽 바닷가에 있는 어영연딧당.
衆散處라 합니다.
무리져 있는데 모여있는게 아니고 흩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누가요? 堂神들이 한곳에 있긴 있는데 각각의 당을 차지하고 흩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잡목과 선인장나무가 들어차 있어 안을 확인할 수가 없지만
제가 10년 전 답사할 때만 해도 까마귀쪽 나무로 구분된 네 곳의 당과
초소라고 오해하고 있는 건물 안에서 제단과 지전 또는 명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사대부고 안에 있는 궁당에서 가지갈라온 당도 있었고
도두리 오름허릿당에서 가지갈라온 당, 지금의 한림고등학교내에 있는 명월리본향요드렛당에서 가지갈라온 당,
그리고 원적불명의 당이 두 곳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한곳에서만 아주 오래된 명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집온 부인네들이나 이주해온 가족들이 당을 가지갈라와서 모셨던 곳입니다.
부인네들이 모시고 왔기 때문에 치병과 산육에 대해 정성들이는 일렛당과 요드렛당의 성격을 띄게 되었습니다만
모시던 분들이 떠난 후에는 그 흔적조차 시들어 갑니다.
절오백 당오백이라하지만 예전에 몇 개의 당이 있었는지 현재 몇 개의 당이 있는지 모릅니다.
가장 공신력 있다는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최근자료에 제주전역에 멸실 46, 폐당 22, 정상 170
그래서 지금 당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192곳이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실제 답사로만 보아도
정상이라고 조사된 곳에 몇 년째 아무런 비념의 흔적이 없고 10여 년 전에 유통되던 막소주 빈병만 이 굴러다니는 곳도 많고
폐당되었다고 하는 곳에 컵으로 둘러싸인 양초를 발견한 경우도 있고
전통문화연구소 보고 자료에 나와 있지 않은 곳인데 제장이 쌓여 있고 현재 당골이 다니는 당도 서너곳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건포배은에서 보면 당 1백29처를 불 지르고 무격 285명을 귀농시켰다고 되어 있고..
조선시대 후반에 유교식 포제가 들어오면서 마을 유학들이 젊은이들을 시켜 당을 불 지르는 경우도 많았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또 훼철되고..
미신타파한다고 훼철하고 ..
(제주신보 :1969年 3月 31日에 全島의 135個所 全神堂, 祭壇을 破壞했는데
市, 郡別로 보면 濟州市 22, 北濟州 45, 南濟州 68個所이다.)
그렇게 부수어 졌다 생겨나고 또 부수어 졌다 또 생겨난 당인데
이제는 어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멸실되어 갑니다.
당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국외자가 당을 보존해라 말아라 할 수 없는 겁니다.
그 당을 계속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조촐하더라도 당이 유지되는 것이고
다니는 사람이 없으면 그 당이 아무리 번듯하게 만들어 졌더라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위 신문기사에서 제단을 파괴했다는 글에 걸리지 않으셨나요?
포제단을 없엤다는것입니다.
포제는 유교식 제사이긴 하지만 육지부에서는 조선 중엽이후에는 지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주에는 유교가 꽤 늦게 들어오면서 포제까지 따라 들어와서 꽤 오래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폐단이 크다하여 포제단을 철폐하게 됩니다.
도에서 각 동에 내린 공문하나 보실래요?
(1970.3.16)
수신 : 각 동장
제목 : 신생활운동에 따른 부락 이사제 폐지
매년 구정초가 되면 부락별로 대행사로 많은 재물과 복잡한 절차로 이사세(포제)를 실시하고 있는 바
이는 부락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에 불과한 것이며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많을 뿐만 아니라 하등의 이익관계 없는 것이고
또한 정부에서는 모든 제례는 가정의례 준칙에 의거 실시토록 강력히 전개하고 있는 현실에 조감하여
각 동에서는 신생활추진위원 및 개발위원회를 개최하여 이를 폐지토록 강력히 추진하고
부락 이사제로 인한 소요경비를 당해 지역 주민의 복지시설 면에 충당할 수 있도록 기금조성에 노력하시기 바라오며
이사제 폐지여부에 관한 추진 결과를 2.14일한 회의록 첨부보고 하시기 바람.
이와 같은 공문에 의거한 洞會議錄 가운데 건입동회의록을 例로 보일까요.
1. 동개발위원 및 신생활운동추진위원회
2. 일시 1970.2.12. 16.00시
3. 장소 건입동사무소
4. 참속인원 12名
5. 회순
가. 개회 나. 국민의례
다. 개회사 라. 회의안건
동장개회사에 이어 신생활운동에 따른 部落里社祭를 폐지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폐지여부를 여러 위원들과 협의하고자 하여 소집했음.
임덕홍위원 : 우리나라 관습으로서 69年까지 계속 거행하여 오던 제를
70年도부터 갑자기 폐지함은 동민들의 여론도 있는 듯하니
다음 동민대회에 결의후 폐지하고 70年度는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함.
결의 : 70年부터 폐지하기로 하되 설득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것.
이 결과로 제주도내 모든 포제단이 훼철되거나 사용하지 않습니다.
당은 몰래몰래 다닐 수가 있었지만 포제는 그 당시 서슬 퍼런 감시의 눈을 피해서 드릴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1970年에 무속행위를 하거나 제를 드리다 잡혀간 사람들입니다.
朴유생 남 54, 송사인 남 43, 송경화 여 72, 강종한 남 50, 백선현 여 68, 홍명옥 여 45, 송귀비 여 84, 이월향 여 56 고화옥 여 69....등등
그런데 무슨 끗발인지 용운동 용담2동 포제단과 삼도2동포제단은 제를 계속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그 외의 각 동리에 있는 포제단은 1996년부터 2003년까지 무형문화재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예산이 책정되어 있을 때
마을요청에 의해 예산을 지원받아 재정비하거나 복원한 곳입니다.
2000년초에 새로 세운 용담1동 포제단입니다.
2005년에 포제단을 복원한 아라동 동사에서 2009년 올린 진설사진 한번 보시지요.
삼도동 고원규와가
항상 이문간만 보고 가다가 그날은 관리하는 분을 만나서 잠시 허락을 받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상대부터 살아온 곳이라는데 지금은 오빠분이 사시는 데 몸이 많이 아파서 문밖출입을 못하기 때문에
동생분이 하루 몇 번 와서 수발을 들어준답니다.
환자가 있어 집 내부에는 들여보내줄수 없고 집 마당에서 밖거리 외관만을 한 5분정도 볼수 있도록 해준답니다.
지붕 윗부분은 기와에서 물이 새고 보수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할 수 없이 콜타르를 발랐지만
안쪽에는 굴묵나무로 된 기둥들과 조선식 다락방까지 있다합니다.
그래서 물어봤지요.
혹시 민속자료나 전통가옥으로 지정해달라고 해 봤냐고요
대답인즉슨 그렇지 않아도 무근성 마을을 개발 한다고 먼문간 및 올레를 부수고 주변 초가집들을 철거할 때
지원이 가능하냐고 문의 했더니 관리비를 조금 주는 대신 주인 마음대로 못한다고 대답을 해서
그냥 있는 돈으로 콜타르를 발랐답니다.
그리고 돈이 없어서 이 상태로 계속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더군요.
콜타르를 발라 제주도 기와집의 특징, 즉 바람이 세기 때문에 기와가 특히 크며 처마 끝과 용마루 주변에는 회땜질을 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붕의 물매는 초가집처럼 뜨며 추녀를 치켜들지 않은 것만 확인 하고 아쉬워했는데 ..
화북 김석윤와가에 와서 보수 정비하는 것을 보고는 후유...........
먼문간과 이문간은 그대로인데 건물은 낮섭니다.
김석윤와가 지금의 모습이 낮설어서 사진을 안찍었습니다.
보수시작할 무렵인 금년 4월에 가본 사진입니다.
두집 다 어차피 와가의 기본인 지붕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한곳은 형태는 남아 있으나 콜타르로 칠해져 있고 한곳은 다 들어내고 새 기와를 깔고 위 용마루는 겹겹이 쌓았습니다.
집의 구조만 보시지요.
화북동은 가운데 상방을 두고 오른쪽으로 앞에 큰 구들과 굴묵, 뒤에 고팡이 있으며,
왼쪽으로 앞뒤에 챗방과 작은 구들, 그 옆에 정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근성 와가는 선비적 가치관을 나타내는 정원이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위치하고
화북동 김석윤 와가는 안거리와 밖거리사이에 잇돌이 놓여있고 대문과 이문 사이에 샛문이 있어 측면으로 드나들도록 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 앞 김윤일와가는 지붕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 먼문간과 이문간만을 찍었습니다.
이문간에 샛문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이걸 알아봐야 겠습니다.
봉개동 복귀주택입니다.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이후 정부에서는 4.3마을 재건계획을 세웁니다.
정부기록인 1955년 4.3사건피해상황조사서에는 당시 난민은 2074세대,
그리고 4.3난민이 아니고 육지에서 동란시 피난 왔으나 돌아갈 곳 업는 세대 898세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 중 중산간마을로 복귀를 희망하는 사람을 위해 난민정착귀농단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이들 난민의 복귀를 위한 건축자재, 구호미, 농기구 등을 국고에서 지원하여
남자들은 돌을 쌓고 여자들은 물을 길어 흙을 밟는 고생 속에서 계획보다 많은 6410세대가 중산간마을로 입주합니다.
(이분들은 사실 1970년대 후반에 거의 다 아래 마을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516직후 다시 한번 4.3이재민 원주지 복귀사업을 벌입니다.
제주도가 원주지복귀를 희망하는 4365세대를 대상으로 2개년에 걸쳐
첫해에는 816세대 두 번째 해에는 3400세대를 복귀시켰는데
제주신보 1963년 당시 기사에 의하면 각호당 주택건축비로 1차 사업에는 2만5천환, 2차사업에는 4만환을 기본으로 지원하고
그에 추가하여 농사자금 1호당 1만환 3호당 소한마리,
그리고 땅을 개간한 사람은 땅을 개간자 명의로 등기해주고 1호당 1만환씩 무상 지원하여 원주지 복귀를 지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답사시 찾아간 봉개동 주택은
516직후 원주지복귀사업이 실시될 때 지어진 9~12평형 주택 중 하나로 지붕을 제외한 그 형태가 고스란히 보존된 가옥입니다만
거주하고 계신 분은 당시 소와 개간비 1만환을 제외하고는 융자로 지었다 합니다.
무상 지원했다는 기록이 틀리는 건지, 집만 지었다고 사는 게 아니고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에 드는 돈을 융자받은 것인지
그 사실은 알수가 없습니다만
이 주택은 제주 중산간의 전형적인 집형태를 관에서 제시하고 그 모형대로 그 집에서 살 사람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일부러 부시지 않은 것은 얼마 전까지는 튼튼히 남아있었으나
봉개동 내부도로 및 번영로 확장시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있는 건물이 몇 채 없다고 합니다.
아라동 묘지를 갑니다.
어모장군 행 훈련원첨정 담양 전씨 묘소입니다.
진상품인 소를 죽이지 않고 한양까지 이동시켜 관작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 스토리는 제주지역 비석에 흔히 나타납니다.
가까운 예로 옆 동네 영평동 고갯마루에 있는 진주 강씨 비석에서도
진상품인 전복을 산적에게 뺏기지 않고 한양으로 가져가서 관작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지요.
사실 그 당시는 진상품을 모으는 것도 큰일이지만 그걸 운송하는 것도 큰일입니다.
그래서 그 소임을 맡은 이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면 말직이나마 관직을 내리고
9급 공무원에서 도지사까지 지낸 누구처럼 한 칸 한 칸 올라갈 수도 있는 거지요.
제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문인석 입니다.
어모장군 행 훈련원첨정입니다.
품계는 정3품이지만 관직은 종4품입니다.
이조중엽이후 품계인플레가 되어 계고직비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그걸 문제 삼는 게 아니고...
같은 정3품이지만 서반에서는 절충장군이상이 당상관이고 어모장군이하는 당하관입니다.
그래서 나온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정삼품이라고 당상에 올라갔더니 너는 당하로 내려가라는 모욕을 받았다 하여
모욕을 방어하는 장군이라고 어모장군이라고 불리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매장군으로 발음하는 분도 있습니다.
알만한 사람이 왜 그러냐고 하면 모욕을 방어하는 장군이라는 것 보다는 워매 높은장군이다라는 게 재미있지 않냐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저도 어매장군이라고 합니다만..
어쨌든 문인석은 당상관직에 있던 분만이 묘소 앞에 세울 수 있는데...
문인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산사람에게도 과공은 비례입니다.
특히 돌아가신 분에 대한 과공은 망자에게 왜 거기까지 올라가지 못했냐며 욕보이는 게 되어
망자가 진설을 받을 수 없도록 합니다.
그 옆에 있는 묘소입니다.
일제말기의 무덤입니다.
묘비의 중앙부를 움푹하게 하고 주사를 입히고 글씨를 쓰는 것은
중일전쟁다음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의 습속입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초기전투에서의 일본의 승승장구를 본 조선의 많은 학사와 문인들이 친일로 돌아섭니다.
일본이 중국까지 칠 정도인데
조선에서의 더이상의 반발은 무의미하다는 패닉상태에 접어 든 거지요.
그래서 그때까지 심정적으로 거부하던 일본의 습속도 세간에 쫙 퍼집니다.
그리고 묘지 측면에 황기 2천6백몇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황기 2600년은
神武天皇じんむてんのう가 즉위하였다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元年)으로 했을 때
서기 1940년입니다.
사실 일제강점 초기만 해도 일본에서도 실질적인 천황은 794년 수도를 쿄토로 옮기고 평안경 시대를 연 인물인 칸무천황에서 부터 시작된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서기에서의 그 이전 기록은 설화정도로만 생각해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칸무 천황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딸인 고야신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칸무천황에 대한 중요성도 희석시키고
2600년의 유구한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세계에 과시하고 황국사관을 심기위해
서기 1940년. 진무 천황(神武天皇)의 즉위 2600년을 맞는 해를 기념하기로 한 일본 정부는 紀元二千六百年祝典準備委員会를 발족시켜
기원절인 2월 11일부터 식전이 개최된 11월 10일까지
가시하라 신궁(橿原神宮) 등 여러 능묘의 정비 등과 함께
기원 2600년 특별 관함식
황기 2600년 봉축 전국기독교신도대회
기원 2600년 기념 관병식
기원 2600년 봉축회
기원 2600년 봉축 미술 전람회
기원 2600년 기념 무도 어람시합 (검도·유도·궁도 등)을 개최하고
기원 2600년을 기념한 기념 우표와 담배를 발매했지요.
이 황기 2600기념탑은 부산 금정공원을 비롯해 우리나라 곳곳에 꽤 많습니다
(지금은 모르겠네요..)
그무렵 시류에 편승한 비석입니다만....
어쩌면 담담하게 그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모습이 차라리 일부러 삭제한 것보다는 낫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답사였습니다.
고대에서 근대 그리고 현재까지를 검토하게 하네요.
쓰다보니 꽤 긴 글이 되었네요.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