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제주시 외도동

하늘타리. 2010. 9. 16. 07:50

외도동입니다.

이름이 나타내듯이 도근천 바깥에서 형성된 마을입니다.

마을이 커져서 1962년에는 내도동, 수정마을, 연대마을을, 1978년에 도평동을  모두 포함하였습니다.

 

통물로 왔습니다.
이곳 통물이라는 곳은 물통이 아니고 물통이 형성되는 지역일대를 말합니다.

이곳 짐동산에서 부터 월대까지 내려가는 통물질변에 고인돌이 있습니다.

 외도동에 고인돌 아홉곳이 있다는데
길가 두곳정도만 보고 수정사터와 월대인근을 둘러 보겠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이 고인돌은 제주주호시대의 것이라 합니다.
설명을 한번 보시지요. 

 

 

 

 통물질변 또 한기

 

 

 

 

계속 통물질을 걸어 외도천 옆을 따라 내려갑니다. 

 

고망물


제주도 전분제2공장 수정천 신축기념비라는 글자는 남아있는데 그외 글짜나 연도를 알수있는 것은 다 쪼아놨습니다. 

 

 

일설에 전분공장이 있었다고도 하고 누구는 여기도 수정사 옛터라고도 하는 펌프장입니다.

 

 

수정사 옛터로 갑니다.


옛 수정사의 칠성각, 산신각의 주춧돌과 대웅전의 문지두리등을 쭉 펼쳐놓았습니다...

 


수정사의 옛터는 지금 무슨무슨교회라는 큰 교회가 들어선 자리와 어린이공원을 조성한 자리를 합친곳이랍니다.
이곳은 독성각 등이 있었던 자리일겁니다.
그렇게 컸냐고요?
조선왕조실록 태종 8년(1408년) 기록에

비보사찰인 수정사의 노비가 현재 130인 있으니 다른 사찰처럼 30인만 남기고 나머지는 농부로 돌려주십시오 라고

제주목사가 정문을 올리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는 130명의 노비가 필요할 만큼 큰 절이었다는것이고..

위치가 맞냐고요?

고려말의 큰학자 이제현이 익재난고중 당시 민요를 한역하여 소악부에 실은 시에 보면

도그내 물뚝이 무너져 수정사 마당까지 물이 넘치네 승방에선 이날 밤 여인을 품고 주지는 오늘밤 뱃사공이 되었네

(都近川頹制水坊 水精寺裏亦滄浪 上房此夜藏仙子 社主還爲黃瑁郞)라고

 승려들의 비행을 비아냥 거리는 듯한 시지만 하여간 수정사가 도근천옆에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이제현은 소악부에 한시 11수를 남기면서 대부분 시에 대해서는 그 출처나 제목을 남기지 않았습니다만

이 도근천요에 대해서만은 제목과 더불어 제주도민요를 직접 옮긴 것이라며 시의 해설까지 남겼습니다.

쉬어간다치고 도근천요에 대한 이제현의 설명을 들어보시지요.
"최근에 높은 벼슬을 하는 관리가 연회 자리에서 늙은 기생 하나를 희롱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승려들과는 어울리면서 사대부가 부르면 오는 것이 어찌 그리 늦느냐?'고 하였다.

기녀가 대답하기를 '요즘 사대부들은 돈 많은 상인들의 딸을 취하여 두 집 살림을 차리거나 노비를 취하여 첩을 삼는데,

우리가 중과 속인을 구별하여 대한다면 어찌 입에 풀칠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부끄러워했다."
고려말이야기인데 총리,장관 청문회를 보니 지금 시대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수정사스님들이 사용했다는 납세미물에 가봅니다.

 

 

 

수정사터를 빙둘러

길옆에 피고 열린 꽃과 열매를를 보시고 

 

 

 

 


절물자리에서 올라오는 물로 운영하는 목욕탕 한번 들어가 보시죠.

 1000원입니다.

 

 


어린이공원 안을 흐르는 물

 

 

 

 

다른 한쪽의 옛 수정사표지 

교회주인이 뭐라 할까 봐서 교회는 사진찍지 않았습니다.

 

월대와 월대소. 

 

대아래 물통

 

월대에서본 월대교

월대교 너머로 보이는 지금 외도의 상징 아파트단지

 

도근천과 외도천이 합류하는곳 가까이 위치한 월대옛자리

 

월대주변 월대표식

 

월대라는 글씨는 제주읍장을 지낸 연농 홍종시의 글씨인데

이분은 삼성혈 정문 편액인 乾始門, 명월천에 明月臺, 대정 추사 유배지에 秋史先生謫慮遺墟碑라는 글씨 등 두루두루 필적을 남겼습니다.

 

사상 선정비

 

 

 

 

양헌수, 윤구동... 그리고 김정. 김정은거창하게 청덕휼민영세불망이랍니다.

사실 이곳에 와있는 세분의 선정비도 참 팔자가 기구합니다.
이곳에 있는 비는 1920년대 일본이 제주시와 한림사이에 도로공사를 하면서

세메깃길과 통물길을 연하던 외도비석거리에 있던 공덕비들을 다 파헤쳐 방치해 놓은 것을
마을주민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합니다.

그분이 여기 함께 있는 학생누구누구송덕비의 주인공이랍니다

양현수목사의 경우는 제주목사로 온 다음해인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분인데

주변 꽃과 열매로나마 위로드립니다.  

 

 


참 임제도 와서 놀고 갔다는 기록이 있지요.
남명소승에 보면
"도근천가에 도착하니 아장 문덕수와 임세영이 술을 들고 나를 맞았다.

그곳은 시내가 흐르다 못을 이루었는데 한라산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이에 술을 주고받으며 실컷 취하고는, 서로가 돌아가며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자 말고삐를 놓아 치닫기도 하다가 천천히 걷기도 하고,

서로 말 앞에서 피리를 불게도 하는 등 극도로 호기를 부리며 제주성내로 들어왔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과거급제후 제주목사로 재직중인 아버지를 만나러 와서는

제주 구석구석 좋은데는 다다니고 좋은 것은 다먹고 다녔지요. 칙사대접이 어련했겠습니까. 

그리고 이곳은  박영효가 1907년 유배를 왔을 때 은어를 안주로 삼아 1년간의 편한 유배를 즐긴 곳이기도 한 곳 입니다.

월대 설명문을 읽으시고

월대주변을 감상하시지요.

 

 

 

 

 
삼별초의 조공포유지설명문

 

삼별초는 1270년 고려관군을 격파하고 탐라를 장악했지요.

지금의 애월읍 고성리에 병사들과 주민들을 동원하여 항파두리 토성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는 일이 진행되는 동안 주민들과 병사들은 식량이 부족해서 기근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소설가 오성찬의 아아 삼별초의 한 구절을 옮기면.
"성을 쌓는 동안 삼별초는 동원된 인부들의 식량을 대노라고 했으나 어떤 때는 그것이 원만치 못했었던 듯 이런 후일담이 전해온다.

고된 노동에 굶주려 배가 고팠던 인부들은 똥을 싸놓고 그걸 다시 먹으려고 똥싼 자리에 와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이 먹어 버렸더라는 웃지 못 할 이야기였다". 고 하는데 누구한테 조공을 받고 어디다 조공을 한다고 조공포가 있겠습니까?

뒤에 제주도에서 더이상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지자

남해연안으로 배를 타고 나가 동포들의 민가를 약탈할때  이곳으로 드나들었다고는 합니다


1601년 김상헌의 남사록에 의하면 제주사람의 언어가 난삽해서 조공천이 도근천이 되었다는데

이것은 난삽하고 아니고의 여부를 떠나 최초 신증동국여지승람(1503년)을 쓴이가 잘못알고 있던 것일겁니다.

1370년경 돌아가신 고려말의 대학자 이제현도 이곳을 도근천이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공천, 조공포라는 이름은 조선초에 생긴이름으로  생각됩니다.  

앞서의 김상현의 책 관방조에

도근천포구 수전소에서 모든 공납물과 선물이 차례대로 바다를 건넌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조에서는 이곳 포구에서 나라에 나라에 조세 따위를 바치는 조공선이 출발한 듯 합니다.

그때부터 조공천, 조공포가 되었나 본데
그렇다면 조빙사대의 일환으로 종속국이 종주국에 때를 맞추어 예물을 바치던 일.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조공(朝貢)이
아니라 나라에 조세 따위를 바침. 또는 그 조세를 뜻하는 조공(租貢)이라는 글자를 써야하는데

왜 조공(朝貢)이 쓰였는가는 가름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삼별초때부터 포구로 쓰일정도로 요긴한 곳이라면 다른포구보다 먼저 또는 같이 방호소가 설치되는 등 어떤 조치가 있었을텐데

조선 중기쯤에야 방호소를 설치해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조 10년(1679년)에 제주안핵겸순무어사로 임명되어 제주에 온 이증은  제주섬 일대의 방호시설을 점검하던중

1680년 음력 2월 26일 경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고내포의 남쪽 봉수, 남두포의 동쪽 봉수, 엄장포, 수산봉수, 귀일포, 조부포의 동쪽 연대를 지나 조공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교수 정유설, 목사군관 이수원이 나를 만났다.

이 포구 역시 이선(李選)이 순무할 때(1675년경)에 방호소를 장차 설치하기로 건의했던 곳이다.

형세를 두로 살펴보니 포구 및 배를 정박하는 곳이 비록 애월, 조천 두 포구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다음이 될 만하다.

그러나 갯가 백성의 집들이 즐비하여 거주민이 비단 백성을 시키고 군중을 동원함을 꺼릴 뿐만 아니라

실로 집까지 헐려 옮기게 되니 억울하다고 외치며 길을 막아 호소를 드리어 아주 시끄러웠다."고 씁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부근에는 병졸 144명이 주둔했던 방호소의 아랫단계의 방호시설이 유지되었다는 것이고

그 후 방호소가 들어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런저런 말이 있지만 표지판의 설명으로 대체합니다.

 


도그내개.


도근천과 외도천이 합류하여 만나 바다로 이어진 곳입니다.

 

도그내개 예전 남당 또는 알당이라고 하던 해신당이 있던 자리 앞 바다에 방사탑이 서 있습니다.

최근 바닷가를 연해 세운 두기중 하나랍니다.

 

무슨무슨암에서 세운 조경물입니다.

 

 


하나하나에 어떤 의도가 있겠습니다만...일별하고
앞바다에 떠 있는 누워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해수관음보살께 인사드립니다.


암자를 나와서 한기 더 있다는 방사탑을 가보고

 

 

연대마을 쪽으로 갈까하다가 ...나중에 가지요.


돌아서서 보는 바다...


그리고  해수관음을 보았다는 그 바다

 

믿음이 없으니 나투시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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